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모르는 장교 육성한다니··· 믿을 수 없는 만행 6.25, 잊고 싶으면 잊어도 되는 과거사 아니다.
  • ▲ 건군 75주년 기념행사에서 시가행진하는 사관생도들. 문재인은 사관학교에서 6.25 전사를 가르치는 것을 금지했다. 무슨 꿍꿍이로 그런 결정을 했을까. ⓒ연합뉴스
    ▲ 건군 75주년 기념행사에서 시가행진하는 사관생도들. 문재인은 사관학교에서 6.25 전사를 가르치는 것을 금지했다. 무슨 꿍꿍이로 그런 결정을 했을까. ⓒ연합뉴스
    <서지문의 이삭줍기 : 육사가 안 가르치는 6.25 전쟁사?>

    좌파정부 하에서의 이변은 이젠 놀랍지도 않지만, 육사의 커리큘럼에서 6.25를 뺐다니 정말 믿을 수 없는 만행이다.
    세계사에는 수 천 년간 6대주에서 무수한 전쟁이 일어났고 (어느 사학자의 계산으로는 1년에 한 번 꼴이었다고 한다) 그 중에 어느 하나 공식에 따라 전개된 전쟁이 없었을 터이니 단순히 전략 학습을 위한 자료는 6·25 말고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운명과 사회구조, 한국인의 심성을 결정한 6.25를 대한민국 육사에서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 육사 존재의 이유는 무엇인가?

    6.25는 당사국 남북한과 유엔군으로 참전한 16개국, 한국에 인도적 지원을 한 중립국들과 연인원 240만을 투입한 중공, 항공기와 전투기, 조종사 및 물자와 의료서비스를 제공한 소련, 모두 20개국 이상이 참전한 최다참전국 전쟁이었다.
    남북한 합쳐서 국민의 1/5이 사망·부상·실종·피랍·포로가 되었고 유엔군 사상·실종자 54만, 그리고 중공군은 100만 가까이가 전사·질병감염으로 사망 하거나 실종·부상을 당했다 한다.

    이 참혹한 전쟁의 △ 직간접적 원인 △ 부침이 극심했던 전세 △ 후방 국민의 고난 △ 국토의 초토화, 이 모든 것의 파장을 모르고 우리나라와 국민을 이해할 수 있는가?
    더구나 우리나라를 같은 침략자로부터 지킬 인재를 길러내야 할 육사에서 6.25를 학습하지 않는다면 육사의 존재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이 파란만장했고 비장했던 6.25를 발단부터 종결까지 학습하지 않은 장교·장군이 우리 군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고 지휘·통솔할 수 있겠는가?
    6.25를 모르는 사관과 병졸들에게 애국심과 나라를 지킬 결의와 사기를 고취할 수 있다는 말인가?

    6.25가 종결된지 70년이지만, 6.25는 잊고 싶으면 잊어도 되는 과거사가 아니다.

    ■ 생후 2살 대한민국 덮친 6.25 안 가르치고··· 

    2차대전 종전 후에 대한민국의 전략적 가치를 낮게 평가하던 미국이 1950년 초에 <애치슨 라인>을 선포한다.
    미국의 극동방위선이 오키나와와 필리핀을 연결한 선이며, 대한민국은 그 방위선 밖에 있다는 선언이다.
    적화통일을 꿈꾸던 김일성에게 얼마나 황홀한 복음이었겠는가!
    스탈린도 솔깃해서 김일성의 남진통일 계획을 재가한다.

    1950년 6월, 대한민국 건국 2년도 안된, 군인들도 농번기에는 되도록 휴가를 주어서 농사일을 돕도록 하던 시절, 많은 군인이 휴가를 얻어 병영을 비운 초여름의 일요일 아침에 터진 38선!
    아직 나라의 조직이 매우 허술했고 정보도 부실했던 대한민국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소련의 격려와 군비지원을 받고 쳐내려오는 북한군을 패퇴시킬 도리는 없었다.

    불과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당하기까지 혼비백산한 정부의 무대책과 졸렬한 홍보전과 갈팡질팡 응전.
    국군이 허둥거리는 사이에 북한군이 한강에 이르니 다급한 군대는 한강인도교를 폭파했고, 그로 인해 남부여대하고 아이들을 업고 안고 손잡은 피난민은 남쪽을 향해 끝없이 걷을 수밖에 없었다.
    그 피난길에서 무수한 고아·이산가족이 생겨난다.
    미처 피난을 못하고 서울에 갇힌 아들·가장들은 들키기만 하면 인민군에 끌려가기에, 다락방이나 지하실에 숨어서 기나 긴 여름을 공포에 떨었다.
    삼부 요인이나 유명 인사들은 색출되는 대로 납북되었다.

