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동규는 도성진이 내민 작은 주머니를 조심스레 받았다. 주머니 속에는 백복령이 들어 있었다. 그는 입을 열지 않고 한동안 그것을 바라보았다. 작고 하얀 덩어리, 마치 오래된 은처럼 빛을 머금은 흙의 심장 같았다.

    "이 귀한 백복령은… 어디서 났냐?"

    도성진은 밝게 웃었다.

    "우리 9분조 아저씨들이요… 이거 구하느라 진짜, 얼마나 비굴했는지 몰라요. 팔팔 끓는 물에 타 마시면 피가 맑아진대요."

    아무 말이 없던 김동규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어쩌냐."

    그의 목소리는 떨렸다. 그 속엔 이미 무언가를 보내는 사람의 이별이 준비돼 있었다.

    "나는 약초 과민반응이 있다. 나한텐 이게… 독이다. 조원들이랑 나눠 먹어라. 얼른 가."

    그는 옥수수 3개를 도성진의 주머니에 담아주며 손을 내저었다. 도성진은 더 간절하게 김동규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할아버지. 오늘은 더 길게 말동무 해줄게요."

    김동규는 부드럽게 눈을 내리깔았다.

    "내가 오늘은 좀… 할 일이 있어서."

    그 말에 담긴 고통을 아이가 이해하기엔 너무 아득한 것이었다.

    "조원들에게 고맙다고… 꼭 전해줘."

    "…네, 그럼 갈게요."

    도성진은 꾸벅 인사를 하면서도 허탈했다. 받기만 하고 돌아서는 발걸음이 절름발이 같았다.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향해 김동규는 겨우 손을 들어 흔들었다. 성진이를 보내고 김동규는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문을 닫고 낡은 벽에 몸을 기대었다.

    "내가… 그 백복령만큼만 살아도…"

    그 말은 누구에게 한 것도 아니었다. 살고 싶어 꺼내 보는 말도 아니었다. 오로지 자신의 심장에만 되뇌어야 하는 매일 똑같은 유언이었다. 그 한 줄 유언마저 삶의 연습이었다. 마지막 그날까지. 하루를 한 생처럼. 이날도 한 생처럼이었다. 그의 눈 초점이 달력으로 모아졌다. 달력 속의 매 날짜엔 X가 선명하게 그어져 있었다.

    그 X는 그가 새벽에 눈 뜨면 제일 먼저 손으로 하는 '혁명화'였다. 그건 자신만의 기록이자 저항의 언어였다. 하루라는 시간이 목숨처럼 무거웠어도 그는 밤이 아니라 아침에 그 하루를 지워버렸다. 아직 살아 있을 때 X로 그 하루를 먼저 죽였다. X는 거짓의 회고록을 써야 하는 집필의 시간만 부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부주석으로 살아온 자신과 그 조국, 그 수령, 그 후계자의 역사. 모두를 함께 지워버리는 일필의 부정이었다.

    원고지 위에서 달리던 펜은 그에게 있어 그냥 길고 날카로운 꼬챙이에 불과했다. 진짜로 자기 영혼을 눌러 쓴 글자는 달력에 있었다. 그가 원고지에 수천수만의 글자들로 채워가는 회고록은 가짜였다. 그의 진짜 회고록은 단 한 자. 그 X였다. 그 X로 자기의 과거를 찢고, 거짓을 경멸하고, 세월을 꺾었다. 그 달력이 곧 김동규의 진짜 회고록이었다.

    그렇게 김동규의 'X' 속에서 15호의 시간과 하루, 세월이 흘렀다. 어느새 12월도 끝나가는 15호의 아침이 밝았다. 그 아침은 이상할 정도로 붉었다. 핏덩이처럼 일어나는 해가 수용소의 철조망 위를 물들였다.

    그날은 12월 24일이었다. 요덕에서 보냈던 지난 수개월의 아침들처럼 김동규는 그날도 달력 앞에 서 있었다. 숫자 '24'는 유난히 까맸다. 지옥의 입구처럼 보였다. 그 옆의 하얀 여백들과 다른 숫자들은 차례로 죽어갈 사람들의 대기표 같았다.

    평소처럼, 그 하루를 X로 지으려던 김동규의 손이 멈추었다. 이제 그에게 내일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가 그어오던 X는 올가미처럼 조여오던 내일에 대한 조롱이자 항거였다. 그러나 이제 내일이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12월 25일도, 그에겐 없다. 오늘만큼은, 눈을 뜬 채로 마주해야 할 시간이었다. 오늘만큼은, 정말로 한 생애처럼 살아야 할 하루였다.

