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직 해가 온전히 뜨지 않은 6시였다. 독신자막사 운동장은 여전히 어둠에 잠겨 있었다. 수용자들은 조별로 운동장에 모였다. 9분조도 2열 종대로 어깨를 맞대고 섰다. 점심 주먹밥을 배급받는 시간이었다. 취사 담당 수용자들이 큰 대야를 들고 돌아다녔다. 수용자들은 자기 번호를 외치고 주먹밥을 받았다.

    "2번!" "3번!" "4번!"

    초조하게 순서를 기다리던 도성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옆에서는 주둥이가 가마치를 두고 또 도련님을 달달 볶았다. 하지만 어른들 농담 따위는 성진의 귀에 멀었다. 오로지 눈앞의 주먹밥에만 마음이 갔다. 주먹밥을 손에 쥐자마자 성진은 막사로 달려갔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월왕령은 미꾸라지가 그를 쫓는 걸 눈치챘다. 망설이지 않고 그쪽으로 뛰었다.

    막사 안은 눅눅하고 서늘했다. 도성진은 벽 쪽에 웅크리고 앉아 주먹밥을 꺼냈다. 거칠고 터진 손이었다. 주먹밥을 입에 넣으려고 할 때였다. 삐걱, 문이 열렸다. 미꾸라지가 웃으며 성큼 다가왔다. 흡사 먹잇감을 발견한 하이에나 같았다.

    "야, 그거 내놔. 처맞기 전에."

    도성진은 얼른 주먹밥을 뒤로 감췄다.

    "왜요?"

    미꾸라지는 사냥감을 벽으로 몰았다. 성진은 등으로 벽을 더 깊이 타고 오르며 버텼다. 하지만 발끝이 힘없어 비틀거렸다. 다시 삐걱하는 문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월왕령이 들어왔다.

    "야, 검은손이 너 찾아. 빨리 오래!"

    미꾸라지는 월왕령을 노려봤지만, 검은손 이름에 꼬리를 내렸다. 침을 한 번 퉤 뱉고는 막사를 뛰쳐나갔다. 막사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주먹밥을 입으로 가져가는 성진의 손을 월왕령이 꽉 잡았다.

    "점심은 아침과 달라. 굶으면 하루를 못 버텨."

    "놔요. 내 밥이에요."

    성진은 이를 악물고 월왕령을 밀쳐냈다. 그러나 그들의 다툼은 더 커지지 못했다.

    "야!" 차디찬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문가에 최종배가 서 있었다. 두 사람은 흠칫 동작을 멈췄다. 최종배는 담배를 꺼내 물고 성진에게 라이터를 흔들었다. "가져와."

    성진은 겁에 질린 얼굴로 최종배 앞으로 갔다. 떨리는 손으로 주먹밥을 내밀었다. 최종배는 군화 끝으로 바닥을 탁탁 두드렸다.

    "더럽게. 여기 버리라고!"

    도성진은 울먹이며 주먹밥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최종배의 군화가 여지없이 짓밟았다. 흙과 옥수수밥이 처참히 으깨지고 있었다.

    "팔굽혀펴기 50번."

    성진은 절망에 찬 얼굴로 바닥에 엎드렸다. 팔을 굽힐 때마다 흙 섞인 주먹밥이 안면에 닿았다. 눈물이 고였다. 그때 밖에서 수용자들의 고함이 들려왔다.

    "뺏어 먹으면 어떡해!"

    "담에 내꺼 먹으면 되잖아, 이 개새끼야!"

    최종배는 밖이 더 급했는지 성진의 머리를 군화로 툭 치고 돌아섰다.

    "너 이따 보자."

    문이 꽝 닫혔다. 막사 안에는 숨소리마저 가라앉았다. 성진은 흙바닥에 얼굴을 묻고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손끝으로 남은 밥알이라도 구하려 흙을 모았다. 지켜보던 월왕령은 끝내 고개를 돌렸다. 성진은 일어서 그의 등을 향해 씩씩거리며 외쳤다.

    "아버지랑 같이 살았다며? 여기선 룡평산도 보인다며? 나 같으면 산만 봐도 배부르겠다!"

    그리고는 울컥, 막사를 뛰쳐나갔다. 월왕령은 아프게 입술을 깨물었다. 

