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파동의 전개과정 떠올라《4할 사전투표》 실체, 파헤친 주체는?민주당 정권 아니라 5.16 군사혁명정권!
  • ▲ 66년전의 데자뷰. 2030은 왜 매일 잠실을 찾나.  ⓒ 챗GPT
    ▲ 66년전의 데자뷰. 2030은 왜 매일 잠실을 찾나. ⓒ 챗GPT
    ■ 매일 저녁 몰려드는 청소년들

    토요일인 6월 13일 오후 1시부터 4시까지 고등학교 동문 김석우 전 통일원 차관과 함께 잠실 올림픽 핸드볼 경기장에서 9일째 계속되고 있는 6.3 지방선거 선거 부정 항의 시민 시위에 동참하는 시간을 가졌다.

    여름철 무더위 한낮의 현장이라 필자가 동참했던 시간대에는 대부분의 시위 참가자들이 경기장 건물이나 수목 아래의 그늘로 분산되어서 더위를 피하면서 무리 단위의 시위를 계속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동문들이 수풀 속의 그늘에 마련한 자리에 앉아 있기는 했지만, 세 시간 가까이 되자 90 나이의 필자로서는 더 이상 견디기 힘들어 오후 3시반 철수했다.

    철수하면서 보니 올림픽 경기장 지하철역으로부터는 삼삼오오 새로 도착하는 젊은 청소년들의 대열이 꾸역꾸역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저녁 7시쯤에 가면, 참석 인원이 피크에 도달한다고 한다.

    이 광경을 보면서 필자의 상념에는 지금부터 66년 전인 1960년 한국일보 정치부 국회-정당 출입 기자로 취재 보도했던 3.15 정부통령선거로부터 4.19 학생의거와 7,29 총선거를 거쳐서 다음 해 5.16 군사혁명에 이르렀던 일련의 정치 상황 전개 과정에 대한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되살아나는 것을 느낀다.


  • ▲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현장. ⓒ 정상윤 기자
    ▲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현장. ⓒ 정상윤 기자
    ■ 이승만 아니라 이기붕 당선 시키려다…

    3,15 정부통령선거의 대통령선거는 야당인 민주당의 조병옥(趙炳玉) 후보가 2월에 미국에서 병사(病死)했기 때문에 단독 출마한 자유당 이승만(李承晩) 후보의 부전승이 확보되어 있었다.
    태풍의 눈은 자유당 이기붕(李起鵬) 과 민주당 장면(張勉) 후보 사이의 부통령선거전이었다.

    이해 이기붕장면의 대결은 1956년에 이은 두 번째 대결이었다. 
    그런데 두 번째 대결의 결과가 놀라운 것이었다. 

    1956년의 1차전에서의 승자는 4,012,654표를 득표한 장면
    3,805,500표를 얻은 이기붕과의 표차가 불과 207,154표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4년 뒤인 1960년의 재대결의 결과는 이기붕의 역전승이 아니라 두 사람 사이의 엄청난 표차가 경천동지(驚天動地)의 뉴스였다. 
    이때의 표차는 이기붕 8,337,059표 대 장면 1,843,758표로 표차가 무려 6,493,601표였던 것이다.

    4년의 시차를 두고 실시된 재대결에서 이기붕장면 사이의 승패가 역전되는 것은 있을 수 있다 치자. 
    그러나, 불과 4년 전에 20만표의 표차로 고배(苦杯)를 들었던 이기붕이 4년 뒤에 승패를 역전시켰을 뿐 아니라, 이번에는 무려 650만표의 표차로 승리했다는 것을 과연 합리적으로 설명할 방법이 있겠는가?


    ■《4할 사전투표》의 추억

    3.15 정부통령선거의 무리(無理)는 결국 몇 가지 사건의 전개를 통해 실체가 드러났다. 

    선거 당일인 3월 15일, 전통적인 야당 지지 텃밭인 경남 마산에서 투표번호표를 받지 못해 투표를 하지 못한 유권자들이 시청으로 몰려가 항의를 하자, 경찰관이 이들에게 발포하여 십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선거 다다음날인 3월 17일에는 기자회견을 자청한 승자(勝者) 이기붕의 입에서총은 쏘라고 있는 것이지 가지고 놀라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망언이 터져 나왔다.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선 눈에 총류탄이 박힌 고 김주열 군의 시신이 물 밑에서 부상했다.

    이 세 개의 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전국의 대학생은 물론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거리로 뛰어나와 4.19 학생의거가 일어났다. 
    4.19의거는 자유당 정권을 전복시키고 민주당 정권을 탄생시켰다.

    1960년 선거에서의 이기붕장면 사이의 엄청난 표차의 원인도 드디어 밝혀졌다. 
    소위4할 사전투표가 그 범인이었다. 
    자유당의 선거전략을 관장했던 최인규(崔仁圭) 내무장관의 지시로 당시의 선거관리위원회가 전국 유권자의 4할에게 투표번호표를 보내지 않음으로써 그들의 투표권을 박탈하고, 그 대신 4할에 해당하는 투표지에《이기붕》을 기입하여 투표함에 투입한 것이다.

