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난해한 마르크스-레닌의 가면을 벗기다이승만은 '반공'선언...안창호는 공산당과 '동업'
  • ▲ 상하이 조계지 와이탄(자료사진)
    ▲ 상하이 조계지 와이탄(자료사진)
     이승만 임시정부(임정) 대통령이 하와이로 돌아간 뒤, 상하이는 양대 ‘비밀조직’이 세상을 만났다. 하나는 소련 레닌이 이동휘-김립을 앞세워 조직한 ‘고려공산당’이요, 또 하나는 서북파(西北派) 리더 안창호가 1919년 미국서 달려와 은밀히 조직한 ‘흥사단’(興士團)이다.
    당시 독립운동을 한다는 ‘상하이 사람’들은 두 조직중 하나, 또는 양쪽에 가담하게 되었다.
    나라도 고향도 잃어버린 외로운 사람들을 움직인 힘은 나름대로의 ‘이념과 돈’이다. 공산당의 선전과 레닌의 공작금, 그리고 안창호의 언변과 재력이다. 안창호는 미국서 교민들로부터 모금한 거액을 가져갔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상하이 1922~1923■

    ◆극동인민대표대회(極東人民代表大會) <1922.1.21.~2.2>
    레닌의 코민테른이 모스크바에서 개최한 이 대회는 이름 그대로 극동의 한국-중국-일본을 중심으로 약소민족 대표들을 불러들인 국제공산주의 확산대회, 전체 144명중 56명이 한인(韓人)대표였다. 중국42명, 일본 19명, 몽골14명, 인도2명 등 9개 지역이다.
    왜 유독 한인들이 많이 참가했을까.
    ‘약소민족은 단결하라“는 표어를 내건 별칭 ’원동(극동)민족대회‘는 같은 시기에 미국서 열리고 있는 ‘워싱턴회의’(1921.11.12.~1922.2.6.)를 지켜보던 소련이 대응한 전략이다. 세계1차대전 연합국들의 워싱턴회의는 파리강화회의처럼 약소민족 문제 처리는 제외하였고, 이에 ‘버림받은 피압박민족’들을 레닌과 스탈린이 품어 안은 것이었다. 
    임시정부는 워싱턴회의에 기대를 걸고 이승만, 정한경 등 대표단을 파견하려 하였으나 워싱턴회의는 한인의 대표성을 거부하였다. 따라서 레닌의 공작금을 체험한 한인들에겐 “소련이 유일한 구세주”로 다가왔고, 이승만 반대세력과 좌파 한인들이 대거 모스크바로 달려갔다.

    대회 의장단에 레닌, 트로츠키와 함께 김규식(당시 41세) 여운형(36세)이 선정되었다. 임정 학무총장(교육부장관)이던 김규식이 공산당 대표자격이다. 이승만의 지지자였던 현순도 ‘상해공산당’ 자격으로 참가, 주요인물들은 김상덕 이동휘 박진순 조봉암 박헌영 홍범도 장건상 장덕준 김승학 김시현 권애라 등이다. 6.25때 이승만대통령 암살 미수범 김시현은 이때 만난 권애라와 결혼한다. 밀양폭탄사건 김시현은 일본경찰과 짜고 ‘정보제공’ 대가로 여비를 얻어 참석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김준엽-김창순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앞의 책)

    ►주요 연설 내용을 보자.
    코민테른 의장 지노비예프=“마치 한국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이, 한국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들은 적이 없는 국가들이 워싱턴에 모인 것 같이 워싱턴회의에서는 코리아란 단어가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극동민족대회는 바로 한국을 주요타깃으로 삼았다. 
    김규식(대회공동의장, 고려공산당) 연설 요지=”모스크바는 '세계프롤레타리아혁명운동의 중심지'로서 극동 피압박민족의 대표자를 환영하고 있는데, 워싱턴은 '세계의 자본주의적 착취와 제국주의적 팽창의 중심'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조선대표단이 모스크바에 온 이유는 “하나의 불씨, 세계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체제를 재로 만들어 버릴 불씨”를 얻고자 함이다. 미국은 민주주의 가면을 쓴 흡혈귀와 같다. 소비에트 러시아 만세! 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 만세!“
    기독교도 김규식이 이승만의 구미위원부 위원장으로 일하던 모습은 어디로 간 것일까. 여운형도 유창한 영어로 연설하였다.