    죽기 전 하루. 이 하루의 마지막을 아는 인생으로서 과연 뭘 해야 할까? 죽음의 내일을 아는 자의 오늘은 과연 어떤 24시간이어야 할까?

    김동규는 창문에서 시선을 거두고 책상 위로 돌아섰다. 좀 전에 식당 당번 수용자가 갖다 놓은 아침 식사가 놓여 있었다. 그 옆에 놓인 단 하나의 옥수수. 김동규의 얼굴엔 미소가 번졌다.

    "점심도 저녁도... 나의 오늘은 있다. 옥수수 3개…"

    부주석의 마지막 하루는 길었다. 어둠도 그에 못지않게 길었다. 김동규는 독신자세대 작업대가 들어오는 입구 부근에 서 있었다. 하루 내내 그 자리에 얼어붙은 사람처럼 서서, 다시 한번 시간의 의미를 되묻고 있었다. 뒷짐 진 손에 작은 헝겊 주머니를 들고 있었다. 그 안에는 옥수수 3개가 들어 있었다. 그 주머니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자꾸만 흔들렸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손에서 조바심이 난 것이다. 한 생의 마지막 짐을 들고 있는 노인의 손은 떨렸다. 그러면서도, 최후의 날에 누군가를 이렇게 애타게 기다릴 수 있다니! 시간의 끝자락에 아직 남은 게 있다니! 그는 그런 자신에게 가장 놀라고 있었다.

    마침내, 멀리서 시커먼 작업대의 형체들이 보였다. 김동규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버쩍 들어 흔들었다. 그 속에서 너무도 고마운 얼굴 하나가 자연스럽게, 본능처럼,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도성진이었다.

    순간, 김동규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눈물이었다. 너무 반가워서, 너무 늦어서, 너무 끝에 있어서였다. 숨 대신 오열이 터져 나왔다. 웃으며 달려오는 그 아이의 얼굴에서 비로소 그는 자신의 마지막 시간도 보았다.

    저 어린 것 하나조차 끝내 지켜주지 못했던 부주석으로서의 참회와 반성도 그 얼굴 위에 겹쳐 보였다. 그는 얼른 눈을 닦았다. 다 들킬 것 같았다. 지금만은 강해 보여야 할 것 같았다. 두 팔을 활짝 벌렸다. 더 크게, 더 확실하게, 아직 살아 있는 목소리로 불렀다.

    "성진아!"

    할아버지의 처음 보는 그 격한 반응에 도성진은 평소보다 훨씬 밝은 얼굴로 웃었다. 아이는 몰랐다. 그 품이 오늘이 마지막임을! 그 부름이 더는 소리 나지 않을 것임을! 그래서 옥수수 주머니만 덜렁 내미는 김동규가 살짝 서운했다. 얼른 받고 빨리 가라는 말투와 건네는 주머니, 아니 그 손길 자체를 거부했다. 그게 김동규에게는 마음의 유산이었는데도 말이다.

    그의 삶! 그의 무게! 그의 마지막 하루까지 한 생의 전부였다. 아이의 손에 쥐여주려는 건 옥수수가 아니었다. 남기고 가는 김동규의 마지막 언어였다. 하지만 도성진은 아무것도 모른 채 삐져서 돌아섰다.

    "치. 오늘도 또 가라구요?"

    성진의 목소리는 얇았지만 기대어 온 마음이 가득했다. 그 말에 김동규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내가 오늘은 바쁘다. 이제 여기로 사람들도 올 거야, 얼른 가."

    "그럼... 내일은요? 내일은 긴 시간 약속할 거죠?"

    '내일'이란 그 말에 김동규는 멈칫했다. 그 작은 단어 하나가 마음 한가운데를 후려쳤다. 그의 등이 더 굽은 것처럼 보였다. 두 손은 불안하게 어둠 여기저기를 붙잡았다가 놨다.

    "할아버지, 왜 그래요? 오늘 무슨 일 있어요?"

    도성진은 김동규의 구부정한 아래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 눈은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아는 척하려는 철부지의 눈빛이었다. 김동규는 속으로 탄식했다. 그게 그대로 흘러나왔다.

    "허허…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어쩌지..."

    그리고는 억지로라도 밝게, 예전처럼 말했다.

    "그래, 그러고 보니 오늘이 제일 한가하구나. 우리 저기 앉자."

    두 사람은 어둠의 한구석, 사람들이 잘 보지 못할 곳에 나란히 앉았다. 겨울 공기는 차가워도 그 자리만큼은 두 사람의 온기로 데워지고 있었다. 김동규는 앉자마자 시원하게 웃었다.

