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지 중에 상거지..." 명맥 위태한 임시정부

    여기서 잠깐, 카메라를 상하이로 돌려보자.
    이승만 대통령을 일방적으로 제거한 임시정부는 앞서 설명한대로 소비에트 지도체제, 주석 김구는 임정청사에서 잠자고 밥은 동지들 집을 기웃거리며 얻어먹는 신세로 전락하였다.
    청사 월세가 불과 30원, 고용인 월급이 20원인데 이것을 낼 돈이 없어 소송이 줄을 잇는다.
    공산주의자들이 판치는 임정은 한마디로 텅빈 집에 무정부 상태, 김구는 두 아들에게 ”유서를 쓰는 심정“으로 [백범일지]를 쓰기 시작한다.
    “정부 명맥마저 막연한 나날, 한때 독립운동자들이 1천여명이던 것이 수십명만 남았다. 이집저집 기웃거리며 동냥하는 나는 거지 중에 상거지...”라는 표현까지 쓰며 도와준 사람들이 고마워서 이름들을 다 적어놓았다.

    소련의 새로운 발표가 나왔다. “식민지 운동은 복국운동이 우선한다” 공산화 중간단계의 민족해방론이다. 민족운동자들을 비난하던 공산주의자들은 그날로 ‘유일독립당 촉성회’를 만들자고 덤비더니 저희들끼리 파벌 싸움이 벌어져 흐지부지된다. 
    그때, 본국에서 광주학생의 항일투쟁(1929.11.3.이 일어났다. 
    이에 자극받아 임정사람들은 ’한국독립당‘을 1930년1월25일 결성한다. 그리고 김구는 비밀조적 ’의경대‘(義警隊)를 만들고 자금조달에 나선다. 하와이 미국 멕시코 쿠바까지 동포들에게 활동비 좀 보내라고 편지를 써 보냈다. 얼마쯤 호응이 있었다. 그런데 돈이 들어오지만 돈 찾으러 보낸 심부름꾼들이 돈을 가지고 노름도 하고 도망치기도 한다. 임정은 여전히 빈털터리다. 이래서 안 되겠다. 무슨 일을 벌여야 할 텐데 써먹을 만한 젊은이들도 보이지 않는다.

  • ▲ 김구의 '한인애국단'에 처음 입단한 단원1호 이봉창. 거사전에 태극기 앞에서 수류탄을 들고 선서문을 목에 걸고 입단식을 했다.ⓒ독립기념관
    ▲ 김구의 '한인애국단'에 처음 입단한 단원1호 이봉창. 거사전에 태극기 앞에서 수류탄을 들고 선서문을 목에 걸고 입단식을 했다.ⓒ독립기념관
    ◆31세이봉창 "일본 천황은 내가 죽이겠다"

    그때 하늘이 보냈을까, 일본냄새 풍기는 청년이 나타나 큰 소리를 쳤다.
    “당신들 여기서 독립운동을 한다면서 도대체 뭐 하는 거요?
    일본 천황쯤 죽이는 거 일도 아닌데 그걸 아직도 못하다니,
    할 테면 제대로 해보란 말이오”

    김구는 ’천황을 죽일 수 있다‘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하지만 수상하다. 말의 절반이 일본말이고 억양이나 손짓 몸짓에 왜색이 진하다.
    첩자냄새를 맡은 김구는 다음날 그 청년이 묵고 있는 여관으로 찾아갔다.

    “저는 서른 한 살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간 육신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으니,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도모하려고 우리 독립 사업에 헌신할 목적으로 상해에 왔습니다.”
    31세 청년의 이름은 이봉창(李奉昌, 1900~1932), 서울 용산에서 태어나 4년제 학교를 나온 그는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형과 함께 일터에 나선다. 용산역에서 일하다가 승진도 월급도 차별이 심해지자 뛰쳐나와 일본으로 간다. 오사카의 일본인 집에 가정부로 꺼나는 조카와 함께 일본땅을 밟은 25세 이봉창은 “일본인보다 더 잘난 일본인”이 되리라 결심하고 열심히 일한다. 그러다가 천황(히로히토) 즉위식을 보러 갔다가 몸수색에서 한글편지가 나오자 경찰에 구금되어 고생한다. 분노한 그는 난생처음 ’독립문제‘에 눈을 떴다. 하지만 생활문제가 급한지라 오사카의 일본인 상점에 취직, 신임을 얻어 이름도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로 양자가 된 그는 한국인들과의 모든 교제를 끊었다. 그러나 끓는 피를 어쩌랴. 일본말을 못한다고 조선인 종업원이 구박받는 광경을 모른체 하던 이봉창은 다시 깨닫는다.. “조선인이 조선인으로 살지 않는 것은 거짓이다” 상점을 나온 그는 상하이로 가는 배를 탄다. 상하이의 영국전자회사는 민족차별이 없다는 말을 들어서였다. 하지만 취직이 그리 쉬운가. 모은 돈만 까먹게 되자 프랑스 조계에 있다는 조선의 ’가정부‘(假政府)를 찾아 나선 것이었다.(가정부는 일본의 임정 호칭) (홍인근 [이봉창 평전], 나남출판, 2002)