    대회 결의 내용(한국관계)=첫째, 한국은 농업국이므로 민족주의에 동조하는 농민중심으로  민족해방 운동을 일으킬 것. 둘째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지지하며 이를 개량하고 촉진시킬 것. 코민테른 고려부가 만든 결의 내용은 임시정부를 혁파하라는 명령이다. 이 대회는 사실상 한국과 중국의 공산화를 위한 전략회의였다.
  • ▲ 1922년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반병률 외대교수의 발굴사진)
    ▲ 1922년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반병률 외대교수의 발굴사진)
    레닌은 한인대표들을 두 차례 만났다. 여운형의 증언이다.
    레닌은 먼저 일본인 대표 가따야마(片山潜)에게 “동지는 조선독립을 위하여 생명을 바쳐 투쟁하겠는가?”라고 묻고, 여운형에게 “동지는 일본의 혁명을 위해 싸울 수 있겠는가‘ 물었다. 두 사람이 "그러겠다“고 대답하자 레닌은 “혁명동지라도 사람인 이상 감정을 초월할 수 없는 일이어서 이해와 양보가 필요하다. 조선인과 일본인이 서로 악수를 하면 양국의 혁명은 무난할 것이다."라고 다짐을 두었다.  
    다음날 중국대표 구추백과 같이 갔을 때 레닌은 손문의 혁명운동을 적극 지원할 것이며 손문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말했다.
    레닌의 지침 요지는 ⓐ민족해방운동을 먼저 하고 ⓑ다음 계급투쟁인데 ⓒ우선 상하이 임시정부를 전면교체 하라는 것, 임정전복 지령이다. (여운형 공판조서, 1929,8,6. 김준엽-김창순, 앞의 책)
  • ▲ 독립군 장수 홍범도.
    ▲ 독립군 장수 홍범도.
    레닌, 홍범도(洪範圖, 1868~1943)에게 군복-권총 선물 
    대회에 참석한 홍범도(전 독립군 지도자)를 트로츠키가 크렘린 궁의 레닌에게 데려갔다.
    레닌은 소련군장교의 군모와 군복, 레닌과 홍범도의 이름 이니시얼을 새긴 권총, 금화 100루블을 선물하며 치하한다. 무엇을? 이른바 ’자유시 참변‘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바로 전해 1921년 6월28일 자유시에선 ‘붉은 군대’가 무장해제와 소련군 강제편입을 거부하는 한인독립군들에게 대포까지 동원하여 무차별 공격을 가했다. 이미 소련의 요구에 순응했던 청산리 전투의 독립군 장수 홍범도는 독립군 집단학살 작전에 공을 세웠다는 것. 그것으로 ‘토사구팽’당한 그는 말년에 고려인 마을의 극장 수위로 지내다가 숨졌다고 한다. 

    ◆김구, ‘레닌 자금’ 독식한 김립을 대낮에 암살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 폐막 직후 1922년 2월 8일 제10회 임시의정원(국회) 개원식이 열렸다. 방청석에 앉아있는 김구는 무언가 다른 연락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그 시간 상하이 구시가지 거리에서 콩 볶는 총성이 울렸다. 대낮에 벌어진 암살, 즉사한 사람은 총알 일곱 발을 맞은 김립이다. 중국여인과 거처를 옮겨 다니던 김립은 경무국장 김구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다. 김구는 레닌자금을 독식하는 임정 배신자를 죽였다고 한다. 하수인 2명은 황해도 안악 고향출신 청년들이다. 김립과 동행중에 총알 세례를 받은 고려공산당 핵심 김철수(金錣洙, 1893~1986)는 재빨리 도망쳐 은행에 달려가, 남아있던 레닌 자금을 다른 은행으로 옮겼다.

