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중국 국민당 정부를 세운 장제스(장개석).
    ▲ 중국 국민당 정부를 세운 장제스(장개석).
    윤봉길 의거후 드디어 중국 장제스(蔣介石, 장개석, 1987~1975) 정부가 김구의 임시정부에 높은 관심을 보였다. 김구를 만나자는 요청이 들어와 “피신하는 몸이라 곤란”하다고 하자 “비행기라도 보낸다”고까지 했다고 [백범일지]에 김구가 적었다. 
    임정 출범 14년 만에 상하이를 떠나 황포강 여자 뱃사공 주애보(朱愛寶)와 동거, 중국인 행세로 은신생활하던 김구가 장제스를 처음 만난 것은 1932년 홍구공원 거사 6개월 뒤 10월초쯤이다.
    중국말을 모르는 김구는 진작부터 하고 싶었던 말을 붓으로 썼다. 
    “선생께서 100만원 돈을 허락하시면 2년 이내에 일본, 조선, 만주 세 방면에서 대폭동을 일으켜 대륙침략을 위한 일본의 교량들을 파괴하겠습니다.”
    장제스는 계획서를 작성해 오라고 말했다. 계획서를 보내자 중국국민당 실세 진과부(陳果夫)가 대신 김구에게 장제스의 결정사항을 알려주었다. 5개항의 지원방침중 핵심은 「김구에게 경상비로 매달 5,000원을 지급한다」 였다. 당시 중국환율은 2대1정도, 한해 3만달러 거액이다.

    이렇게 시작된 김구의 임시정부에 대한 장제스의 지원은 중일전쟁이 터지자 급증하게 된다.
    충칭(重慶)으로 천도한 중국정부를 따라가는 임정인사들과 그 가족 400여명은 중국 정부 지원금이 아니면 살길이 없다.

    또한 ‘폭탄의거’의 효과를 본 김구가 평소의 꿈 ‘대일 군사작전’을 목표로 ‘광복군’을 양성하려고 장제스의 본격적인 뒷받침을 요구하며 매달린다. 
    이 과정에서 일찍부터 공산당을 싫어했던 김구는 급기야 의열단의 김원봉(金元鳳)과 ‘합작’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장제스가 내세운 지원 조건이었으므로 이에 순응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 ▲ 조선의용대 만든 김원봉(자료사진)
    ▲ 조선의용대 만든 김원봉(자료사진)
    ◆김원봉의 민족혁명당, 임시정부 해체 주장

    김구보다 먼저 장제스 정부의 공식적인 지원을 받은 사람은 김원봉이다. 
    1919년 길림(吉林)에서 ’폭렬(暴熱)투쟁‘조직 의열단(義熱團)을 결성한 김원봉은 1926년 장개석이 교장이던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4기생으로 들어갔다. 황포군관학교는 제1차 국공합작(國共合作)에 따라 공산당원도 받았다. 이 학교는 정치부주임이 주은래(周恩來)였으므로 공산주의 교육이 철저히 이루어졌고 “황포 출신의 절반은 빨갱이”란 정평이 나있었다.

    거기서 김원봉이 만난 동기생 중에 등걸(滕傑)은 장제스의 측근 실세였다. 
    김원봉은 재빨리 한중연합 항일작전을 주장하며 등걸의 도움을 받아 의열단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였고 장제스의 승인은 얻는다. 중국 군사위원회가 이를 삼민주의역행사(三民主義力行社)에 맡겨 월3000원을 김원봉에게 제공하는데, 삼민주의역행사가 비밀조직 ’남의사‘(藍衣社)이며 등걸은 그 서기였던 것이다. 그는 곧 김구를 지원하는 실무도 맡는다.

    김원봉과 조선공산당 재건동맹=1920년대 말기 상하이에서 조선공산당 주역 조봉암(曺奉岩, 1898~1959)이 중국공산당원으로 할약하던 무렵, 김원봉은 조선공산당 책임비서였던 공산주의 이론가 안광천(安光泉)을 만난다. 이 만남이 아나키스트 성향이 강한 김원봉의 머리에 또 한겹의 이념무장을 시킨다. 
    베이징으로 본거지를 옮긴 두 사람은 의열단의 새로운 투쟁노선으로 1929년 10월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결성한다. 1925년 4월17일 박헌영, 김단야, 조봉암 등이 서울 중국음식점 아서원(雅敍園)에서 비밀리에 전격 결성한 조선공산당은 일본 총독부의 압박에 1928년 1차 해체되어 뿔뿌리 흩어졌다.
    재건동맹은 위원장에 안광천, 김원봉과 아내 박차정 등 7인위원회가 중앙부이며, 만주 지역과 국내지부로 목포 부산 강릉 대구 평양 신의주 원산 경성 등에 지하조직을 만들었다. 
    기관지로 [레닌주의]를 발간하고 베이징에 ’레닌주의 정치학교‘를 개설 운영하였다. 
    윤봉길 의거후 검거선풍을 피해 남경(南京)으로 옮긴 김원봉은 6년 남짓 머무는 동안 ’조선혁명군사정치학교‘도 운영하였다. (김삼웅 [약산 김원봉 평전] 시대의창,2008)