    김구의 믿음직한 약속을 받은 이봉창은 그때부터 일본인 행세를 하여 일본인 철공장에서 밥벌이를 하며 운명의 거사를 기다린다. 김구는 중국군에서 근무하는 김홍일을 통하여 수류탄을 확보하고 미주 동포들의 성금으로 이봉창의 여비도 마련하였다. 1931년 12월 6일, 김구는 임정 국무회의에서 처음 ’천황폭살‘ 계획을 보고, 조소앙등 일부가 반대했으나 승인받았다,. 

    “폭탄은 언제 준비되느냐”며 재촉하던 이봉창은 김구가 부르자 한걸음에 달려왔다.
    이봉창은 김구를 따라 안공근(安恭根, 안중근 둘째동생)의 사진관에 갔다. 김구가 하라는 대로 미리 준비된 폭탄 2개를 양손에 들고 선서문을 목에 걸고 태극기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이것은 김구가 벌써 조직한 ’한인애국단‘의 입단식, 이봉창은 제1호 단원이 된 것이다.

    12월17일 아침 김구는 이봉창을 전송하러 함께 상하이 부두로 나갔는데, 많은 일본인들이 배웅하러 모인 것을 보고 놀랐다. 역사의 아이러니, 천황을 죽이러 가는 조선인이 다정한 일본친구로 알고 나온 일본인들 중엔 일본총영사관의 경찰 간부도 있었다. 그는 자기 명함에 소개장까지 써주었다가 사건 뒤에 파면되자 자살했다고 한다. (김홍일 [대륙의 분노] 문조사, 1972)
    뒷날 김구는 [백범일지]에 이봉창과 이날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이 의사의 성행은 춘풍같이 화애하지마는 그 기개는 화염같이 강하다. 그러므로 대인 담론에 극히 인자하고 호쾌하되 한번 진노하면 비수로 사람 찌르기는 다반사였다. 술은 한량없고 색은 제한이 없었다. 더구나 일본 가곡은 못하는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홍구에 거주한지 1년도 못되어 그가 친하게 사귄 친구는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왜경찰까지 그의 손아귀에서 현혹되기도 하고 모 영사의 내정에는 무상출입이었다. 그가 상해를 떠날때에 그의 옷깃을 쥐고 눈물짓는 아녀자도 적지 아니하였지마는...」 (김구 [백범일지] 및 [동경작안의 진상])
    ’東京炸案의 眞相‘은 김구가 이봉창의거의 전모를 중국신문에 기고한 글인데, 그 원본은 2000년에 처음 발굴되었다.(동아일보, 2000.10.31.)

    ★1932년 1월8일 아침, 도쿄 요요기(代代木) 연병장에서는 천황이 참석하는 육군시관병식(陸軍始觀兵式)이 열렸는데, 만주를 장악한 공로를 치하하고 만주국의 임무수행을 격려하는 행사다. 
    이봉창은 행사장 입구 하라주쿠(原宿)로 달려갔다. 경비가 삼엄하고 연병장이 넓어 포기한 그는 돌아가는 천황을 노리기 위해 아까사까 미쓰케를 오락가락하다가 천황의 행렬을 놓쳤다. 택시를 잡아타고 뒤를 쫓았다. 경찰이 가로막았다. 차를 내린 이봉창은 겹겹의 인파를 뚫고 앞으로 나아갔다. 천황의 마차가 황거(皇居) 남문 사쿠라다문(櫻田門)으로 향해 가는 순간, 다급한 이봉창은 주머니 수류탄을 꺼내 힘껏 던졌다. 
    꽈앙! 두 번째 마차 바퀴에 맞았다. 소리는 컸으나 연기만 날뿐, 마차는 끄떡없다. 더구나 천황은 첫 번째 마차에 타고 있었음을 뒤늦게 알았다. 일본경찰에 곧 체포되었다. 다른 수류탄은 꺼낼 겨를도 없었다. 이봉창 의사는 그해 10월10일 도쿄 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받는다. 상하이 독립운동가들은 그의 말대로 ’영원한 쾌락‘의 세계에서 평화를 누리기를 기원하였다.