  • ▲ 모스크바 크렘린 성벽앞 레닌묘(자료사진)
    ▲ 모스크바 크렘린 성벽앞 레닌묘(자료사진)
    ◆레닌의 지령 ‘통일전선 국민대표회의’ 끝내 실패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여운형 등은 레닌의 명령에 따라 상하이 ‘국민대표회의‘를 서두른다.
    자금은 한형권이 숨겼던 레닌자금 20만루블을 가져와서 물 쓰듯 풀어놓아 동조자를 모았다. 
    여운형 등 고려공산당의 ’임정 제도변경‘에 동조한 안창호가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발표하자 태풍이 몰아쳤다. 상하이 임정 옹호파는 물론, 본국에서 비판이 폭발하고 하와이와 미주 교민들도 들고 일어났다. 3.1운동과 한성임지정부 수립을 주도하였던 국내 이상재를 비롯, 최남선, 오세창, 한용운, 강매 등은 ’경고 해외각단체서‘란 성명을 배포, 그간의 임정 비리를 규탄하며 4개 실행과제를 촉구한다. 첫째 지방 파벌을 배제하라. 둘째 불법 불의한 무리를 징벌하라. 셋째 사사로운 단체들을 해산하라. 넷째 임정을 옹호하고 망동을 일삼지 말라 등이다. 이 성명은 각처에 배송된다. 이승만도 ’대통령의 선언‘을 발표하고 공산당의 세력과 금력을 동원한 국민대표회의가 3.1정신 정부를 전복하려 한다고 비판한다. 이승만은 임정옹호세력에 ”공산당을 조심하라. 함부로 혼잡하지 말라’는 경고를 보냈다.

    1923년 1월3일, 진통을 거듭하던 국민대표회의가 마침내 미국인 침례교회에서 개막되었다.
    고려공산당 이동휘와 코민테른 극동국 보이친스키가 축전을 보냈으나, 회의는 ‘창조파’와 ‘개조파’로 격한 대결이 일어났다. “임정을 없애고 소비에트 정부 만들자”(창조파). ‘이승만 대통령을 축출하고 부분 개편하자“(개조파). 안창호는 ’개조파‘의 리더이다. 
    레닌의 명령을 실현하려는 고려공산당도 쪼개졌다. 이른바 상하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헤게모니 싸움, 여운형의 이르쿠츠크파는 새로운 독립정부 국호를 ’한‘(韓)으로 정하고 연호도 바꾼다. 
    지켜보던 내무총장 김구가 나섰다. ”이것은 대한민국에 대한 모반“이라며 국민대표회의 해산명령을 내렸다. 반년 동안 극심한 혼란을 일으킨 레닌의 임정전복 작업은 일단 제동이 걸렸다.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은 만주로 떠났다. 상하이 고려공산당은 일당독주에 돌입한다.
    임시의정원(국회)에선 개조파 의원들이 ’이승만 탄핵안‘과 개헌안을 내놓고 임정옹호파와 싸우고 있었다.
  • ▲ 이승만 임정대통령(왼쪽부터)이 1923년 비판한 공산주의 원조들.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
    ▲ 이승만 임정대통령(왼쪽부터)이 1923년 비판한 공산주의 원조들.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
    ■하와이 1921~1923■

    상하이를 떠나 하와이로 돌아 온 이승만은 미국 신문 인터뷰를 통해 ”비상한 세력으로 확산되는 사회주의 운동 때문에 한국의 독립운동이 위기에 직면했다“고 털어놓는다. 이어 ”일본의 팽창과 동양지배를 이대로 방치한다면 필연적으로 두 번 째 세계대전이 일어날 것“이라고 단언했다.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기 10년 전,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하기 20년 전에 ’미일전쟁‘을 시사하는 경고성 전망이었다. 

    ◆’동지회‘ 결성...”우리 정부를 목숨 걸고 수호하자“

    1년전 이승만이 상하이에 부임했을 때 하와이에는 ’교민단‘이 출범했다. 대통령 이승만이 ’국무원령‘ 제2호로 재외동포로 하여금 지역별로 거류민단을 만들어 임시정부의 지휘 감독을 받도록 한 것. 말할 것도 없이 그 같은 조처는 안창호의 대한인국민회가 중남미 동포들까지 장악하여 사사건건 독주하였기에 교민단체들을 임정 직속으로 바꾸어 버린 이승만이다. 즉 ’국민을 가진 정부 체제‘를 갖추어 국제적 지위를 높여보려는 작업의 일환이었다. 

