• <전문 집필활동가 이윤섭씨(41)가 '코리아 다시 생존의 기로에 서다'(배기찬 저)를 비판적으로 분석한 글을 뉴데일리에 보내왔습니다. 

    '코리아 다시 생존의 기로에 서다'는 동북아시대위원회 기조실장인 배기찬씨가 지난해 출간한 책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먼저 읽고 외교관에게 일독을 권하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베스트셀러가 됐습니다. 청와대 수석과 비서관 등 참모들이 읽었고, 군장성과 통일부 직원들도 읽었다고 합니다. 또 김원기 전 국회의장도 299명 의원 전원에게 한 권씩 선물까지 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이윤섭씨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문필가로 '역동적 고려사'(2004, 필맥) '천하의 중심 고구려'(2004, 쇼케이스) 등을 펴냈고 '베이루트에서 예루살렘까지'(2003, 창해)  '대중의 미망과 광기'(2004, 창해) '세계는 평평하다'(2005, 창해) 등을 번역했습니다.>

    다음은 이씨 글 전문입니다. 

    ‘코리아 생존의 기로에 서다’ 는 한국사를 일국사가 아닌 동아시아의 틀에서 서술하고 한국의 미래를 논한 글이다. 그런 면에서 상당히 의미가 있는 책이다. 그런데 한국사를 동아시아의 틀에서 논하기 위해서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의 대립 충돌을 축으로 하여 논지를 전개했다. 한국의 주변 세력을 이처럼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는지, 동아시아의 과거 2200년간을 패권의 역사로 단정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지만 하나의 관점으로 인정할 수는 있다.

    그러나 지난 2000년의 역사에서 한국은 대륙과 해양 세력의 틈바구니에서 온갖 시련을 겪은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이 책의 모든 문제점이 시작된다.

    한국사 왜곡은 현재 중국의 다수 민족인 한족(漢族)이 오래전부터 시작한 것이고 조선 시대의 지배층은 그러한 틀을 수용하였다. 조선 후기에 실학자들이 이에 의문을 제기하고 오늘날에도 의미 있는 연구 성과를 남기기도 했지만 일제의 침략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단절되고 말았다.

    일본 제국주의의 신봉자인 일단의 일인학자들은 한국 식민지화를 정당화하려 한국은 강대한 대륙과 해양세력에 끼어 있는 약소국으로 어느 한쪽 편에 붙어 살 수밖에 없다는 이른바 ‘반도사관’을 주창했다. 이탈리아 반도에 위치한 로마가 해양으로 뻗어나가 지중해를 로마의 호수로 만들고 대륙으로 나가 유럽대륙을 지배한 사실 하나만 들더라도 이 ‘반도사관’의 허구성을 알 수 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한일 합방 이후 이 반도사관을 널리 선전하였는데 그 허구성을 구한말 개화파의 일원이며 애국가 작사자인 윤치호는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의 (독립) 열망을 꺾고자 할 때 조선이 역사상 한 번도 독립국이었던 적이 없다고 주장하여 조선인들을 극도로 격분시키곤 한다. 영웅적인 고구려 왕조의 멸망 이후, 조선반도는 1200년 남짓 명목상 중국의 속국이었다. 그러나 조선 영토 내에서 국왕은 일본 천황이나 중국의 황제만큼 독립적인 지위를 누렸다.

    게다가 조선이 독립국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주장이 맞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곧바로 조선은 결코 독립국이 될 수 없다는 주장으로 이어질 수 있는 건 아니다. 유태인들은 지난 2600년 동안 독립국가를 갖지 못했다. 그렇다고 유태인들은 결코 독립국가를 수립하지 못할 거라는 주장에 설득력이 있는가. 중국은 장장 4000년 동안이나 군주제를 유지해왔다. 그러므로 중국은 절대로 공화정이 될 수 없다는 게 말이 되나. 일본인들은 지난 2000년 동안 게다를 신어왔다. 그렇다면 일본인들은 절대로 구두를 신을 수 없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황국사관에 물든 이 일인학자들은 고구려라는 심각한 장애에 부딪쳤다. 한국을 영원한 약소국으로 전제하고 출발한 이론인데 고구려는 누가 보더라도 약소국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 자들은 고구려를 한국사에서 분리하려 했다. 즉 만주에서 흥기한 요, 금, 청의 선구로 파악하고 ‘만주사’의 영역으로 옮긴 것이다. 이에 따라 발해도 한국사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니까 중화사관에 물든 현재의 중국 공산당이 처음으로 고구려 발해를 한국사에서 분리한 것이 아니다.

