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하이 통합 임시정부는 ‘좌우합작 정부’

    임시정부 이래 대한민국의 모든 비극은 레닌의 1917년 ‘10월혁명’에서 시작되었다. 
    1919년 9월 통합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1운동이후 난립한 임시정부들 가운데 주요한 3개를 묶어 만든 것, 안창호가 주도한 통합과정에서 시베리아의 ‘한인사회당’ 설립자 이동휘(誠齋 李東輝,1872~1935)를 끌어들이면서 ‘좌우합작’ 정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미국식 자유민주공화주의자 이승만, 2인자 국무총리는 소련 레닌의 ‘특별지원’을 받는 이동휘를 앉혔으니 출발부터 정면충돌이다.

    ★3개 임정=대한국민의회(3.17), 상하이 임시정부(4.11), 한성임시정부(4.23)★
  • 1917년 러시아 공산화 쿠데타 직후 연설하는  레닌(자료사진).
    ▲ 1917년 러시아 공산화 쿠데타 직후 연설하는 레닌(자료사진).
    레닌은 3.1운동 다음날 1919년 3월2일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국제공산당)을 설립,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항하여 약소민족들을 소련 공산당 중앙집권체제로 일원화하는 ‘국제공산당 기구’를 출범시켰고, 이동휘의 한인사회당은 4월 거기에 가입했다. 

    이동휘는 그러나 정작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대한 지식은 거의 모른 채 ”소련의 힘을 빌어 군사를 키워서 왜놈을 물리치자“는 무장투쟁에 전념하는 열혈 독립원동가였다고 한다. 상하이에서 함께 ‘고려공산당’을 만든 몽양 여운형(夢陽 呂運亨,1886~1947)의 증언이다. (김준엽-김창순 공저 [한국공산주의운동사]⓵, 청계연구소,1986)

    사실 당시 한국의 독립 운동가들은 거의 비슷하였다. 레닌 등장 훨씬 전부터 만주와 중국, 연해주와 시베리아로 망명하여 이합지산을 거듭하던 때, 게다가 일본군에 쫓겨 소련 땅으로 몰려든 고립무원의 한인 무장대들이 선택할 길이 어디겠는가. 코민테른의 그물에 다 걸렸다.

    대륙에 붙은 한반도 지정학(地政學)의 희비극 드라마, 자유민주 독립운동가들은 태평양 건너 하와이와 미국에 있었다. 이들까지 모두 대륙으로 갔다면 과연 오늘의 대한민국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그래서 건국대통령 이승만을 일컬어 “대륙문명권에서 해양문명권으로 한민족을 끌어내 선진화시킨 선각자”란 평가가 나오는 것이다. 

    그러면 “공산주의자도 못 되는” 이동휘가 왜 이승만을 축출해서 임시정부를 소비에트 공산체제로 뒤집으려 했던가. 그의 인물과 행적을 요약해 살펴보자.
  • 무장투쟁 독립운동가 이동휘.(자료사진)
    ▲ 무장투쟁 독립운동가 이동휘.(자료사진)
    ◆고종의 총애 받은 ‘왕당파’...‘무산계급의 왕’ 레닌 만나다

    20대 청년 이승만은 배재학당에서 미국을 발견하고 “자유의 유토피아” 미국 같은 나라 만들자며 독립운동을 시작한다. 중간목표로 입헌군주제 깃발을 들고 고종과 싸우다가 반역자로 몰려 투옥, 6년간 고종의 탄압을 받은 뒤에 미국 유학까지 마쳐 확고한 ‘전체주의 반대’ 자유민주형 지식인이 되었다.

    반면에 이동휘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이동휘 약력★
    -1873 함경남도 단천 출생. 군청 통인, 
    -1891 한성무관학교 졸업. 궁정 진위대 근위장교(육군 참령), 강화도 진위대장, 
    -1905 을사 조약후 반일운동, 대한자강회 강화 지부장
    -1907 군대해산때 봉기 배후자로 감옥살이. 안창호 등과 비밀결사 ‘신민회’ 조직.
    -1911 일제의 ‘105인 사건’때 피체, 인천 무의도 유배.
    –1913 간도로 망명.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 
    -1914 이상설 이동녕 등과 ‘대한광복군 정부’ 조직, 부통령.
    -1917 레닌 혁명후 ‘볼셰비키와 연대한 항일무장투쟁’ 주장.
    -1918 볼셰비키 극동인민위원회 의장 지원받아 ‘한인사회당’ 창당.