    ★김원봉-김두봉 “임시정부를 취소하자”==중일전쟁이 확대되면서 독립운동가들은 대일전선의 통합을 부르짖는다. 여기서도 김원봉은 코민테른의 1923년 국민대표회의 통일전선처럼  ’대일전선통일동맹‘을 만들고, 통합정당 창립 작업을 서두른다. 
    이때 김원봉과 김두봉(金枓奉1889~1960)은 “이 참에 임시정부를 없애자”는 운동을 벌인다. 김두봉은 “5당 통합당 만드는 차제에 명패만 남은 임시정부는 존재할 가치가 사라졌으니 취소해 버리자”고 극렬한 주장을 펼쳤다. 
    사표 사태등 우여곡절 끝에 1935년 7월5일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을 결성하였다. 
    서기장은 의열단장 김원봉, 김두봉은 조직부장, 이청천은 군사부장, 김규식은 해외동포담당 국민부장, 조소앙과 신익희는 국민부원으로 선정되었다. 당명은 ’조선‘을 뺀 약칭 ’민족혁명당‘으로 정했다. ’한국‘을 주장하는 민족세력 때문이다. 

    1938년 10월10일엔 김원봉이 한구(漢口)에서 ’조선의용대‘를 창설한다. 총대장 김원봉, 민족혁명당원과 조선청년전위동맹의 청년들로 구성된 100여명의 대원은 금방 300명이 넘는다. 의용대는 중국 국민당 군사위로부터 운영비를 받았다. 

  • ◆미주 동포들 "공산당과 합작하면 인연 끊겠다" 반대

    김구가 충칭에 도착한 것은 1938년 10월26일, 중일전쟁 포화에 쫓겨 대륙을 5000㎞나 헤맨 대가족의 피란길, 지치고 지친 사람들은 ’만리장정‘이라 불렀다. 
    이제 김구는 얼마간의 재력을 겸비한 민족세력의 거두, 새로 정착한 충칭에서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운동을 새롭게 추진하고 나섰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중국정부의 발동’에 따른 것으로, 장제스가 직접 강력히 요청한 때문이라 했다. (김구가 송헌주에게 보낸 편지). 
    김구가 도착한지 한달쯤 뒤 장제스가 김구를 불렀다. 김원봉과의 대동단결을 종용하고, 계림(鷄林)에 체류 중인 김원봉에게 전보를 쳐서 충칭으로 오라고 전했다.

    김구가 먼저 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의 본부가 있는 아궁보(鵝宮堡) 손가화원(孫家花園)을 찾아갔다. 김원봉은 없었다. 김두봉과 김성숙등 간부들이 김구의 환영회를 열어주었다.
    김구는 ”지금은 주의(主義)를 논할 때가 아니며, 광복한 뒤에 각각의 주의대로 결합하기로 하고, 각단체를 합동 통일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참석자들은 대찬성하였다.

    ★김구는 중국내 다른 민족세력 단체와 재미동포 단체들에게도 같은 취지로 지지를 호소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유보하라“ ”절대 반대“라는 회답이 왔다.
    「통일 취지는 찬성하나 김약산(김원봉)은 공산주의자요. 선생이 공산당과 합작하는 날, 우리 미국 교포와는 인연이 끊어지는 줄 알고 하시오」 이런 답신과 함께 대한인국민회는 강경한 성명까지 발표했다.
    ”우리 국민회는 공산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와 조직을 같이할 수 없다. 만일 그들이 30년 이래 고통을 느끼던 분열을 뉘우쳐 깨닫고 합작한다면 우리는 민족적 공의상 경의를 표할뿐...“(김구 [백범일지])
    이같은 재미동포사회의 경고성 반대에 더하여 김구 자신의 정당 한국국민당의 측근 조완구-엄항섭도 ”주의가 다른 단체와 단일당 조직은 불가능하다“며 ‘연합’정도로 하자고 반대하였다. 한국국민당은 그 이름에서 보듯이 김구가 장제스의 국민당을 본떠 만든 당이다.

