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하와이 '동지촌'의 숯가마터와 동지촌 일부.ⓒ건국대통령이승만박사 기념사업회
    ▲ 하와이 '동지촌'의 숯가마터와 동지촌 일부.ⓒ건국대통령이승만박사 기념사업회
    "속이 상할 대로 상하고 애가 탈 대로 탄 사람의 그 얼굴...."

    ★「이 박사의 댁—유심히 보았소이다. 화산 부스러기의 구멍이 숭숭 뚫린 검정 돌을 더덕더덕 쌓아놓은 돌기둥 문이 보이고 현관 앞에 엉킨 붉은 꽃, 파란 잔디 풀이 깔린 앞뜰에 우뚝우뚝 서 있는 야자나무....꼬불꼬불 층층단을 올라가 현관에 들어서니 판자벽에 유리창 문이 열렸는데 널찍한 응접실이 있고 흰 침대 한 개가 놓인 방 하나가 보이고 ....그러나 어쩐 일인지 내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 아니하야 선생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소이다. 그 이박사의 얼굴을 무엇이라고 형용하면 좋을는지요. 속이 상할 대로 상하고 애가 탈 대로 탄 사람, 기름이 빠질 대로 빠진 사람, 이런 사람 얼굴을 본 사람이 있으면 아마 그 이 박사의 얼굴을 상상하여 볼 수가 있으리라고 하는 말 밖에는 나에게 적당한 형용사가 없고 또 그렇게 밖에는 감각이 되지 아니하더이다....」 (장덕수 ‘미국 와서’ [동아일보] 1923.12.27.)

    이 글은 미국 유학 가는 길에 호놀룰루에 기착한 장덕수(당시 29세) 동아일보 주필이 신문에 연재한 방미여행기의 일부이다. 1923년 5월7일 장덕수가 만난 이승만 임정 대통령은 당시 상하이에서 안창호가 흥사단과 고려공산당을 앞세워 ‘국민대표대회’를 열고 ‘이승만 퇴진’을 압박할 때였다. 그날 저녁 이승만이 베풀어준 교민들의 환영회에서 장덕수는 “염치불구하고 실컷 울고 싶은 대로 울었다“고 썼다. 장덕수(張德秀,1894~1947)는 3.1운동때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을 만들어 이승만 쪽과 연락하며 일본유학생의 ‘2.8독립선언’을 끌어내는 등 앞장섰던 인물이다. 

    ★「잡지가 나오면 이승만은 윤치영을 데리고 직접 자동차를 운전하여 배달하러 다녔다. 아침은 15센트짜리 빵 한 개와 5센트 커피 한 잔, 점심도 빵 한 개와 야채 수프가 고작이었다. 바쁠 때는 하루 한끼 먹는 둥 마는 둥 돌아다녀야 했다. 그러다가 꾀를 내어 배달시간을 일부러 동포들의 저녁식사 시간쯤에 맞추어 멀리 떨어진 와이알루아와 와히아와 등지의 동포들 집을 찾아가서 김치를 곁들인 밥과 국을 얻어먹었다. 두 사람은 함께 막일을 하기도 했다. 이승만은 농사 일뿐 아니라 젊어서 익힌 목수일이며 미장이 일까지 못하는 일이 없고 솜씨도 좋아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윤치영 [동산 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삼성출판사, 1991. 손세일, 앞의 책)

    이승만의 월간지 [태평양잡지] 주필을 맡았던 윤치영(尹致瑛,1898~1996)의 회고담이다. 상하이 ‘탄핵소동’이후 이승만의 기도는 길어지고 어쩌다 회한에 빠져 청년시절 독립운동을 돌아보며 “기약 없는 국토회복의 앞날”을 탄식하기도 했다 한다,
    그러나 독립운동은 ‘하나님의 소명(召命:Beruf)이기에 좌절이나 포기를 모르는 이승만이다.
    1921년 워싱턴회의 결과에 실망한 서재필과 정한경 등이 “가망 없는 독립운동 더 못 하겠다”며 생업으로 돌아간 뒤에도 이승만은 혼자서 하와이 동지회를 강화하는 일과, 한인기독학원을 새로 짓는 일 등에 뛰어다녔다. 
  • ▲ 동지회원 이범녕이 구입한 동지식산회사의 주식.
    ▲ 동지회원 이범녕이 구입한 동지식산회사의 주식.
    ◆’동지촌‘ 건설 사업, 미국의 대공황에 파산