    ★김구 “나를 지원하는 서신들이 태평양 위로 눈꽃처럼 날아들다”

    세계의 톱 뉴스! 김구는 이봉창이 의거직전 보낸 전보를 받자 몸을 숨겼다.
    일본 경찰은 이봉창 조사에서 주모자로 김구를 지목, 상하이 일본총영사관에 김구 검거령을 내린다. 조소앙 등 공범자도 수배하지만 잡을 수가 없다.
    텅빈 임정에는 그러나 곳곳의 동포사회로부터 재정지원이 급증하는 효과를 보았다.
    김구는 “나를 애호 신임하는 서신이 태평양 위로 눈꽃처럼 날아들었다”고 [백범일지]에 썼다.
    피신 중에도 김구는 모아진 지원금을 가지고 제2의 거사를 모색한다. 발길이 뜸하던 청년들이 김구를 찾아오기 시작하였다. .그중에 상하이에서 일하던 윤봉길이 있었다.
  • ▲ 윤봉길의 한인애국단 입단식. ⓒ독립기념관
    ▲ 윤봉길의 한인애국단 입단식. ⓒ독립기념관
    ◆24세 윤봉길, 두 아들에 “병정 되어라” 유서

    매헌 윤봉길(梅軒 尹奉吉1908~1932)은 충남 예산군 덕산 출생, 농민의 장남으로 보통학교를 다니다가 3.1운동으로 자퇴하고 서당 오치서숙(烏峙書塾)에 들어가 6년간 한학을 공부, 한학과 시문에 뛰어난 재능을 닦는다. 일본어도 독학으로 떼고 교재’농민독본‘을 만들어 농촌계몽운동에 헌신하며 농민운동단체 ’월진회‘(月進會)를 조직, 회장이 되었다. 그러던 중 광주학생 사건과 함흥수리조합사건에서 농민들이 타살되었다는 소식에 망명을 결심한다. 그의 나이 23세. 꽃다운 아내와 어린 두 아들을 두고 떠나는 이유를 윤봉길은 이렇게 써놓았다.
    “갈수록 우리 압박과 고통은 증가할 따름...뻣뻣이 말라가는 삼천리 강산을 바라보고만 서있을 수 없다. 나의 각오는 나의 철권으로 적을 부수려는 것...늙어지면 무용이다. 내 귀에 쟁쟁한 것은 상해임시정부다. 사랑하는 부모형제와 젊은 아내와 사랑하는 자식들과 따뜻한 고향산천을 버리고, 쓰라린 가슴을 부여잡고 압록강을 건넜다.”(김구에게 써준 ’이력서‘애서)

    어렵게 중국 청도(靑島)에 도착하여 공장도 차려보고 중국회사 직공도 해보다가 해고 되자 상하이로 옮겨 홍구 시장에서 채소와 밀가루 장사를 했다. 그가 김구를 알게 된 것은 중국회사에서 일할 때, 두 사람은 시국문제에 의기투합하여 신뢰가 쌓였을 때 거사를 결심하였다.
    장소는 4월29일 천장절(天長節, 히로히토 생일)행사장 홍구(虹口) 공원으로 합의하였다.

    4월26일 김구는 이번에도 국무회의에서 혼자 준비한 홍구공원 거사를 승인받았다.
    폭탄은 중국군 장교 김홍일이 중국 병기공장에 주문, 공장에서는 이봉창 거사를 알기 때문인지 많이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필요한 것은 ’도시락 폭탄‘과 ’수통 폭탄‘ 두 개, 일본신문이 행사장에 매점을 금지하니 도시락을 가져오라고 안내기사를 냈기 때문이다. 
    김구는 이번에도 윤봉길을 안공근의 사진관으로 데려가 이봉창처럼 ’한인애국단‘ 제2호 입단식을 행한다. 사진을 찍고 난 윤봉길은 가지고 다니는 수첩에 유서를 쓴다. 두 아들과 조국청년들에게 남기는 유서였다. 김구에게 바치는 한시도 썼다. 2시간동안 쓰는 유창한 글을 보고 김구는 그 재능에 감탄한다.