  • ▲ 임시정부 김구와 민족혁명당 김원봉.(자료사진)
    ▲ 임시정부 김구와 민족혁명당 김원봉.(자료사진)
    충칭(重慶)의 오월동주(吳越同舟)--김구와 김원봉의 합작 선언

    김구는 그러나 다른 선택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좌우합당은 ‘장제스의 명령’ 아닌가.
    마침내 김구와 김원봉은 충칭의 홍빈여관에 방을 잡고 날마다 만나 ‘통일’문제에 대하여 협의한 결과, 두 사람 공동명의로 ‘동지 동포에게 보내는 공개신(公開信)’을 발표한다.
    ”우리 양인은 금후 신성한 조선민족해방의 대업을 위하야 동심 협력할 것을 고백하는 동시에.....중일전쟁 발발 이후 한중(韓中) 연대를 통한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야 일체의 독립운동단체를 해체하고 공동의 혁명적 정강아래 재편할 것을 제창한다.“
    그리고 10개항의 정치강령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일본제국주의 통치 전복 *봉건세력 및 일체의 반혁명세력 숙청 *국내 일본재산 및 친일파 재산 몰수 *대기업 국유화 *토지 매매 금지 *부녀의 평등 *언론 집회 신앙의 자유 등등. 기본적으로 ‘공개신’은 정치이념부터 임정에 대한 평가까지 김구가 김원봉의 주의주장을 대폭 수용한 것으로서, 장제스의 명령같은 종용에 순응한 ‘좌우합작 선언’이었던 것이다.

  • ★이승만, ”중국인도 한인들도 세계대세에 무지몽매“

    김구는 김원봉과의 공동선언 발표 한 달쯤 지난뒤, 하와이 동지회에 편지를 보냈다.
    그는 이승만의 비폭력주의와 기미독립선언서의 공약삼장을 현시대에 안 맞는 것이라고 비난, ”제일 좋은 것은 해외 각 단체가 통일된 기관명의로 군사운동을 전력 선전하는 일이 급선무“라고 강조하였다.
    요컨대, 효과 없는 비폭력주의를 버리고 자신이 행한 이봉창-윤봉길의 폭력의거처럼 ”세인이 눈을 뜨고 주시할 만한 무력행동을 개시하여 이를 선전하는 것이 이승만이 해야 할 선전임무“라고 주장하였다.

    이승만은 낙담한 나머지 두 달을 미루다가 다음과 같은 답신을 김구에서 보낸다. 
    ”한인과 중국인은 세계대세에 대하여 어찌 이리 몽매합니까?
    (1)선전만 논하더라도 일본인은 그동안 1년에 100만달러를 쓰고 중일전쟁 이래로 350만달러 이상을 소비하야 미국인들의 동정을 사고 물자를 얻어 가는데, 중국은 선전은 안하고 물자만 얻으려하니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중국이 아무리 혈전분투할지라도 이대로 가면 제2의 조선을 면키 어려울 것이오.
    (2)외교선전보다 용전이 우선이니 군수물자를 얻어보내라는 것은 이곳 형편을 전혀 모르시는 것입니다. 선전으로 우리 일을 알려주어야 도움을 얻지, 도무지 한인들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데 무슨 도음을 받겠습니까.
    (3)폭력으로만 주장해야 된다 하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하겠습니다.
    폐일언하고, 워싱턴과 뉴욕에서 군기창에 군수물자라도 좀 얻으려 해보았으나, 한인들의 어떤 가능성을 알아야 주겠다니 원동에서 선전할만한 사실이 있거든 적어 보내시오. 이곳에서 선전한다는 것이 한두 개인의 소관인줄로 아실 것이 아니외다.“ (이승만이 김구에게 보낸 편지,1939년 8월30일자 [아승만 동문 서한집] 연세대출판부, 2009)
    김구가 무력항쟁을 한다 해도 외교와 선전이 선행되어야 물심양면의 국제적 지원을 얻을 수 있다는 이승만의 지론이었다.