    이승만의 ’동지회‘(대한인동지회:大韓人同志會) 사업을 두고 반대세력은 “탄핵당하고 할 일 없어 신선놀음”한다며 비난을 퍼부었다. 어처구니없는 모함이다. 
    ’동지회‘ 구상은 이미 이승만이 상하이로 밀항하기 전부터 구상하였고 상하이에 있을 때 물밑작업을 마친 뒤 이듬해 1921년 6월 하와이로 돌아와 7월7일 발족한 ’임정수호 조직‘이다.(이덕희, 앞의 책)
    1924년 11월 이승만은 자신을 지지하는 조직들을 총동원, ’하와이한인대표회’를 열었다. 동지회 24개지역 대표들과 한인기독학원, 한인기독교회, 태평양잡지사, 대한부인구제회, 하와이대한인교민단 등이 모인 회의는 동지회 안에 ‘실업부’를 설치, 한인들의 경제력을 육성하기로 결의한다. 
    그리하여 이듬해 12월 13일에 ‘동지식산회사’(Dongji Investment Company, Limited)를 설립하였다. 100달러짜리 주식을 모집하여 3만달러를 자본금으로 출발한 회사는 하와이 빅 아일랜드(Hawaii Big Island) 힐로(Hilo) 근처 임야 963에이커(약117만 9300평, 여의도 1.3배)을 구입하고, 그곳을 ‘동지촌’이라 이름 붙였다. 

    이승만은 의욕에 불타올랐다. 잘만 하면 독립운동의 재정적 자립과 동시에 동포사회의 복지 및 금융업까지도 확장할 수 있겠다는 꿈에 부풀어, 계획을 짜느라 동분서주한다.
    그가 말하는 동지촌 건설 동기는 이러하다. “농장에서 일할 수 없게 된 나이 든 노동자들이 계속 늘어나 것이 문제다. 호놀루루 한인기독학원 지도자들이 회의를 거듭한 결과 이 심각한 한인사회문제의 해결을 돕기 위해 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요컨대, 독립협회시절부터 백성계몽을 중시하였던 이승만의 평민주의 사상에 기독교 구민 박애주의가 합쳐진 사명감 때문에 임정대통령으로서 시작한 사업이었던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사업은 완전 실패였다. 6년 뒤 파산하고 만다.
    동기는 숭고했지만 경제를 모르는 애국지사의 기업운영, 애국심이 돈을 벌어주진 못한다.
    이승만이 벌인 사업 내용은 임야개간, 공동 농장, 생산물 판매, 목장, 제재소 설치, 숯가마 운연 등이다. 동서양의 학문은 연마하였으되 사업경험이 없는 ‘학자 경영인’ 이승만에 대하여 윤치영은 이런 건의를 하기도 했다. 
    “...각하가 소인배들에게서 비평을 많이 들으시는 그 뒤에는 선생님께서 너무나도 맑고 깨끗하시며 진실하신 도덕군자 같이 하시기 때문입니다.....선생님, 돈도 없이 어찌 하실려고 하십니까?...” (윤치영이 이승만에게보낸 편지 [우남 이승만 문서 동문편], 1998)