    이것은 당시 유권자들의 투표율이 60% 이내라는 통계수치에 근거하여 40%의 기권을 조작하고 이《기권표》를 이용하여《이기붕》의 몰표 40%를 조작해도 안전할 것이라고 오판 한 것이었다.


    ■ 민주화 외친 민주당 정권이 고작 한 일

    그러나, 3.15 정부통령선거 이후의 정국이 4.19 학생의거와 7.29 총선거를 거쳐, 단명의 민주당 정권 수립으로 이어지는 동안 문제의《4할 사전투표》의 전모는 드러나지 않았다.

    민주당 정권에서 다루어진 선거 부정 시정 실적은 7.29 총선거에《자유당》간판을 메고 출마하여 당선됨으로써 국회에 들어온 7명의 의원을《반민주행위자》로 몰아 국회에서 쫓아낸 것이 고작이었다. 
    이때 제정된 법률이 이른바《반민주행위자 공민권 제한법》이었다.

    《4할 사전투표》 행위가 단죄의 대상이 된 것은 1961년 5.16 군사혁명을 통하여 등장한 군사혁명 정권 때였다. 
    군사정권은《4할 사전투표》의 전모를 밝혀낸 뒤 그 책임을 물어 최인규-이정재 등을 사형에 처했다.


    ■ 이재명 민주당 정권이 뭘 해결할까

    필자는 이번 6.3 지방선거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자행된 것으로 의심되는 선거 부정행위의 일환으로 거론되는 투표용지 부족 물의를 보면서, 1960년 3.15 정부통령선거 때의 부정선거 의혹과 근본적인 차이가 무엇인지 혼란스러운 데자뷰를 실감한다.

    어제 잠실 핸드볼 경기장에서 “부정선거 재선거” “당일투표 수개표” 구호를 연창하는 군중 속에 묻힌 필자의 뇌리에서는, 그동안 국회의 절대 다수 의석을 무기로 1930년대 히틀러 의 나치 독일 탄생 과정을 연상시키는 입법 독재 몰입 민주당 천하에서 과연 선거 부정 문제에 관한 공정한 해결이 가능할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이 솟구치지 않을 수 없었다.

    1960년의 3.15 정부통령선거의 경우는 그로부터 35일 이후인 4월 18일 서울 청계천 4가 천일백화점 앞에서의 정치폭력배들에 의한 고대생 시위대 야습 사건을 거쳐 다음날 4.19 전국 학생 시위로 이어졌다. 
    4월 19일 계엄령 선포에 의거 서울로 투입된 조재미 장군의 15사단은 광화문을 봉쇄하기는 했지만, 시위 학생을 적극 단속하기는커녕 광화문에 배치된 전차들을 시위대들이 사실상 점거하는 것을 용인할 정도로 대처가 느슨했다.

    4.19를 전후하여 이승만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학생 시위 발생 여부를 계속 물었으나, 최인규 (내무)-홍진기 (법무)-김정렬 (국방) 등 국무위원들은 “아무 일도 없다”고 대통령을 기망하는 일을 계속했다는 사실이 당시의 국무회의록에 기록되어 있다.

    결국 4월 23일 “다친 학생들이 병원에 입원했다고 하니 가보자”고 병원행을 강행한 이승만이 병상의 부상 학생들을 보고 어루만지며 “불의를 보고 일어난 학생들이 자랑스럽다. 학생들이 원한다면 나는 물러날 것이고 잘못된 선거는 다시 해야 한다”면서 눈물을 흘리는 사태가 전개되었다.

    그리고는 4월 26일 이승만이 청와대를 떠나 이화장으로 하야하는 드라마가 연출되었다. 
    4월 28일에는 이기붕 일가가 청와대 구내에서 집단 자살을 결행했다. 

    3.15로부터 4.19 학생 시위까지 25일, 
    4.23 교수 데모까지 29일, 
    4.26 이승만 하야까지 32일, 
    4.28 이기붕 일가 자살까지 34일의 시일이 소요되었음을 역사가 기록하고 있다.


  • ▲ 병상의 학생들을 위문하는 이승만 대통령. ⓒ
    ▲ 병상의 학생들을 위문하는 이승만 대통령. ⓒ
    ■ 쉽사리 끝나지 않을 것 

    6.3 지선 이후 열흘이 지난 이 시점에서 올림픽 핸드볼 경기장의 부정선거 시위 현장에서 느낀 생동감이 넘치는 분위기는 이번의 사태가 쉽사리 사그러질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을 준다. 

    더불어민주당의 입법 독재가 여전히 살아 있고, 이에 대해 무기력하게 대처하는 국민의 힘이 연출하는 캐리커쳐를 보며, 필자의 상념 속에서는 1960년 4.19 파동의 전개 과정이 데자뷰되는 것을 금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