  • ▲ 충칭 호텔에서 열린 광복군 사령부 설립 전례식. 임시정부 사람들과 광복군 간부들.(자료사진)
    ▲ 충칭 호텔에서 열린 광복군 사령부 설립 전례식. 임시정부 사람들과 광복군 간부들.(자료사진)
    ◆광복군 설치...김원봉 반대...군대만들 청년들도 없다

    김구와 김원봉이 공동선언을 발표한 뒤에도 구체적인 움직임이 없자 중국 정부가 나섰다. 장제스(장개석)는 최측근 주가화(朱家驊)에게 한인독립단체의 통합작업을 강행하라는 지침을 주었다. 예상대로 7개 단체는 모이자마자 ”주의가 다르다“며 싸웠고 공산계열은 퇴장하였다.
    중국 실무자는 통합이 실패하자 이렇게 한숨을 쉰다. 
    ”한국인은 단결심이 없고 중심사상이 없어 외래사상(공산주의)에 쉽게 빠졌다. 구심점 역할을 해낼 지도자도 없다. 김구는 투지는 있으나 지도자의 지략이 없다“
    임정 원로들은 김구가 동의도 없이 중국 국민당에 추종하는 데 불만이 컸다. ”백범은 너무 충직해서 남에게 잘 이용당한다“고 한탄한다.

    중일전쟁 이후 화북지역에 한인들이 20만이나 몰려들자 김구는 광복군 창설계획을 주가화에게 말한다. 그러나 조선의용대의 김원봉이 극력반대하고 나섰다.
    그 반대 이유--”광복군은 김구의 군대일뿐“ 독립운동 통일조직 군대가 아니라는 것, 광복군을 중국이 승인하면 중국군사위원회 소속 조선의용대는 없어질 것, 조선의용대가 있으니 새로운 군대가 불필요하다는 것, 민족혁명당의 혁명운동(공산화)이 무력해진다는 것 등으로 중국 측을 가로막고 나섰다. 
    당시 조선의용대는 중국 군사위원회로부터 매달 활동비 1만6천원을 받고 있었다.
    김원봉은 등걸 등 황포군관학교 친구들에게 졸라대며 중국군사위원회에 ‘광복군 승인 반대’ 이유서를 제출하였다. ”광복군은 일병일졸(一兵一卒)도 없는데도 늙은이들이 먹고살기 위해 협잡적으로 만드는 것이며 아무 힘도 없는 아이들 장난“ 같은 것인데 혁명에 큰 분규만 일으킬 것이라 주장했다.

    김구는 김구대로 주가화에게 매달렸다. 
    결국 주가화의 보고를 받은 장제스가 ”광복군과 조선의용대가 중국 군사위원회의 통괄 아래에서 활동한다는 원칙“을 밝히며 김구의 손을 들어준다.

    1940년 8월4일 마침내 광복군 총사령부가 발족하였다.
    다음 달 충칭에서 가장 화려한 호텔 가릉빈관(嘉陵賓館)에서 거행된 기념식에는 주은래(周恩來) 동필무(董必武) 오철성(吳鐵城) 등 중국 귀빈들과 각국 외교사절 등 200여명이 참석했다. 장제스의 부인 송미령(宋美鈴)이 축의금 10만원을 냈다.
    김구의 개회사는 한중연대를 거듭 강조하고 박수소리도 컸지만 행사에 참석한 광복군이라고는 간부 10여명이 고작이다. 
    창설 작업을 맡았던 이범석은 뒷날 솔직하게 고백한다.
    중국 군사위원회에 제출한 광복군 규모는 총계 5,040명, 그러나 ”이 숫자는 지원금을 받기 위하여 과시용으로 만든 것일뿐, 만리타국에서 우리 군대가 되어줄 젊은이들이 있을 리가 없었다. 한 달을 두고 고심참담했지만 없는 사람을 구해 올 재주는 아무도 없었다.“ (이범석 [광복군] 신동아, 1999년4월호)

  • ◆조선의용대, 마오쩌뚱의 ‘팔로군’ 진영으로 대탈출

    같은 무렵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100여명이 중국 공산군 경내로 비밀리에 전격 탈출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은 공산주의에 빠져 이제나 저제나 ‘중공천당’(中共天堂)에 가기를 소원하는 ‘북상병’(北上病) 환자 청년들을 팔로군(八路軍)이 적극 유인공작을 편 결과였다.(김학철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 자서전] 문학과지성사,1995. 손세일, 앞의 책)
    중국판 대규모 ‘월북 사건’---조선의용대원 김학철(金學鐵)의 회고 증언에 보면, 팔로군 연락병들이 날마다 나타나 북상을 유인하며 ‘통과암호’를 나누어 주고 황하를 건너는 조선의용대의 안내를 맡았다고 한다. 김원봉의 개인비서 중국공산당원 사마로(司馬路)가 김원봉에 보고하며 설득했다는데 김원봉은 화북 팔로군에 가지 않고 남았다.
    일설에는 당시 국민당 군에서 위장 활동하던 주은래가 김원봉을 의심하여 못 가게 했다고 전하지만, 사실은 김원봉이 남아서 국민당정부 및 김구의 임정에 공산당과의 ‘좌우합작’ 공작을 담당케 하였다는 사실을 역사가 증언한다. 
    광복군 지대장이 된 김학규(金學奎)가 주가화에게 제출한 보고서 등에는 보다 상세한 과정이 보인다. 즉, 「김원봉의 조선의용대가 진작부터 화북지역 적후공작을 한다며 중국군사위원회에 협조령을 내려달라고 공작하였으며, 동시에 중공 팔로군의 책임인사와 결탁하였다」는 내용이다. ([조선의용대 도하입중공경과(朝鮮義勇隊 渡河入中共經過)] 손세일, 앞의 책)