    <두 아들에게 남긴 유서>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모순(模淳)과 담(淡)
    너희도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야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아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가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들이 되어라”

    젖먹이 두 아들에게 병정이 되고 훌륭한 인물이 되라는 유서, 농민지도자 답게 동서양의 상식이 풍부했던 윤봉길은 수첩을 김구에게 맡기고 폭탄 사용법을 되풀이 실습하였다.

    ★자폭 명령★
    윤봉길에겐 이봉창과 달리 특별 명령이 내려진다. 거사 장소가 상하이이기 때문이다.
    「식단 뒤쪽에서 단상을 향해 첫 번째 폭탄을 던진 후에 두 번째 폭탄으로 자폭하기로 했다. 자폭하되 폭탄을 얼굴 가까이 대고 폭발시켜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하게 하도록 했다. 그렇게 하면 일본군이 범인을 중국인으로 착각하든가 아니면 고의적으로라도 중국인이 한 것으로 억지를 부려서 그것을 빌미로 일본이 남경을 공격할지도 모르며, 만약 그렇게 되기만 하면 일본과의 전쟁을 피하려는 중국도 어쩔 수 없이 전쟁을 감행하게 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김홍일  [대륙의 분노])
    죽음을 넘어버린 24세 애국의 불꽃 윤봉길은 얼굴을 망가트리는 자폭 연습도 한다.

    ▶4월29일 아침, 윤봉길은 김구와 함께 마지막 식사를 든든하게 먹어치웠다. 죽음을 초월한 투사는 투지의 에너지를 가득 채운 것이다. 그리고 손목시계를 풀었다.
    “저는 이제 한 시간 뒤에는 이 시계가 필요 없습니다.”
    회중시계를 교환한 두 사람은 폭탄을 들고 메고 나선다. 택시를 탄 윤봉길에게 김구가 나직히 말했다. “지하에서 만납시다” 

    홍구공원 일본군 행사는 11시 30분에 시작, 전원이 일어서서 일본국가 ’기미가요‘를 부르기 시작한다.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진다. 기회는 이때다. 기마병 뒤에 선 윤봉길은 도시락 폭탄을 내려놓고 끈 달린 물통 폭탄 안전핀을 뽑으며 뛰어나가 단상에 힘껏 내던졌다.
    명중! 천둥치는 굉음과 함께 비명과 고함소리...도시락 폭탄을 집으려던 윤봉길은 군경의 몰매를 맞으며 체포된다. 두 번째 명령 ’자폭‘을 실행 못한 채 끌려가는 윤봉길은 가슴이 아프다.

    단상의 일본군 장성들은 벼락을 맞았다. 대장 시라카와(白川義則) 사령관은 24군데 파편을 맞아 병원에 실려가 한달도 안돼 절명,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는 중상, 제3함대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郎)는 눈알이 빠지고 주중공사 시게미쓰(重光葵)도 중상,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다(河端貞次) 등은 즉사하였다.
    이봉창이 도쿄에서 미수에 그쳤던 한을 윤봉길이 상하이에서 보기 좋게 풀었다.
    “다 죽었던 임시정부가 살아났다” 좌절감에 빠졌던 임정 사람들은 윤봉길 의사가 구세주 같았다고 한다.
  • ▲ 거사전 윤봉길과 김구.ⓒ독립기념관
    ▲ 거사전 윤봉길과 김구.ⓒ독립기념관
    ◆김구는 피신, 안창호 체포...김구 비난 봇물

    검거선풍이 불었다. 김구는 거사 승인후 주요 인사들에게 미리 피신 비용도 주었다고 한다.
    이동녕과 조소앙 등은 항주로 갔다. 김구 일행은 의논 끝에 상하이 YMCA 미국인 목사 피치(George A.Pitch)와 교섭하여 그의 집에 은신하였다. 

    문제는 안창호가 검거된 것이다. 안창호는 워낙 일시적 폭력테러에 대하여 “애꿎게 한인들만 살 곳을 잃는다”며 반대하였는데, 그날도 측근 이유필 아들에게 소년단기금을 주기로 약속하였기에 그 집으로 갔다가 잠복했던 프랑스 경찰에게 붙잡혔다. 
    안창호는 “나는 중국인이오. 이유필이 아니다”며 중국정부 발행 여권도 보여주었으나 허사혔다. 사건 당일에만 11명의 독립운동자들이 연행되었다.