    위에 보듯이 10대 시절부터 무관교육을 받은 이동휘는 왕실을 보위하는 청년장교로 출세를 거듭하며 고종의 ‘신임과 총애’를 한 몸에 받은 ‘왕당파’가 되었다. 더구나 망국후의 반일운동은 당시 민족주의자들이 대부분 ‘근왕주의자’로서 의병을 일으키고 항일투쟁을 벌인 것과 같다. 여기서 그가 만주로 망명, 사관학교를 세우며 ‘광복군정부‘까지 조직, 독립군활동을 지원하다가 앞장서서 소련의 “볼셰비키와 연대”하던 시기의 국제상황을 둘러봐야한다.

    세계1차대전중 감행한 레닌의 폭력혁명은 러시아 짜르체제를 무너트린 ‘2월혁명’의 산물 케렌스키 공화정을 타도한 것이었다. 혁명성공과 동시에 ‘휴전’을 제의하는 한편, 교전국 독일-오스트리아는 물론 연합국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 인민들에게 ‘반전투쟁’과 ‘공산혁명’을 전개하라고 선언, 본격적인 선동전을 펼쳤다. 
    이에 격분한 연합국들이 레닌 정권을 응징하자며 1918년 군대를 동원한다. 이른바 적군(赤軍)-백군(白軍) 전투이야기, 백군중 맨 먼저 행동에 나선 것은 역시 ‘러일전쟁’의 승리자 일본이었다. 해군함대와 육군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출병하여 중국과 재빨리 손잡아 중국군까지 동원하였고, 출병한 김에 만주지역 한인 독립군들을 제거하는 ‘소탕작전’을 벌인다. 미군도 8월에 그곳에 상륙하지만 그때의 미군은 오늘의 미군이 아니다. 같은 연합국 일본의 한인 학살은 관심 밖이었다.  

    레닌은 다급하였지만 전술적이다. 연합국과 상의도 없이 독일과 일방적 휴전을 맺고 우크라이나까지 영토를 내준다. 백군들과는 ‘분산과 집중’ 전술로 대응하면서 시베리아 지역의 무장자원을 총동원하는데, 일본군의 무차별 만행에 쫓겨오는 만주지역 한인독립군 무장부대를 방패막이로 이용하였다. 이때 조직을 잃은 한인 병력을 소련군에 편입시키면서 정당조직으로 ‘한인사회당’, 곧 한인 공산당을 만들어준 것이었다. 
    즉, 레닌 혁명정권이 시베리아 전역에 지방 공산당을 조직해갈 때, 이르쿠츠크 공산당에 ‘한인부’를 설치한 것이 1월이고, 6월 하바롭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이 결성된다. 
    한국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정당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의 위원장은 이동휘, 주요 인물은 김립(金立), 유동열(柳東說), 오성묵(吳成默), 이인섭(李仁燮), 김 알렉산드라 및 오 와실리 부부등이다.

    이동휘가 이승만을 배척하며 비난한 말이 남아있는데 흥미롭다.
    “이승만은 아직 사회주의 소양이 무(無)한 즉, 식견이 미국의 정치제도를 불유(不踰)하야 진정의 평등 자유의 공리는 불오(不悟)할 듯 하다.” 풀이하면 ‘이승만은 미국의 정치제도를 넘지 못해 사회주의에 무식하므로 진짜 자유평등을 모를 것’이란 말이다. (장붕이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1920,8,21 [이승만 동문서한집] 연세대 출판부, 2009)