    민족주의 정서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코리아, 생존의 기로에 서다’가 이 반도사관의 기초 전제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의 역설이다. 그런데 세부 내용을 살펴보면 고구려의 ‘소패권’을 서술하고 고려도 결코 약소국이 아니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는 하나의 틀을 설정하였지만 기존의 연구 성과를 차용하여 논지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생긴 부정합이다. 이런 볼썽사나운 일이 일어난 것은 ‘반도사관’이 한국 교육에 침투하였기 때문이다.

    1970년대와 80년대에 고교 국정 교과서인 정치경제 교과서와 국민윤리 교과서 등에는 한민족이 980회에 이르는 엄청나게 많은 외침을 겪으면서도 타 민족에 흡수 통합되지 않고 생존한 이유를 서술한 대목이 있었다. 그 첫째는 한민족의 자질이 우수하다는 것과 둘째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완충지대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수많은 학생들에게 해독이 된 이 기술이 실린 연유는 더 살펴보아야 하겠지만 교과서 편찬에 참가한 국제정치학자들이 스스로도 알게 모르게 ‘반도사관’의 기초 전제를 받아들인 탓이다.

    이 괴이한 사관의 기초 전제는 너무나 허약하다. 고구려 뿐만이 아니라 일본사와 중국사 자체가 이 사관의 성립에 걸림돌이다. 중국도 일본도 과거 수천 년 동안 강대국이었어야만 이 사관이 말이 된다. 그러나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고립적으로 존재하다가 19세기 후반 문호 개방을 하고 개혁에 성공하여 청과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비로소 강대국이 되었다. 한국의 삼국시대에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고 백제와 신라가 일본의 부용국이었다는 임나일본부 설을 받아들인다면 일본이 고대부터 강대국이라는 주장은 맞을 수 있지만 한국인 가운데 임나일본부 설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한국인 학자와 일본인 학자의 연구도 대체로 임나일본부 설을 부정한다.

    그리고 한족 국가도 언제나 강대국이었다는 가정을 해야 한국이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의 틈바구니에 놓여 살아왔다는 것이 말이 된다. 그러나 한족의 중국이 북방 유목민족에 우월한 지위를 누렸던 시기보다 열세하거나 완전히 지배받았던 때가 훨씬 더 길다. 그래도 이 틀을 유지하려면 북방 유목민족이 중국의 일원이라고 주장하는 현재 중국 정부의 공식 입장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럴 경우 중국이 언제나 강대한 대륙 세력이었다는 것은 사실이 될 수도 있다.

    일본이 고립된 절역이었고 강대국이 된 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 한족의 중국이 대체로 북방 유목민족에 열세였던 것을 저자도 충분히 알고 있지만 대륙 세력과 해양세력의 틈바구니에 한국이 존재한다는 이론 틀에서 한국사를 기술하였으므로 이 사관의 전제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새삼 잘못된 교과서가 끼치는 해악이 절실히 느껴진다.

    한국의 미래에 대한 기술도 대단히 애매하다.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상대적으로 약소한 나라가 취할 수 있는 선택은 그리 많지는 않지만 상황에 따라 다르다. 세상은 언제나 변하는 법, 영원한 강자도 영원한 약자도 없다. 이 간단한 이치를 염두에 두면 한국이 강대국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할 수도 있고 가능할지는 모르지만 중간자로서의 이점을 누리는 국가전략 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여러 가지 가능성을 거론하지 않고 모호한 결론을 내렸다.