    그 이승만이 이번엔 ’믿을 수 있는 지지자‘들을 모아 ’대한인동지회‘를 결성하였다. 
    1921년 7월20일 하와이 교민당장 민찬호와 상하이 측근 안현경, 이종관 3명이 임원으로 출범한 동지회의 설립 이유를 이승만은 이렇게 말한다.
    ”백성이 보호하면 정부가 있고 백성이 보호하지 아니하면 정부가 없나니, 이는 10여년 전에 우리 정부를 잃어(한일병탄) 반만년 역사에 수욕을 끼쳤도다...(중략)...남녀 동포는 주저 말고 담대히 나서서 우리 정부를 복종함으로써 완전한 독립을 각국이 승인하도록 만들기를 결심하고 합동단결하기를 촉성하시오.“
    이는 상하이에서 뼈아프게 체험한 이동휘의 고려공산당과 안창호의 흥사단, 북경의 박용만일파의 공격 등에 시달린 끝에 결단한 일이다. 안창호의 흥사단은 서북파 엘리트 중심이었지만 국민국가론자 이승만은 일반 교민 중심이다. 특히 15개항의 동지회 규정은 정부옹호 대동단결, 불충불의한 자들에 상당한 척결, 정부의 위난에 몸과 물질을 다하여 응대할 것 등과 ‘중대한 사건’은 극히 비밀을 지키라고 못 박았다. 사생결단의 결의가 느껴지는 대목들이 상하이에서 벌어지는 좌우 파벌이익 쟁탈전에서 ‘정부 위협’을 얼마나 심각하게 느꼈던지를 짐작케 해준다.
  • ▲ 워싱턴회의에 파견된 대표 이승만 임정대통령과 정한경(왼쪽).(연세대이승만연구원)
    ▲ 워싱턴회의에 파견된 대표 이승만 임정대통령과 정한경(왼쪽).(연세대이승만연구원)
    ◆이승만, 워싱턴회의에 활발한 외교전

    임정 대통령으로서 11월부터 열리는 ‘워싱턴 회의’에 대하여 이승만은 특유의 외교전을 펼치기로 한다. 상하이 임정이나 서재필 등은 이번에도 한국독립문제에 큰 희망을 건 듯 설치는데 이승만에겐 그런 희망보다 ‘외교 선전장’으로 이용할 가치에 비중을 두었다. 
    왜냐하면 국제법 박사 이승만은 이미 파리 강화회의에서 연합국이 보여준 약소민족 독립문제 처리 원칙을 잘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슬며시 사라지고 독일식민지 나눠먹기로 끝낸 연합국들인데, 더구나 ‘군축회의’로 불리는 강대국 세력균형 재조정을 위한 워싱턴 협상 테이블에 한국문제가 오를 자리는 당초에 없는 것이다. 
    문제는 이번에도 한국대표 참석은 거부당할 것인데, 그 화살은 ‘이승만의 무능‘으로 집중될 것이 뻔한 일, 더욱이나 상하이에선 ’이승만 축출‘ 국민대표회의 음모가 한창인 판국이다.
    비록 참석은 못할망정 얼마나 물 좋은 외교선전장인가. 이승만은 다른 독립 운동가들보다 앞서서 최선의 외교전 준비와 활동에 앞장선다.
    예상대로 한국대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승만은 만찬외교를 비롯, 악수외교와 선전물 배포에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특기할 일은 유명한 영국 작가이자 기자 H.G.웰스(Herbert G. Wells, 1866~1946)를 만나 만찬을 함께 하며 세계평화를 위한 세계정부 수립문제, 한국의 독립문제 지원에 공감을 나누면서, 맥켄지에 이어 또 한명의 영국 언론인 동지를 얻은 일이다. 
  • ▲ 1923년 이승만 임정대통령이 공산주의를 비판한 글과 게재된 '태평양잡지' 표지ⓒ뉴데일리DB
    ▲ 1923년 이승만 임정대통령이 공산주의를 비판한 글과 게재된 '태평양잡지' 표지ⓒ뉴데일리DB
    ◆최초의 ’반공‘논문을 발표---<공산당의 당부당>