    볼셰비키 선전 팀과 교류하며 사회주의(소련 공산주의)를 익힌 이동휘는 새롭게 눈 뜬 자유평등에 감복하여 미국의 자유평등은 알려고 하지도 않고 환호하였던 모양이다. 말하자면 신식교육은 받은 적 없이 중년까지 황제를 모시던 무관 근왕주의자에게는 ’무산계급의 독재자‘ 레닌이 자유평등의 왕으로 비쳤던 지도 모른다.
    그것은 마치 23세 이승만이 배재학당에서 미국의 자유평등을 발견하고 매료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발등의 불' 무장투쟁을 도와줄 든든한 협력자 소련 볼셰비키를 만난 이동휘는 별다른 저항감 없이 공산정권과 손을 잡았다. ’왕정복고‘ 독립투쟁의 목표가 이젠 ’사회주의 자유평등 독립국가‘로 바뀐 셈이다.
  • 상하이 임시정부때부터 6.25침략까지 대한민국 공산화에 총력을 기울인 소련 독재자 스탈린.(자료사진)
    ▲ 상하이 임시정부때부터 6.25침략까지 대한민국 공산화에 총력을 기울인 소련 독재자 스탈린.(자료사진)
    ◆영토 야심가 스탈린은 ’민족 통일전선‘ 지휘자

    미국의 윌슨보다 먼저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했던 레닌과 볼셰비키 민족문제 책임자 스탈린에게 ’민족‘이란 무엇일까. 한마디로 “자본주의 붕괴와 함께 소멸되는 사회주의 혁명의 무기”이다.  따라서 한민족의 사회주의 이념과 체제를 완성시키는 과정에서만 필요하며 그 체제 수호의 범위 안에서만 유효하게 사용되도록 분야마다 정교한 정책을 짰다. 그 전략 전술적 이름이 ‘민족통일전선’이요, 약칭 ‘통일전선’이다.

    “만약 유럽민중이 궐기해서 제국주의를 섬멸해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섬멸되고 말 것”
    (트로츠키, 1917.11.8.일 혁명 다음날 연설)
    “1년 뒤에 우리는 유럽에 공산주의가 있었다는 사실을 망각할 것이다. 그때까지 전 유럽이 공산주의 일색이 될 테니까.” (지노비에프, 코민테른 초대 집행위원장,1919.3.2.)

    민족문제위원장 스탈린은 ‘빛은 동방으로부터’라는 논문에서 우랄산맥 동쪽 여러 민족을 볼셰비키화를 통하여 제정러시아 시대의 영토를 부활시키고 있다고 큰 소리쳤다.
    “...이들 변경지방은 중앙 러시아의 군사적 경제적 원조없이는 독립적 존재를 수호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사정에다 ‘공산주의 민족강령’ 명제를 가미한 것이 공산주의 러시아의 민족정책 성격 규정이다...” ([스탈린 전집] 러시아공산주의 민족정책, 일본 도쿄 오오츠키 서점,1952.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앞의 책)
    그 변경지방은 1차적으로 중앙아시아이고 다음은 몽고, 중국이며, 조선왕 고종이 아관파천 하였던 ‘고려반도’ 역시 예외가 아닐 터이다.
    그 단초가 바로 앞에서 본 ‘한인사회당’의 등장이고 그것은 한민족을 끌어안는 볼셰비키 통일전선의 첫 작품이었다. 
  • 도산 안창호와 성재 이동휘(오른쪽).
    ▲ 도산 안창호와 성재 이동휘(오른쪽).
    ◆‘서북파’의 두 지도자 안창호와 이동휘

    지리(地理)의 힘은 인간의 삶과 역사의 운명을 결정하는 1차적 요소이다. 파란만장한 한반도의 역정이 그것이다. 
    특히 고려시대 이래 표면화한 서북파와 기호파의 대결은 현대 대한민국까지 이어지는 ‘지역감정’의 참극을 빚어낸다.
    서북(西北)이란 관서(關西: 평안도)와 관북(關北:함경도)의 합성어로 그 연합체가 서북파, 기호파(畿湖派:경기, 충청, 황해)와 오랜 세월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 되었다. 신채호(丹齋 申采浩, 1880~1936)의 지적대로 고려 인종때 일어난 ‘묘청의 난‘(1135)이 갈림길이다. 