    중공군의 연안(延安)에는 마오의 대장정에 참여하고 팔로군총사령부 작전과장과 포병 연대장을 지낸 무정(武亭:본명 김무정) 등이 조선의용대 편입을 준비, 팔로군 부사령 팽덕회(彭德懷)의 승인아래 화북조선청년회를 결성, 조선의용대의 북상작전을 수행하였다.
    무정은 뒷날 북한정권의 연안파이고, 8만명으로 급증한 팔로군 한인부대는 해방후 북한인민군의 주력으로 변신한다. 소련의 6.25 남침때 북한군의 선봉대가 되고 중공군 사령관 팽덕회의 지휘에 따라 대한민국을 유린한 부대다.

  • ▲ 김구와 장제스.(자료사진)
    ▲ 김구와 장제스.(자료사진)
    ◆장제스, ‘광복군 예속’ 행동준승 9개항 명령

    조선의용대의 중공군 편입에 충격을 받은 중국 국민당 정부는 한인 무장병력의 통제 필요성을 절감, 군사위원회의 방침으로 9개항의 ‘한국광복군 행동준승’(韓國光復軍行動準繩:규칙)을 만들어 김구의 입시정부에 전달하였다. 요지는 이러하다.
    (1)한국 광복군은 중국 항일작전 기간에는 중국군사위원회에 직접 예속되며, 참모총장이 운용을 장악한다.
    (2)임시정부가 한국 경내로 들어가기 전에는 중국 최고통수부의 유일한 군령만 접수하며 다른 어떤 군령도 접수하지 않음. 
    (3)중국군사위원회는 한국광복군이 한국 내지나 변경지역 활동을 원조함.
    (8)중일전쟁이 끝나기 전에 임시정부가 한국 경내에 들어갔을 때에는 계속하여 중국 군사위원회 군령을 받아서 작전에 배합하는 것을 위주로 한다.
    9개항 가운데 이 3개항이 임정에서 논란이 되었으나 11월19일 국무회의에서 ‘행동준승’은 박아들이기로 확정된다. ‘논란’만 할뿐 변변히 ‘반대’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중국 군사위윈회는 ‘구제비’로 6만원을, 광복군 운영비로 매월 2만원씩 지급하기로 결정한다. 

    갈수록 중국의 ‘광복군 지배’는 놀라울 정도였다.
    첫째, 김원봉을 설득하여 조선의용대를 광복군에 편입시키고,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이란 직책을 만들어 부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조선의용대를 중공군에 넘겨주고 20여명 측근만 남은 김원봉은 조선의용대의 종말에 밤새 술 마시며 울었다고 한다. 
    둘째, 중국 군사위원회는 중국 군인들을 광복군 간부로 투입하였다. 
    참모장 이범석(李範奭)을 해임, 중국 고급참모 윤정보(尹呈輔)로 교체한 것을 비롯하여, 사령부 간부 45명중 중국장교가 33명이나 차지하고 사상교육담당 정훈처는 전원이 중국인으로 채워졌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료집-9], 손세일, 앞의 책).
    한마디로 광복군의 작전권, 운영권, 인사권을 국민당정부 장제스가 독점한 셈이었다.
    두손 묶여 냉가슴 앓는 김구는 임정의 ‘주권행사’를 호소하는 편지도 보냈지만 허사였다고 한다. 독자적인 일은 불가능하였으며, 병력을 만들 청년들도 구하지 못해 부대 편성마저 못 하는 형편이었다.

    ★이 무렵, 이런 상황을 꿰뚫어보는 이승만이 김구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럴 줄 알았소. 그럴 바엔 광복군을 미국당국의 지휘아래 두는 것이 어떻겠소“
    20대 청넌 시절부터 중국의 식민지배와 러시아의 영토야욕과 싸웠던 이승만, 이제 평생을 기다리고 기다렸던 ‘미-일 충돌’ 태평양 전쟁 발발을 맞아 ‘미국을 이용한 독립 외교전쟁'에 온몸을 던진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