    상하이 흥사단 등과 미주 샌프란시스코의 안창호 세력이 격분하여 들고 일어났다.
    “연락도 없이 저만 도망치고 왜 도산선생을 잡아가게 놔두었느냐”고 맹비난을 퍼부었다.
    김구 측에선 ’미리 피신하라는 편지를 보냈다‘고 주장하는데 이쪽에선 ’거짓말‘이라 반격한다. 누가 진실인지는 지금도 알 수가 없다. 
    또 한 가지는 경찰이 주모자가 누구냐는 심문에 윤봉길이 ’이유필‘을 줄곧 말했다는 것이다. 안창호 측은 이것보라는 듯 김구를 공격하고 나섰다. 실제로는 교민단 대표 이유필이 윤봉길과 장기간 공모한 의거였는데 김구가 막판에 뒤늦게 나서 ’공로‘를 가로챘다는 논리였다. 
    (김상구 [김구 청문회] 1권, 매직하우스, 2014). 
    이 책이 제기하는 ’김구의 독립운동 의혹‘은 수 십 가지에 달한다. 심지어, 윤봉길은 “김구 돈벌이의 먹이”였다는 주장까지 인용해 놓았다. 왜냐하면 의거 열흘 뒤에 5월10일 김구가 “내가 다 했소” 과시하는 성명서를 때늦게 배포하여 언론들이 대서특필함으로써 엄청난 성금을 모아 독식했다는 일방적 주장이었다. 
    오늘 날까지도 진상은 없고 주장들만 남아있다. 윤봉길이 그해 12월9일 일본 가나자와 형무소에서 총살형을 당함으로써 진실은 영원히 역사 속에 묻혀버렸기 때문이다.
    안창호는 본국으로 송환되어 감옥을 전전하다가 옥고로 합병증이 극도로 심화, 1938년 61세로 눈을 감는다. 

  • ▲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를 보도한 일본 오사카 아사히신문의 호외(1932.5.1). 아래는 연행되는 윤의사.(자료사진)
    ▲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를 보도한 일본 오사카 아사히신문의 호외(1932.5.1). 아래는 연행되는 윤의사.(자료사진)
    ★이승만, 프랑스에 항의 서한...김구, 상하이를 떠나다

    상하이에 폭음이 진동하던 날, 뉴욕에 있던 이승만은 임정요인의 검거사태를 좌시할 수 없었다. 주미 프랑스 대사에게 편지를 보내, 검거 항의 및 중지와 안창호 등 11명의 석방을 촉구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위원부는 체포된 한국인들이 폭탄사건에 관련되었다는 것을 부인한다. 프랑스 조계 한국인들은 범죄자가 아니요 법을 준행하는 양민들이다. 우리 임시정부는 비폭력주의를 믿으며 폭력행위를 권장하지 않는다. 일본 당국은 하등의 증거도 없이 오직 그들의 상용수단으로 한국인들을 모함한다.
    프랑스 정부는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무법의 희생양이 되게 방치하지 말 것이며, 일본에 대하여 무고한 한국인들의 즉각 석방을 요구하여 프랑스 조계에 돌려보내 보호해 주기를 간곡히 요망한다.” 
    이승만의 서한을 접수한 프랑스 정부는 상하이 주재 프랑스 영사에게 한국인의 보호를 훈령하고 그 사실을 이승만에게 통보하였다. 이승만은 프랑스 대통령에게 감사 답신을 보냈다.

    윤봉길 의거로 본국과 각국의 동포사회에서 김구의 권위가 급상승하였다. 이봉창 의거때보다 더 적극적인 재정지원이 이어지고 중국인들과 장개석 정부의 관심도 달라졌다.
    김구는 그러나 상하이에서 공개 활동이 불가능하므로 안공근과 함께 가흥(嘉興)의 피난처를 향하여 기차에 오른다. 가흥과 항주(杭州)에는 미리 피신한 임정 인사들이 기다린다. 정처없는 임시정부의 유랑길! 망명 14년만에 상하이를 떠나는 김구 앞에 중일전쟁이라는 고난의 길이 또 열릴 줄이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