    1948년 월북해서 북한의 부수상이 된 남로당 수괴 박헌영은 김일성에게 남한으로 진격만 하면 남한 각지에서 호응하는 공산혁명이 일어나서 단시일에 적화통일이 된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남한은 토지개혁으로 농민이 자기 땅을 경작하게 되어서 토지는 국유이고 농민은 경작권만을 가지는 북한식 토지개혁에 냉담해서 허언이 되고 말았다.
    박헌영은 종전 후에 잔인한 처형을 당한다.

    ■ 대한민국 살린 다부동 전투와 인천상륙작전도 모르게 하고··· 

    전쟁 초기 절대적 열세였던 국군은 무참히 낙동강 중류까지 밀렸으나, 대한민국이 낙동강에 수장될 위기에 국군이 경북 칠곡에서 태세를 가다듬고 미군과 연합해서 8월 한 달간 지속되었던 결사적 전투 끝에 적의 남하를 낙동강에서 저지하는데 성공한다.
    국군 15,000, 인민군 30,000 병력이 한 달간 행한 필사의 전투에서 사상자가 국군 10,000명, 인민군 24,000명이었다.
    조지훈 시인은 전투가 그친 후, 시체들이 간 고등어 냄새로 썩고 있는 다부동에서 탄식했다.

    “조그만 마을 하나를 / 자유의 국토 안에 살리기 위해서는 / 한해살이 푸나무도 온전히 / 제 목숨을 다 마치지 못했거니 / 사람들아 묻지를 말아라 / 이 황폐한 풍경이 / 무엇 때문의 희생인가를···” 
    <다부원에서>

    그리고 세계 전사에서 기적으로 꼽히는 맥아더 원수의 9월 15일 기습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그 기세를 몰아 13일만에 서울을 탈환하고서 내쳐 백두산까지 쳐 올라가서 민족의 염원인 통일을 달성하고 북한 동포를 해방시키는 줄 알았지만, 10월 19일 26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다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 장진호 전투와 흥남철수작전도 배우지 않도록··· 

    세계전사에서 가장 혹독했던 추위.
    의료용 혈장도 얼고, 음식도 얼고, 눈물도 혈관 속 피도 어는 듯 했던 장진호의 섭씨 영하 36도의 혹한 속에서 17일간의 사투.
    낮에는 계곡에 꽁꽁 숨었다가 밤에 소리 없이 내려오는 중공군을 맞아 싸웠던 미군과 유엔군.
    동사자는 물론 보급이 원활치 못해 아사자까지 나왔다 한다.
    그 참혹함은 그 전투에서 살아남은 여러 병사가 소설로, 회고록으로 남겼다.

    가까스로 장진호를 빠져나온 병사들은 철수를 위해 흥남으로 행진한다.
    철수하는 미군을 실어 나르기 위해 흥남에 입항했던 5척의 <빅토리호> 등은 자유를 찾아 북한을 탈출하려는 끝없는 피난민 행렬을 버리고 갈 수 없어서 무기와 군수물자를 내려놓고 피난민을 태운다.
    그 중 <메레디스 빅토리호>는 무기수송선으로 사람은 정원이 60명이었으나, 무기를 모두 내려놓고 1만 4천 5백명의 피난민을 싣는다.
    흥남에 왔던 미군 선박이 태운 총 피난민 수는 10만.
    이들을 싣고 거제로 가는 30여시간 항로에서 태어난 영아가 무려 6명이었다.

    중공군의 서울 입성으로 1951년 1월 4일 다시 끝없는 피난민의 행렬이 남으로 향하고 부산의 인구는 전쟁 전 40만에서 100만으로 불어난다.
    맨 손으로 몸만 피한 대부분의 피난민은 생존을 위해서 마다하는 노동이 없었다.
    시인 유치환은 이들의 정황을 이렇게 읊었다.

    “차거이 빛나는 동지(冬至)의 창망한 바닷물이 다달은 거리 / 그 거리의 한복판 대로 위에 / 쓰레기같이 엉겨든 사람의 이 구름을 보라 / 저마다 손에 손에 / 일찌기 제가 아끼고 간직하고 입고 쓰던 세간이며 옷이며 신발이며 / 능히 돈으로 바꿀 수 있는 게라면 여편네의 속속것도 / 자랑도 염치도 애착도 깡그리 들고 나와 파나니···”
    <유망>

    서울은 2달 만에 재 수복이 되었으나 피난민들은 즉각 환도하지 않고 전세를 지켜본다.
    그래서 천막교사에서 수업하던 서울의 대부분 학교들이 임시교사를 짓고 버티다가 1953년 부터 환도한다.