    도덕군자 같은 기업인의 ‘동지식산회사’는 1931년 4월 파산선고를 받았다.
    결정타는 미국의 대공황 기습, 자금난에 시달리는 회사는 빚더미에 깔렸다. 미정계에 발이 넓은 이승만도 그동안 판로개척엔 도움이 되었지만 불황은 불가항력...진주만 미 해군에 납품하던 연료 숯도 재목도 기술 미달로 실적 부진, 오히려 미국 정부가 때린 벌금이 더 컸다. 
    한마디로 자금부족이 빚어낸 설비부족, 기술인력 부족 등 경쟁력 부족이다. 꽉 막힌 돈 줄을 어찌하라. 줄줄이 도산하는 미국 기업들처럼 이승만의 꿈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 넓은 꿈의 농장은 2년후 경매에 부쳐져 매입 원금도 안되는 헐값에 낙찰되었다. 터널을 뚫은 숯 가마터는 지금도 원형이 보존되어 한국인 관계자들이 방문하고 있다.

  • ▲ 김현구(왼쪽), 이승만이 조직한 '대한동지회'가 사용하던  회관 건물.(자료사진)
    ▲ 김현구(왼쪽), 이승만이 조직한 '대한동지회'가 사용하던 회관 건물.(자료사진)
    ★회사 기울자 ‘파산’ 전에 ‘배신’이 먼저 왔다.

    이승만은 동지촌 건설사업을 포기하는 대신 미국본토와 하와이 동지회 대표들을 총동원, 독립운동 조직 ‘동지회 단결 강화’에 나섰다. 1930년 7월에 열린 ‘동지미포대회’(同志美布大會), 초점은 임시정부와 구미위원부의 관계회복과 활동 확대, 그리고 늘어나는 현지출생 청년들을 대거 영입하는 일이다. 여기서 또 안창호의 대한인교민회 측과 갈등이 불붙는다. 이승만이 구미위원부 산하로 합쳐놓은 하와이교민단이 “청년조직을 독점하지 말라”며 반기를 들었다.
    이때 신세대 여성들이 따랐다는 중년 미남 김현구(金鉉九, 1889~1967)가 뜻밖에도 이승만에게 등을 돌려 교민단 편에 선다. 
    이승만보다 14살 아래인 김현구는 20살때 도미하여 박용만의 군사학교도 다녔고 안창호의 교민단 부회장까지 지낸 인연일까. 하지만 이승만의 워싱턴 구미위원부에 들어와 4년간 일하면서 이승만과 나눈 편지가 300여 통이나 남아있다(이승만 보관). 이승만의 부름을 받고 하와이로 옮겨 [국민보] 주필과 [태평양잡지]도 맡고있는 그에게 이승만이 동지회 입장을 게재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그동안 자연스럽던 일, 그 김현구가 느닷없이 불응, 사직서까지 내는 게 아닌가.
    한술 더 떠서 “이승만은 독재자”라는 등, 갖가지 비난 글들을 [국민보]에 몇 달 동안 게재하며 반대편을 들었다. 시카고대표 김원용(金元容, 1896~1976)과 목사 등 동조자가 3명 더 있었다. 
    참담한 이승만은 ”돌이라면 닳고 쇠라도 녹는“ 대화로 설득을 이어갔지만 양파의 폭력사태까지 벌어지자 ’파면‘ 형식으로 사직서를 수리할 수 밖에 없었다. 
    그후 김현구는 ’탄핵되었으니 물러나라‘는 둥 이승만 반대 캠페인을 줄기차게 벌인다. 그는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Autobiography with Commentaries on Syngman Rhee, Pak Yong-Man, and Chong Sun-man]이라는 긴 제목의 책을 썼다. 이승만, 박용만, 정순만이래서 ’3만‘이라는 인물비평에서 이승만 비난이 초점임은 물론이다. 
    김원용 역시 이승만 정권 말기 1959년 [재미한인50년사]라는 책을 냈다. 두 사람의 책은 1930년 전후 이승만의 측근에서 돌변한 자신들을 정당화하는 주장들인데, 이 주장들이 지금까지도 이승만 규탄의 원천으로 악용되고 있는 실정이 한국적 풍토이다.
  • ▲ 제네바 몽블랑 다리에 선 이승만.
    ▲ 제네바 몽블랑 다리에 선 이승만.
    ◆ 제네바 국제연맹 외교...일본을 ’퇴출‘ 시키다