    한편, 막사 밖에서는 미꾸라지가 구석진 곳에 처박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주먹밥은 뺏지 못했지만, 대신 담배꽁초 하나를 움켜쥐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미련으로 막사 근처를 서성대다가, 마침 최종배가 버리고 간 꽁초를 주운 것이었다. 미꾸라지는 숨이 넘어갈 듯 담배를 빨아들였다. 그 냄새를 맡고 어디선가 세 명의 수용자가 달려왔다.

    "나 좀... 제발..."

    "저녁에 밥 한 숟가락!"

    나이 많은 수용자가 먼저 제안했다. 미꾸라지는 조롱하듯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허공을 휘감은 연기는 그의 얼굴을 적셨다. 그는 눈을 감고, 그 연기를 깊숙이 들이마셨다. 굶주림보다 더 처절한 표정이었다.

    "나도 한 숟가락!"

    또 다른 대머리 수용자가 다급히 얼굴을 내밀었다. 미꾸라지는 다시 느긋하게 연기를 내뿜었다. 이번에는 대머리까지 휘감았다.

    곁에서 지켜보던 고수머리 수용자가 단호히 말했다.

    "난 저녁밥 절반!"

    그 말에 미꾸라지는 선뜻 꽁초를 내밀었다. 고수머리는 두 손으로 꽁초를 받아 들고, 뜨거운 불똥을 참으며 필사적으로 빨아들였다.

    "어이, 뜨겁다... 저 미꾸라지…"

    15호에선 연기 냄새도 한 숟가락의 식사가 됐다. 남이 뱉은 꽁초를 밥 절반과 맞바꾸며 하루를 견디는 자들도 있었다. 담배 연기가 희망이 되고 절망이 되었다. 그런 곳에서 사람의 목숨값은 얼마나 가벼울까?

    정치부장은 조용히 단독막사를 향하고 있었다. 손에 쥔 벽걸이 달력 하나, 종이보다 무거운 기억 하나가 걸음을 따라 천천히 흔들렸다. 그 발밑에서는 자꾸만 소장의 말들이 되살아났다.

    "과로사." "현장에서 처형." "내년 2월 15일."...

    김동규. 그 이름은 정치부장에게 지금껏 단 한 번도 '반동'이라는 말과 짝지어진 적 없었다. 그는 젊은 시절 김일성고급당학교의 군사간부 양성반 실습생이었다. 당국제부에서의 실습 3개월, 거기서 매일같이 김동규 부주석을 보았다.

    부주석은 외교를 '국책의 축'이라 강조했다. 누구보다 부지런히 발로 뛴 혁명의 실무자였다. 복도에서 마주치면 실습생에게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밤을 새운 아침이면 일부러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넸다.

    그와 인연의 마지막은 병실이었다. 실습 마감을 열흘 앞두고 급성간염으로 입원한 정치부장에게 김동규는 보약을 보내왔다. 쪽지 한 장 없었는데 정치부장에게는 '혁명의 어른'이라는 이름으로 오래 남았다. 그리고 오늘, 그 혁명의 어른과 정치부장은 죄인과 보위원으로 다시 만나게 됐다.

    룡평에서 막 이감 온 날, 김동규의 첫 마디는 의외였다.

    "간은 괜찮소?"

    그 한마디에 정치부장은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었다. 시간도 지워내지 못한 그의 또렷한 기억 앞에서 자기 어깨의 별이 너무 가볍게 느껴졌다. 개별담화가 끝난 뒤 김동규가 조용히 부탁했었다.

    "달력 하나만... 갖다 줄 수 있겠소? 내 죽는 날이나 세어보게."

    그날 정치부장은 단호하게 잘랐다.

    "죄송합니다. 여기 공급물자 외 사회 물품은 일체 못들이게 돼 있습니다."

    소장 방에서 돌아온 정치부장은 자꾸만 달력에 눈이 갔다. 그래서 그날 처음으로 자기의 충성심이라고 믿었던 원칙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조심스럽게 정치부장이 노크하고 김동규의 방에 들어서자 방주인이 천천히 안경을 벗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앉아 있는 자체만으로도 방 안 공기를 짓눌렀다. 백발은 세월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지만, 그 눈빛만은 여전히 형형했다.

    이마에 깊게 팬 주름은 말 한마디 없이도 그가 지나온 역정과 고통을 증언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인상 깊은 것은 눈빛 속에 깃든 고요한 분노였다. 동시에 이미 모든 것을 초월한 듯한 침착함과 세상의 모든 굴욕과 고통을 알고 있으면서도 꺾이지 않는 마지막 자존심만으로 지탱하는 품위가 성성했다.