    세부 기술에서도 많은 문제점이 보인다. 이 책은 하나의 거대 담론인데 대개의 거대 담론이 그렇듯이 미시적 측면에서 오류 또는 일방적 주장이 많다. 이를 일일이 지적할 수는 없어서 한 가지만 말하고자 한다.

    고려의 요동원정을 전략적 오류라 하고는 설사 요동을 수복했다 하더라도 명과 수십 년간 전쟁을 치러야 했을 것이라며 영락제의 5차례 몽고 원정(1410~1424)을 예로 들었다. 그런데 고려의 요동 원정 때 명이 보인 반응, 구체적으로 명의 초대 황제 주원장이 어떤 태도였는지를 아는지. 이것은 국사 시간에 전혀 가르치지도 않으며 그것을 아는 역사 교사, 관심을 가지는 이도 거의 없다. 한국사 교육에서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가 전쟁 서술인데 그 발발 원인과 상대 국가의 입장에 대한 기술이 거의 전무하다.

    우선 주원장의 반응을 사료를 통해 소개한다. 『고려사』에는 몇 줄 되지 않지만 주원장이 대처 방안이 없어 당혹해 한 것이 나온다. 고려의 출병 소식을 보고받은 주원장은 크게 당황하여 친히 종묘에 나아가 전쟁의 길흉 여부를 점치기까지 하였다.『조선왕조실록』에도『명실록』에도 주원장의 심사를 엿볼 수 있는 기록이 몇몇 전한다. 

    "근자에 고려가 표문을 상주하는 데 언사가 많이 부실하여 짐이 이미 유사(有司)에 이를 규명하도록 명하였다. 듣자하니 그들은 국도(國都)로부터 압록강에 이르기까지 요충지에 비축하는 군량이 매 역(驛)마다 1~2만석 혹은 7~8만 석, 10수만 석에 이르고 사람을 보내 동녕부의 여진을 유인하여 국경을 넘어오게 하고 있으니, 이는 그 뜻에 반드시 깊은 음모가 있는 것이다. … 지금 요동은 군량이 모자라 군사들이 굶주리고 고단한데, 만약 즉시 사령창(沙嶺倉)의 식량을 내어 그들을 진제(賑濟)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고려로 하여금 도망병을 꾀어 들이려는 마음을 일으키게 할 것이니 좋은 계책이 아니다. 만일 고려가 20만 군대를 내어 쳐들어오면 여러 부대는 어떻게 막겠는가. 이제 건축과 보수를 잠시 정지하고 임시 막사를 지어 10년 거주한 후에 다시 공사를 시작하라. 옛 사람의 말에 사람이 수고로우면 화란의 근원을 막을 수 있다고 하였으니, 깊이 음미해 볼 일이다." (『태조고황제실록』권 338 홍무 28년 4월 신미)

    이것은 조선이 성립한 지 3년 지난 1395년에 주원장이 한 말이다. 조선을 고려라 부르며 만약 침공하면 막을 길이 없다고 자백하고 있다. 1388년 고려의 요동 원정 때에 비해 명의 상황이 더 좋아진 때에 한 말이다.

    "조선국왕이 나에게 도움을 주었다. 홍무 21년(1388)에 너희 조그만 나라 군마(軍馬)가 압록강에 이르러 장차 이 중국을 치려하였다. 그 때에 이성계가 단번에 회군하여 지금과 같이 왕위를 얻었고 고려는 국호를 조선이라 고쳤으니 자연(自然)의 천도(天道)이다. 조선국왕은 정성이 지극한데 지금 두 나라 사이에 수재(秀才 ; 정도전을 말함)가 매양 농간을 부려 곧지 않고 바르지 못하다.…" (『태조실록』권 11, 6년 3월 신유)

    이것은 1397년 조선의 예문춘추관학사 권근이 주원장에게 받아온 선유성지(宣諭聖旨)에 적혀 있는 주원장의 발언이다. 주원장이 이성계의 회군과 찬탈을 천도 즉 하늘의 도리라 추켜세우고 있다. 이 역시 고려 원정군을 방어할 아무런 대책이 없었음을 자인한 말이다.
     