    Big News! 이승만은 벌떡 일어난다.
    일본이 만주를 침략했다. 1931년 9월 18일 류티야오후 사건(柳條湖事件)을 조작한 일본 관동군이 만주를 중국 침공기지로 만들기 위한 ‘만주사변’(9·18사변)이 터진 것이다. 그리고 청왕조 부의를 인형처럼 데려다 만주국을 세웠다.
    때가 왔다. 무슨 때? 이승만이 평소에 주장하던 때, 그것은 일본을 국제연맹의 힘으로 물리칠 수 있는 때, 바로 3.1운동직전 이승만이 서명하여 ‘매국노’ 욕을 먹었던 ‘국제연맹 위임통치 청원’과 같은 전략이다. “미국을 움직이자. 미국 여론을 일으키려면 미국 언론을 이용하자”
    이때의 이승만이 얼마나 만주사변의 기회를 노려 대미 외교에 집중했는지는 그가 3년간의 일기를 상세하게 기록한 점이 말해준다.

    워싱턴으로 달려간 이승만은 우선 미국 정부를 향한 문서외교를 개시한다. 
    12월16일 미국무장관 스팀슨(Henry L.Stimson)에게 긴 편지를 냈다. 
    “나는 한반도 2,000만명, 시베리아 200만명, 만주 60만명, 하와이와 미주지역 1만여명 한국인을 대표하여 청원합니다. 일본이 만주의 풍부한 자원을 장악하면 아시아는 물론, 미국의 안전을 위협하는 강대한 침략국이 될 것이니, 또 한번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미국은 대통령 연두교서로 세계문명의 적 일본에 대하여 강경한 행동을 취할 때임을 성언해야 합니다.”
    새해 1932년 1월엔 미국 외교정책 수립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 외교정책협회(American Foreign Policy Association)에서 ‘극동문제에 대한 한국인의 견해’란 강연과 질의응답을 펼쳤다, 뉴욕의 각 기관들의 초청강연이 이어졌다. 뉴욕 대학과 큰 교회들의 강연도 계속한다.

    그는 미국무부에서 여권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워싱턴 구미위원부도 정리하여 새 건물로 이전하고 뉴욕동지회를 움직여 ‘뉴욕동시회보’를 창간, 국제정세의 새로운 전개를 선전하는 글도 써낸다. ‘기회를 이용하자’는 발표에선 “한국의 독립기회는 언제나 미국과 일본의 충돌에서 찾아야한다며 ”1차대전 후 아일랜드의 독립이나 인도의 비폭력 운동 등이 모루 미국의 공론을 얻어 된 것이라“며 ”지금은 미국의 친일주의가 결정적으로 변할 시기가 왔다“고 주장한다.
    지금까지 미국의 일본정책은 태프트-가쓰라 밀약 등 실패의 연속으로서 일본의 침략역량만 키워주었기에 ‘미-일 충돌’이 날로 자라날 것이 불가피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따라서 ”미국이 도덕적 각성을 하여 한민족을 응원하도록 동맹적 연대를 맺는 것이 구미위원부의 최우선 외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승만 특유의 친미용미(親美用美) 전략이다.

    한편 상하이 임시정부의 ‘전권대표’자격을 얻으려는 이승만이 조소앙 외무장에게 여러번 전보를 쳤으나 감감소식이다. 그때 김구 등 지도부는 윤봉길의 홍구공원 거사 때문에 은신중이었다. 황주로 피신한 조소앙과 연란이 닿아 가까스로 한문 신임장이 파리로 보내진다.
    미국무부는 태도가 달라졌다. 골치아픈 반공주의자이자 무국적자 이승만을 외면하던 때와 달리 이번엔 미국 법무장관과 스팀슨 국무장관이 서명한 문서가 왔는데 그것이 이승만의 ‘특별 외교관 여권’이 되었다. 
  • ▲ 제네바 드루씨 호텔. 이승만이 여기서 외교전쟁에도 승리하고 평생의 반려자도 만났다.(자료사진)
    ▲ 제네바 드루씨 호텔. 이승만이 여기서 외교전쟁에도 승리하고 평생의 반려자도 만났다.(자료사진)
    ★미국-유럽 각국 언론과 ‘선전 외교’ 집중