    도성진이 아무 생각 없이 "할아버지" 하고 운을 뗐기 때문이었다. 그 웃음은 그의 마지막 하루에 예기치 않게 찾아온 아이의 큰 선물 같았다. 성진이가 그 웃음을 자기에게 일부러 크게 주어서 더 밝게 따라 웃었다.

    "할아버진 무서운 게 없는 사람 같아요. 우리랑 표정이 완전 달라요."

    "그래?"

    그 말에 김동규가 미소를 지었다.

    "성진아. 공포란 말이다…"

    그는 말끝을 길게 끌었다.

    "뒷걸음질 칠수록 달려드는 미친개 같은 거야."

    도성진은 그 말의 비유가 낯설었는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도… 우리를 죽이려면 언제든 죽일 수 있는 보위원 놈들이잖아요."

    김동규의 눈동자엔 죽음도 정면으로 마주 보는 고요한 여유가 있었다.

    "무서움보다 더 무서운 게 공포고, 무서움보다 더 태연한 게 용맹이야."

    "…용맹."

    그 단어는 성진의 입속에서 저절로 굴러 나왔다. 아직은 완전히 닿지 못한 곳, 하지만 언젠가 가닿을 거기서 꺼내 들 비상의 무기처럼 속에 담았다. 그러다 도성진은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아, 진짜. 나 오늘 자랑할 게 있어요."

    "그래. 뭔데?"

    "최종배 보위원 놈이 날 보고 엄청 큰 돌을 들라는 거예요. 내가 못 들면 우리 분조 저녁 굶긴대요."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기어이 살아서 아버지 만나겠다! 이렇게 악쓰며 번쩍 들었어요."

    "하하하 네가 이겼구나!"

    성진은 더 깊은 말을 놓친 것처럼 이번엔 자기 머리까지 쳤다.

    "아 정말. 그리고 우리 분조장이 할아버지 생일 꼭 알아 오라고 했어요."

    그 말에 김동규의 입에서 웃음이 서서히 사라졌다. 자기에게 '생일'이라는 단어도 있었구나 싶었다.

    "그건 나중에…"

    그는 그 말로 스스로를 덮었다. 그건 자신에게는 다시는 오지 않을 과거였다. 김동규는 하염없이 도성진을 바라보았다. 이제 막 누군가를 믿기 시작한 눈, 진실에 닿고 싶어 안간힘을 쓰는 입술, 세상의 말을 듣고자 살짝 열기 시작한 귀, 그 모든 것을 가슴에 담고 가려는 듯 정성스레 뜯어보았다.

    "성진아."

    그가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너한테… 이 할아버지가 부탁 하나 해도 될까?"

    도성진은 눈을 반짝이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뭔데요? 전 할아버지랑 한 약속은 꼭 지킬 수 있어요. 맹세해요."

    김동규는 잠시 허공을 쳐다보았다. 말이 나오기까지 속에서 무언가를 오래 씹고, 삼키고, 다짐했다. 그러고 나서 조심스럽게, 꼭꼭 눌러 담아 꺼냈다.

    "만약에 말이다… 네가 나중에 사회에 나가서, 혹시나… 이 김동규 할아버지 책을 보게 된다면 말이다."

    도성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할아버지 이름이… 김동규예요?"

    김동규는 그 질문에 무겁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 이름을 입 밖으로 내는 일조차 그에겐 한 생을 거슬러 오르는 일이었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혹시나 보게 된다면 말이다. 그 책이 평양에서 쓰인 게 아니라고… 여기, 이 15호에서, 보위원들이 총 들고 있는 이 관리소에서, 억지로, 강제로, 쓰게 된 거라고 기억해 줘."

    말의 무게를 도성진은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저 멀뚱히 김동규를 쳐다보다가 콧등을 찡긋했다.

    "치. 기억이 무슨 부탁이에요. 딴 거요, 할아버지."

    도성진은 더 큰 것을 원하는 눈빛이었다. 김동규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 부탁이… 그 '기억'이다."

    도성진은 말없이 김동규를 바라보았다. 그 눈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의 해맑음이 있었다. 그 투명함을 바라보며 김동규는 소리 없이 작게 웃었다. 그가 성진에게 몰래 넘겨준 자기 개인의 회고록은 종이 위의 글자가 아니었다. 그건 동지들의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써야 했던 거짓의 회고록일 뿐이었다. 그 참회의 마지막 맺음말은 바로 지금! 15호에서 가장 어린 성진에게 '기억'으로 남긴 '부탁'이었다.


    ※ 다음 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