    상하이의 공산당과 서북파의 ’반정부 집회사태‘를 지켜보며 ”공산당을 배격하라“ 경고를 거듭하던 이승만은 마침내 자신의 독립운동 매체 [태평양잡지](1923년3월호)에 ’반공‘ 논문을 발표한다. 제목은 ‘공산당의 당부당’(當不當), 즉 공산당의 옳고 그른 점을 분석 정리한 글이다. 
    국민대표회의가 한 달을 넘겼을 때 공표한 이 글은 공산주의에 휩쓸린 맹목의 독립 운동가들에게 ”공산주의가 무엇인가“ 깨우쳐주려는 목적임은 물론, 미주와 본국 등 한국인들을 위한 교육목적이 크다. 왜냐하면 이런 글이 한 두 번이 아니라 제목이 다른 관련 칼럼들이 연재되어 있고, 해마다 공산주의 비판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잡지들이 결락본이 많아 확인할 순 없지만, 1924년 7월호 ‘사회·공산주의에 대하여’는 국내 동아일보에 보내 게재한 것이며, 1925년 7월호에서도 ‘공산주의’ 제목의 분석비판 글을 발표했다 (김현태 [이승만 박사의 반공정신과 대한민국 건국] 비봉출판사,2016)
    언제나 한글전용으로 이승만이 직접 쓰고 편집하는 이 잡지는 하와이, 미국본토, 쿠바, 멕시코, 중국 상하이, 북경, 남경, 만주와 본국에도 밀송되었고 영국과 독일까지 발송하였다.. 

    청년시절부터 언론인 계몽운동가이자 저술가이며 기독교 민주주의 국제정치 국제법 박사 이승만, 임정대통령이 아니었더라도 인류 최악의 전체주의 공산독재의 소굴로 빨려 들어가는 2천만동포를 어찌 방관할 수 있으리오. 

    이승만이 언제 어떤 책으로 마르크스-레닌 이론을 읽었다는 기록은 없다. 기록광이 기록을 남기도 싶지도 않은 이론이다. 하지만 ‘공산당의 당부당’등 일련의 반공 논문은 이승만 특유의 우리말 비유법을 사용, 공산주의자도 난해하다는 공산주의 이론을 너무나 쉬운 우리말 용어로 바꿔 술술 풀어낸 것이다. 그가 천재라지만 공산주의를 완벽히 체득, 자기화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마르크스는 1843년 말했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1955년 프랑스 지식인 레이몽 아롱(Raymond Aron)이 말했다. “공산주의는 지식인의 아편”이라고.
    아롱보다 32년전 이승만이 말했다. ”공산주의는 자유의 적, 인간의 적이다”
    이리하여 ‘공산당의 당부당’은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비판 논문이다.
    지금도 영어로 번역하여 세계가 읽어야할 글, 아니 자유대한민국 각급 학교와 국민이 기본 교양으로 단숨에 읽어야할 ‘알기 쉬운 공산주의’ 고급 교과서이다. 
    선각자 이승만은 레닌의 공산혁명 6년째에 공산주의 ‘멸망’을 예언하였다. 66년후 소련은 사라진다. 여기 전문을 게재한다. 

    ★공산당의 당부당★  
    이승만  (태평양잡지, 1923년 3월호)

    "공산당 주의가 이 20세기에 나라마다 사회마다 전파되지 않은 곳이 없어, 혹은 공산당이나 사회당이나 무정부당이라는 이름으로 극렬하게 활동하기도 하고, 혹은 자유권이나 평등권의 이름으로 부지 중 전파되기도 하여, 전제 압박하는 나라나 공화·자유하는 백성도 그 풍조의 영향을 받지 않은 자가 없도다.

    공산당 주의도 여러 내용이 있어서 그 의사가 다소간 서로 같지 아니하나 보통 공산당을 합하여 논의해보면, 그 주의가 오늘 인류사회에 합당한 것도 있고 합당치 않은 것도 있으므로, 이 두 가지를 비교하여 이 글의 제목을 ‘당부당’(當不當, 옳고 그름)이라 하였다. 우선 그 합당한 것을 먼저 말하고자 한다.