    제네바엔 파리에서 10년 유학하고 임정연락대표로 활동하는 서영해(徐嶺海,1902~사망불명)가 미리 와서 호텔 드 뤼시(Hotel de Russi)에 스위트 룸을 예약해 놓았다. 이승만은 이튿날 작은 방으로 옮겼다. 
    그날로 이승만을 찾아 온 AP통신 특파원, 그는 한달동안 이승만의 홍보역을 맡았다.
    일요일 예배당서 배재학당의 은사 아펜젤러의 친구 등 미국인 들을 만나고, 월요일부터 미국 총영사 길버트(Prentiss B. Gilbert)와 뉴욕 타임스, 뉴욕 월드, UP통신 등 특파원들부터 인터뷰와 홍보에 많은 협력을 얻는다. 그동안 미국 언론들과 친분을 쌓아온 덕분이며 이승만의 품격에 반한 미국 기자들이 자진하여 나서서 도와주었다.

    반면, 안창호 측의 [신한민보]는 이승만의 제네바 행을 비아냥거리고, 하와이교민단에선 김현구, 한길수 등이 국제연맹에 제출해달라는 편지를 중국대표단에 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승만이 만난 중국대표가 이 편지를 이승만에 제시하며 의견을 묻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웃음으로 치부했다한다.
  • ▲ 만주국 왕 푸이, 일본의 대륙침략지도(자료사진).
    ▲ 만주국 왕 푸이, 일본의 대륙침략지도(자료사진).
    ★만주침략 다음해, 일본은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를 인형처럼 앞세워 ‘만주국’을 세운다. 왜냐하면 만주를 일본이 직접통치하면 1922년 워싱턴회의 9개국 조약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잔꾀에 능한 일본은 그래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끌어다가 “만주국은 만주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분리 독립을 원하여 세운 나라”라는 각본을 짠 것. 조선을 먹을 때 써먹던 수법이다.

    이에 국제법 박사 이승만은 더욱 쾌재를 부른다. 그 잔꾀가 급소! 미국-영국-프랑스 등 강대국 8개국이 일본의 침략을 반대하는 세계를 일본 스스로 만들지 않았는가.
    이승만이 원하던 ‘일본 고립’ 구도, 이것이다. 결코 만주인의 의사가 아니란 것은 천하가 다 아는데 강대국들만 모른체 한다. 나라 잃은 동포 100만이 만주에 쫓겨가 본의 아닌 만주인이 되어 고통받는 20년 세월, 이승만은 ‘문서에 의한 독립운동’에 혼신을 바친다. 
  • ▲ 이승만의 인터뷰를 1면전면에 
보도한 스위스신문.ⓒ연세대이승만연구원
    ▲ 이승만의 인터뷰를 1면전면에 보도한 스위스신문.ⓒ연세대이승만연구원
    ◉리튼 보고서(Lytton Report)=국제연맹 조사단장 리튼(Victor A. G. B. Lytton)이 이끄는 조사단은 중국을 방문, 일본의 만주침략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 국제연맹에서 심의가 시작되었다. 이승만은 조사단 19개국 위원을 비롯, 그 나라 수상, 외교관, 언론들을 순방 접촉하였다. 그들은 한결같이 “이승만의 주장이 일본의 주장을 꺾을 수 있는 증거”라면 된다는 반응이다. 즉, 일본이 만주의 중국인-한국인들의 찬성을 얻어 만주국을 세웠다는 일본 측 보고서를 뒤엎자는 것, 즉각 이승만은 몇날 몇밤을 새워 길고 긴 문서를 작성한다. 
    그동안 일본에 속아 열강들이 몰랐던 이승만의 ‘반일 증거’들의 증거력은 너무나 강력하다.
    핵심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역사의 비극들: 1592년 임진왜란,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 등 모든 전쟁은 일본이 한반도를 군사기지로 대륙을 침략한 것. 1910년 한일병탄을 미국이 승인하였기에 지금 한국을 기지삼아 또만주와 중국을 침략한다는 것. 그때마다 약소국 한국인들이 일본에게 당한 집단학살과 재산권 자유권의 유린을 보라. 현재 만주의 한인동포들은 일본 침략의 희생물이다. 수백년 일관된 일본의 군국주의 본능, 이번에도 일본의 만주국 점령을 용인한다면 국제연맹의 ‘민족자결 원칙’은 무효가 된다. 그러므로 한국독립문제는 만주국문제 해결뿐만 아니라 세계평화의 열쇠임을 의심의 여지없이 확인해줄 것이다..