    ■ 중부전선 고지전과 휴전과정도 무시하고··· 

    휴전협상은 1951년 7월에 시작되었으나 북한과 소련의 심술로 진전이 되지 않았고, 대한민국은 북진통일을 목표하고 있어서 휴전협상을 거부했다.
    그래서 전투는 현재의 휴전선 부근에서 밀고 밀리는 양상으로 지속되었다.
    대부분 험한 산지였기 때문에 희생이 어마어마했다.
    수많은 목숨을 바쳐도 수복할 수 있는 땅은 몇 뼘에 지나지 않았지만, 피아가 모두 한 뼘의 땅이라도 더 고국에 편입시키기 위해서 목숨을 던졌다.
    시인 문상명은 이렇게 목놓아 울었다.

     “오오, 하늘도 주저앉을 / 밤과 낮 / 미칠듯한 화광 초연이 / 폭풍을 불러온 단풍의 백마고지 / 여기 신의 예언도 없이 / 처절한 공방전 삼십여회 / 순간을 꼬리 물고 / 청춘은 부서진다 / 피아가 발사한 포탄 사십만발 / 단말마의 입김이 / 천고의 신비를 마시고 / 초목이 쓰러지듯 쓰러진 생령 / 아— 봉우리에서 터져버린 / 피의 홍수여!”
    <백마고지>

    전투 중 국군과 유엔군이 포획한 인민군과 중공군 포로들은 주로 거제도에 수용되었는데 반공 성향의 포로와 친공 성향의 포로들이 반목해서(인민군 속에는 강제로 끌려 간 남한시민도 많았고 중공군 가운데는 과거 국민당 정부군이 다수여서 이념이 다양했다) 분위기가 살벌한 가운데 유혈사태도 자주 벌어졌다.
    수용소장인 미군 준장이 포로들에게 납치되는 일까지 발생했다.

    그리고 마침내 (동수의) 포로교환 합의가 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포로석방>이라는 기습조치로 세계를 놀라게 한다.
    포로들은 원대복귀 시킨다는 국제협약 위반이었으나, 자유대한민국 시민이 되고픈 포로가 많았기에 인도적인 조치이기도 했다.

    북한 송환을 희망한 북한군 포로 3만 여명은 북한으로 송환되었다.
    인민군, 중공군에 포획된 한국군 포로는 8만 2천명으로 추산되는데, 북한은 이 중 8천여명만 송환했고 6만 여명의 국군포로가 북한에 억류되어 탄광과 수용소에서 강제노역으로 뼈를 깎는 고생을 하다 괴로운 생을 마쳤다.
    그들의 후손들도 북한에서 대대로 가혹한 노역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 6.25와 한미상호방위조약 상관관계 학습도 빼먹은채 장교로 임관하라고?

    미국에 나라의 생존을 의존하면서도 독단적인 행동으로 미국의 심기를 매우 거슬린 이승만 대통령을 미국은 축출할 궁리도 했었다하나,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어서 달래고 한국과 한국민의 생존을 위해 막대한 원조를 쏟아 부었다.

    이 밖에도
    △ 각 참전국이 전과(戰果)를 자랑하는 전투
    △ 터키군의 고아원 설립 같은 인도주의적 활동
    △ 이산가족의 기막힌 사연들
    △ 인민군 점령 하에서 일어난 민간인 수난
    △ 종전 후에도 계속된 좌익 빨치산의 활동과 긴 소멸과정
    △ 소박한 농민의 가슴을 멍들인 좌-우익의 편가르기, 그리고
    △ 남편이 납북되고 남겨진 가정의 곤경이 촉구한 여성의 사회진출 등등
    6·25로 촉발된 무수한 여진이 아직 소진되지 않고 있다.

    내 나라의 수난사와 내 민족의 시련을 알게되면, 나라에 대한 애착과 충성심이 싹트고 자라게 된다.
    정일성의 군가가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6·25 당시 국군 군가의 가사를 한 편 음미해본다.

    동이 트는 새벽꿈에 고향을 본 후
    외투입고 투구 쓰면 맘이 새로워
    거뜬히 총을 메고 나서는 아침
    눈 들어 눈을 들어 앞을 보면서
    물도 맑고 산도 고운 이 강산 위에
    서광을 비추고자 강행군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