    인민의 평등주의다. 옛적에는 사람을 반상(班常)으로 구별하여 반(班)은 귀(貴)하고 상(常)은 천(賤)하므로 반은 의례히 부(富)하고 상은 의례히 빈(貧)하여 서로 바뀌지 않도록 구분하여 방한(防閑: 못하게 하는 범위)을 정하여 놓고, 영영 이와 같이 만들어서, 양반의 피를 타고난 자는 병신·천치라도 윗사람으로 모든 상놈을 다 부리게 하고, 피를 잘못 타고난 자는 영웅·준걸의 재질을 타고났을지라도 하천한 대우를 면치 못하였으며, 또한 노예를 만들어 한번 남에게 종으로 팔린 자는 대대로 남의 종으로 팔려 다니며 우마(牛馬)와 같은 대우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여러 천년을 살아오다가 다행히 프랑스혁명과 미국의 공화(共和)제 이후로 이 사상이 비로소 변하여 반상의 구별을 혁파하고 노예의 매매를 법률로 금하였으니, 이것은 서양문명의 사상이 발전된 결과로서 만세 인류의 무궁한 행복을 가져오게 하였도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반상의 구별 대신에 빈부의 구별이 스스로 생겨서, 재산 가진 자는 이전 양반 노릇을 여전히 하며 재물 없는 자는 이전 상놈 노릇을 감심(甘心: 달게 여김)하게 되었다. 그런즉 반상의 명칭은 없어졌으나 반상의 등분[차별]은 여전히 있어서 고금에 다를 것이 별로 없도다.

    하물며 노예로 말하면 법률로 금하여 사람을 돈으로 매매는 못하게 하였으나, 월급이라 하는 보수 명의로 사람을 사다가 노예같이 부리기는 마찬가지라. 부자는 일 아니하고 가난한 자의 노동으로 먹고살며 인간행락(人間行樂)의 모든 호강 다 하면서, 노동자가 버는 것으로 부자 위에 더 부자가 되려고 월급과 삯전을 점점 깎아서 가난한 자는 호구지계(糊口之計)를 잘못하고 늙어 죽도록 땀 흘리며 노력하여도 남의 종질로 뼈가 늘어나도록 사역하다가 말 따름이요, 그 후손이 태어나더라도 또 그렇게 살 뿐이니, 이 어찌 노예 생활과 다르다 하겠는가. 그러므로 공산당의 평등주의가 이것을 없이하여 다 균평하게 하자 함이니, 어떻게 이것을 균평히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는 또 다른 문제이거니와, 평등을 만들자는 주의 자체는 옳은 일이니 이는 적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공산당 주의 중 부당한 것을 논의하면 다음과 같다.

    ❶ 첫째, 재산을 나누어 가지자 함이니, 모든 사람의 재산을 토지 건축 등 모든 부동산까지 합하여 평등하게 나누어 차지하게 하자 함이니 이것은 가난한 사람은 물론 환영하겠지만 토지를 나누어 가진 후 게으른 사람들이 농사를 아니 하든지 일을 아니 하든지 하여 토지를 다 버리게 되면 어찌하겠는가. 부지런한 사람들이 부지런히 일하여 게으른 가난장이를 먹여야 할 것이요, 가난장이는 차차 숫자가 늘어서 장차는 저마다 일 아니 하고 얻어먹으려는 자가 나라에 가득할 것이다.

    ➋ 둘째, 자본가를 없이 하자 함이니, 모든 부자의 돈을 합하여 공동으로 나누어 가지고 살게 하면, 부자가 양반 노릇하는 폐단은 막을 수 있겠지만 재정가[기업인]들의 경쟁이 없어지면 상업과 공업이 발달하기 어려우리니, 사람의 지혜가 막히고 모든 기기미묘한 기계와 연장이 다 스스로 폐기되어 지금 이용후생 하는 모든 물건이 다 진보되지 못하며, 물질적 개명이 중지될지라. 자본을 폐기하기는 어려우리니 새 법률을 제정하여 노동과 평등한 세력을 가지게 하는 것이 나을 터이다.

    ➌ 셋째, 지식계급을 없이하자 함이니, 모든 인민의 보통 상식 정도를 높여서 지금의 학식으로 양반 노릇하는 사람들과 대등하게 되고자 하는 것은 가능하거니와, 지식계급을 없이 하자 함은 불가하다.