    주원장은 고려에 무리한 조공 요구를 하다가 고려의 요동 원정을 자초하였다. 이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태로 명이 감당할 수 없는 최악의 사태였다. 주원장은 고려와 북방 초원으로 축출된 몽고와의 연합을 가장 경계하였다. 그러나 고려와 몽고가 연합하기 어려운 사정을 알고는 고려의 경제가 파탄지경에 놓일 정도로 과도한 공물을 요구하였다. 우왕과 최영은 이에 반대하였으나 전쟁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다수 신료들의 의견을 따라 공물 요구에 응하였다. 

    공물요구가 거듭되다가 영토 문제마저 일어나자 기습적으로 요동 원정을 한 것인데 이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주원장은 이미 몽고 방면에 15만 원정군을 보낸 상태였고 요동에 주둔하는 명군도 대거 참전하였으므로 요동에 배치된 명군은 소수였다. 요동을 지킬 예비 병력이 없는 상황이었다. 이때는 운하가 막힌 상태여서 군량을 많이 운반할 수 없어 명이 대외 원정에 보낼 수 있는 병력은 15만이 한계였다. 중국하면 언제나 백만 대군을 동원할 수 있는 나라라는 대단히 잘못된 인식이 한국인에게 각인되어 있는 것도 올바른 사고를 하는데 큰 장애가 된다.

    게다가 요동에는 한족 출신보다 고려 여진 계통 병사가 많았던 것도 문제였다. 이들은 힘써 전투를 하지 않을 것이며 순순히 투항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공민왕 시절 고려의 원정군이 어렵지 않게 목적을 이룬 것도 이러한 사정과 깊은 관련이 있다. 최영이 원정을 서두른 것은 이를 노린 때문이었다. 

    요동에 고려인 병사가 많았던 것은 15세기 말 조선 관인 최부가 남긴 기록으로도 확인된다. 최부는 조선 성종 18년(1487) 제주도에서 서울로 귀환하다가 풍랑으로 명의 강남에 표류하였다. 이듬해 귀국길에 요동을 지나게 되었다. 5월 24일 그곳에서 조선인 승려 계면(戒勉)이 찾아왔는데 그가 말한 요동 지역의 군사 상황은 이랬다.

    "소승은 본디 조선 사람인데, 소승의 할아버지가 이곳으로 도망 온 지 지금 벌써 3대가 되었습니다. 이 지방은 우리나라(本國)의 경계와 가까운 까닭에 왕래하는 우리나라 사람이 많습니다. 중국인은 겁이 많고 용맹스럽지 못하여 도적(역주 ; 요동을 습격하는 여진족이나 몽고족을 뜻함)을 만나면 모두 창을 던지고 도망해 숨어 버리며, 또 활을 잘 쏘는 사람도 없어 반드시 우리나라 사람으로 귀화한 사람을 뽑아서 정병(精兵)이라 부르며 선봉으로 삼으니, 우리나라 사람 한 명이 중국인 열 명, 백 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 지방은 곧 옛날 우리 고구려의 도읍인데 중국에 빼앗긴지 천여 년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고구려의 옛 풍속이 아직도 없어지지 않아서 고려사(高麗祠)를 세워 근본으로 삼고 공경하게 제사 지내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니 이는 뿌리를 잊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략)"

    명이 요동을 통치한 지 10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이 정도였으니 고려 말의 상황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요동 원정이 전략적 과오라고 쉽게 단정할 일이 아니다. 한국사를 관통하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한족이 한국과 중국 북방의 국가와 연합하는 것을 매우 두려워한 것이다. 이 포인트가 이 책에 부분적으로 서술되었는데 이 점에 좀 더 치중했으면 좋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