    71세의 원로 앞에 선 40대의 정치부장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잔주름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대좌의 얼굴은 규율과 복종을 완벽하게 체화한 듯 단단했다. 그러나 까만 눈동자 깊은 곳에 오래전에 잃어버린 무언가를 더듬는 쓸쓸한 그림자가 비치고 있었다. 모자를 벗을 때 살짝 느려지는 손짓은 원칙에 묶여 살아왔지만 결국 기계가 되지 못한 어설픔이었다.

    책상 옆에 선 그의 그림자가 전등불에 길게 드리워졌다. 정치부장은 말없이 달력을 펴서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김동규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제 혼자 결심으로 가져온 게 아닙니다. 회고록 집필에 꼭 필요하다고 상급기관에 전화로 동의를 구했습니다."

    정치부장은 거짓말을 했다. 김동규는 그의 말보다 눈을 더 믿었다. 달력을 넘기던 그는 툭 내뱉듯 말했다.

    "좋구만. 내년 2월 15일이 없으니 보기가 한결 편하구먼."

    정치부장의 등으로 땀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왜 그 날짜를 언급하십니까?"

    김동규는 태연하게 웃었다.

    "내 룡평 경력이 얼만데. 그만한 눈치 없겠소? 여기 오는 날, 평양에서 온 조직지도부 양반들이 그러더군. 회고록은 2월 15일을 절대 넘겨서는 안 된다고. 그럼, 내 죽는 날도 그날이 아니겠소? 하하하."

    김동규는 소리 내어 웃었다. 정치부장도 애써 따라 미소를 지었다.

    "집필이 끝나면, 가족들 곁으로 가시게 될 겁니다."

    정치부장의 그 말을 지우는 것처럼 김동규는 무심히 달력을 넘겼다.

    "볼 것, 못 볼 것 다 겪으며 올라갔던 자리가 국가 부주석이오. 괜한 위로는 마오."

    그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김동규가 룡평에서 죽은 게 아니다. 혁명화 기회도 줬는데... 계승도, 심지어 탄생일도 반역했던 놈이다. 그게 2월 15일의 목적이겠지."

    부주석은 흥분한 자기 목소리를 들었는지 잠시 말을 끊었다. 이어 천천히 시선을 돌려 정치부장의 눈을 마주 보았다.

    "저들의 그 회고록을 쓰려고 날 여기로 내보낸 걸 아오..."

    "억측입니다. 집필을 편히 하시라고 이 단독막사도..."

    정치부장은 그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이 현장에서 처형할 걸 뻔히 아는 사람의 입장에서 다음 말은 양심이기 때문이었다. 김동규는 미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말을 타 봤소?"

    "못 타봤습니다."

    정치부장은 모자를 벗었다. 김동규는 창가로 다가가 먼 곳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말을 타면 말이오. 뛰는 건 말인데, 내가 숨차게 달리는 것 같소. 그러다 말에서 내리면 걸어가는데도 멈춰 선 느낌이 들지. 권력의 말이란 그런 거요. 그 등에 오래 올라탈수록 자기 원래 걸음을 잊게 되오."

    "제가 여기 정치부장이라는 걸 잊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치부장이 일어설 채비로 모자를 매만졌다. 김동규는 짧게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일 이야기나 하기요. 나는 회고록을 내년 2월 15일이 아니라 올해 12월 24일까지 끝내겠소."

    정치부장은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들었다.

    "왜 앞당기시려는 겁니까."

    "내 마지막 날인데 내가 선택해야지. 왜 남이 정한 날에 죽겠소?"

    "마지막이라 생각하신다면... 한 달 반도 인생 아닙니까? 섣불리...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마지막이라서 더 간절하오."

    김동규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걸 아는 것도 또 다른 시작이오. 왜 굳이 그날인가 궁금하면 나중에, 정치부장이 알고 싶다면 꼭 말해주겠소."

    정치부장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12월 24일이면… 그날 아닙니까."

    그가 말한 '그날'이란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의 생일이었다. 북한은 김정일의 후계 체제를 완성한 뒤 김정숙의 생일을 국가 명절로 지정했다. 김동규는 그 모든 것이 우습다는 듯 쓴웃음을 지으며 받아넘겼다.

    "그렇게라도 의미를 부여해서 허락받아 주오. 내가 더 살겠다는 것도 아니지 않소."

    그의 눈빛은 더는 무언가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이미 다 지나간 것들을 하나씩 지우고 있는 사람의 것이었다.


    ※ 다음 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