    ➍ 넷째, 종교단체를 혁파하자 함이라. 자고로 종교단체가 공고히 조직되어 그 안에 인류 계급도 있고, 토지 소유권도 많으며, 그 속에서 인민 압제와 학대를 많이 하였나니, 모든 구교(카톨릭) 숭배하던 나라에서는 이 폐해를 다 알지라. 그러나 지금 새 교회(개신교)의 제도는 이런 폐단이 없고 겸하여 평등 자유의 사상이 본래 열교확장(裂敎擴張) 되는 중에서 발전된 것이라. 교회 조직을 없이 하는 날은 인류덕의(人類德義) 상 손해가 지대할 것이다.

    ➎ 다섯째, 정부도 없고 군사도 없으며 국가사상도 다 없이 한다 함이라. 이에 대하여는 공산당 속에 서도 이견이 많을뿐더러, 지금 공산당을 주장한다는 러시아만 보아도 정부와 지도자와 군사가 없이는 부지할 수 없는 사정을 자기들도 다 아는 바이다. 다 설명을 요구치 않거니와 설령 세상이 다 공산당이 되며, 동서양 각국이 다 국가를 없이하여 세계적 백성을 이루며, 군사를 없이 하고 총과 창을 녹여서 호미와 보습을 만들지라도, 우리 한인은 일심단결로 국가를 먼저 회복하여 세계에 당당하게 자유국을 만들어 놓고 군사를 길러서 우리 적국의 군함이 부산 항구에 그림자도 보이지 못하게 만든 후에야, 국가주의를 없이할 문제라도 생각하지, 그 전에는 설령 국가주의를 버려서 우리 이천만이 모두 다 밀리어네어(Millionare 백만장자)가 된다 할지라도 우리는 원치 아니할지라.

    우리 한족에게 제일 급하고 제일 긴하고 제일 큰 것은 광복사업이라. 공산주의가 이 일을 도울 수 있으면 다 공산당 되기를 지체치 않으려니와 만일 이 일에 방해될 것 같으면 우리는 결코 찬성할 수 없노라.“ (괄호안은 필자)

    ▶ ‘평민시대’ (태평양잡지 1924년 7월호)
    “....설령 공산주의가 일후에 실시된다 할지라도 우리의 오늘 구할 것은 공화주의라.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는 한 민족 간에 충돌이 없이 될 수 없으며, 우리가 우리끼리 충돌날 것을 먼저 시작하는 것은 아무 것도 다 못하게 할 위험이 있은 즉, 남들이 먼저 경험하도록 버려두고, 우리는 먼저 철저한 공화정신으로 다 한 덩어리가 되어 우리 목적을 이루는 것이 차서를 지키는 도리라....”

    ▶‘사회 공산주의에 대하야’ (태평양잡지 1924년 7월호)
    “....남이 좋아하니 우리도 좋아하자 하고 덮어놓고 따라 나가다가 몇사람이라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일시 풍조에 파동이 되면 그 해가 전체에 미찰까 염려함이라.....우리가 전력하여 해결해야 할 문제는 우리 민족의 생존책이며 그 원칙을 방해하는 것은 곧 민족의 자살이라....세계주의(국제공산주의)가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보다 크고 높다하나 실상은 저희 이익과 세력 확장을 위하야 빈 명사를 이용하는 것 뿐이라. 우리는 헛되이 속지 말 것이다.”

    ▶‘공산주의’  (태평양잡지, 1925년 7월호) <공산주의 이론과 선전내용 비판>
    “....우리는 타국과 타민족의 속박을 먼저 면하야 남과 같이 잘 살게 만들어놓은 후에 우리 인민의 평등을 보호하자 하는 것이 가한지라....남의 노예된 백성이 저희끼리 평등성을 가진다 한들 무엇이 상쾌하리오. 그러므로 다 합동하야 우리의 공동 자유를 먼저 회복한 후에 의론해도 늦지 않을지라...”
    “...내몸을 없이하야 원수를 놀래는 것이 어찌 원수 갚는 일이라 하리오.....독립은 어찌되든지 다른 주의(공산수의)가 더 높고 더 넓으니 그것을 휘하자 하는데는 결코 찬성할 수 없을자러,...따라서 광복운동이 우리의 생명운동이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