    이 문서는 국제연맹 사무국장과 세계 회원국 대표들에게 60부를 배송, 신문과 방송 기자들에게 배포하였는데 너도 나도 요구하여 50부씩 두 번이나 더 주문해야 했다. 
    스위스 뉴스 신디케이트 대표가 찾아와 인터뷰하고 뉴욕타임스 등 미국 언론들이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제네바에서 발행되는 모든 신문, 방송들이 날마다 시사해설을 한다. 
    마침내 ’만주국 불승인‘ 9개국 소위원회는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다. 중국대표단은 이승만에게 감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승만 일기. Log Book of S.R. 1933년 2월)

    ◉총회 개막 3일전, 이승만은 국제연맹 방송으로 마지막 열 번을 토한다.
    30분간 방송한 이 원고는 이승만이 미국에서 작성하여 가져온 것이다. 일본의 한국과 대륙침략사를 다시 한번 강의하고 “한국은 열강의 보장 아래 독립시켜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한일합병은 중국 합병으로 이어질 것이므로, 한국의 독립은 빠르면 빠를수록 아시아와 세계 평화가 빨리 확보될 것임을 강조하였다.
    프랑스어 신문들이 이승만 기사를 대서 특필하였다. 특히 [라 트리뷴 도리앙 La Tribune D’Orient]은 개막전날 아침 1면 전면을 이승만 인터뷰로 채웠다. 
    ♥이 신문이 58세 이승만에게 33세 비엔나 미녀를 데려다주는 사랑의 메신저가 될 줄이야♥ 
    23일엔 독일어 신문 [데어 분트 Der Bunt]가 뒤를 따랐다.

  • ▲ 이승만이 제네바 국제연맹총회때 발간한 [만주의 한인들],국제연맹 조사단의 [리튼 보고서].
    ▲ 이승만이 제네바 국제연맹총회때 발간한 [만주의 한인들],국제연맹 조사단의 [리튼 보고서].
    41대 1 완승! 이승만 ‘1인 외교전쟁’ 만세

    ★24일 국제연맹 총회는 ‘만주국’을 부인하는 19인위원회의 보고서를 41대 1로 채택한다. 반대 1표는 일본이다. 이승만 임정대통령의 외교력이 국제무대에서 3천만의 적 일본을 물리친 완벽한 승리다. 이것이 그의 ‘외교독립론’의 실체를 보여준 본보기, 어림없는 무장투쟁 독립론이 고개를 숙인다.
    이승만은 총회기간 줄곧 준비한 [The Koreans in Manchuria 만주의 한국인들] 책자를 발간, 배포 한다. 일본의 야만적 만행을 폭로, 한국 독립이 시급한 당위성을 증거하는 역사자료는 다시 한번 열강들의 마음을 굳히는 심리전 작품이다.
    국제사회에서 고립된 일본은 다음달 3월27일 결국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만다. 
    이승만의 일본 고립화‘ 전략에 성난 맹수 사무라이 일본은 4년 뒤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다시 4년 뒤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한다. 이승만의 희망대로! 예언대로! 마침내 미국과 일본의 대격돌...그 4년 뒤 ’독립의 문‘이 활짝 열린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