    서북파 안창호는 평안남도 강서 출신, 이동휘는 함경남도 단천 출신, 두 사람은 독립운동의 ’언론파‘와 ’무장파‘의 양대 기둥이다. 
    안창호가 연해주로 사람을 보내 레닌을 추종하는 이동휘를 불러 임시정부에 참여시키려는 근저에 지역감정은 조금도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조선왕조 500년은 유별난 한국적 지역감정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색당파가 그것이고 성리학 학파들이 그러하다. 국적 일본을 물리치고 독립하려는 상하이 임시정부 역시 파벌싸움이 잠잘 날이 없었던 까닭이다. 그 중심은 지역감정이 먼저였다.
  • 구한말 최고의 근대적 지식인 가운데 한사람 좌옹 윤치호(1865~1945). 왼쪽은 윤치호가 지은 애국가 친필본. 오른쪽은 영문일기.(자료사진 모음).
    ▲ 구한말 최고의 근대적 지식인 가운데 한사람 좌옹 윤치호(1865~1945). 왼쪽은 윤치호가 지은 애국가 친필본. 오른쪽은 영문일기.(자료사진 모음).
    ★윤치호 일기---안창호가 왜?★

    “안창호씨는 서북인으로 기호인을 싫어한다. 기호인의 노력으로 독립을 얻는다면 차라리 독립되지 않는 편이 낫다고 한다는데,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윤치호 일기] 1920. 8.30)

    “하와이, 미국, 시베리아, 만주, 상해의 조선 사람들이 서북파와 기호파로 갈려있다. 서북파의 지도자 안창호는 먼저 기호파를 제거한 다음에 독립해야 한다고 하는데,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윤치호 일기] 1931.1.8.)

    “파벌은 민족최대의 병폐다. 안창호가 이끄는 서북파는 기호파을 미워한다. 안창호 같은 지도자가 왜 난국에 빠진 민족의 파벌을 조장하여 화해 불가하도록 적개심을 갖게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윤치호 일기] 1931.4.17.)

    “안창호가 말하기를. 일본은 불과 몇십년 동안 적이지만 기호인은 500년 동안 우리의 적이므로 기호인을 먼저 척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데, 믿을 수가 없다....신흥우와 여운형이 서북파에 대항하는 단체를 조직하자는 것을 만류했다.” ([윤치호 일기] 1933.10.4.)

    “심사숙고 끝에 여운형에게 말했다. ’서북인은 오랫동안 억압받아왔다. 그들은 신분상 이질감 없이 응집력이 있으며 지도자가 많다. 흥사단의 안창호 같은 지도자를 배출시켰다. 일본인보다 기호파를 더 미워하기 때문에 일본당국은 이를 이용하여 분열을 조장할 것이다.”([윤치호 일기] 1933.10.6.)

    “중앙호텔로 안창호씨를 찾아가 단독 면담하다. 기호파를 비난했느냐고 물었다. 안창호는 자기가 조선 사람들에게 지역감정을 부추기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말했다. 그의 말이 진실이라면 오히려 이승만 쪽에서 모함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안창호는 매우 말을 잘하는 이야기꾼이다.”([윤치호 일기] 1935. 3.24)

    여기까지 [윤치호 일기]를 장황하게 인용한 것은 안창호 발언의 진위와 관계없이 당시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뒤엉킨 지역감정이 얼마나 완고한 고질이었는지를, 그리고 이승만과 안창호 양파의 뿌리깊은 경쟁의식을 보여주고자 함에서다.


     
  • ◆“임시 정부는 '한인사회당'의 정부”

    모든 혁명전술이 그렇듯이 스탈린의 ‘민족통일전선’에서도 ‘혈연, 지연, 학연’ 등등 계급투쟁에 필수적인 에너지 분노와 증오를 극대화시킬 생산요소를 총동원한다. 레닌의 ‘통일전선’ 원칙을 스탈린이 실천적으로 구체화한 것, 영토적 야심가는 “독립을 보장해 주겠다”며 현장 중심 입체작전을 펼쳐 단기간내 대박을 터트린다.
    한반도의 경우 윤치호는 일본의 분열공작을 걱정했지만, 그보다 훨씬 전에 스탈린이 정교한 한인정책에서 국내외 한인들에 내재된 갈등요소들을 충분히 활용했음은 물으나 마나다. 
    이동휘에게 한인사회당을 만들어주고 그 지도부를 대한민국 임시정부 에 투입함으로써 제2의 통일전선을 꾸리는데 성공한 ‘스탈린의 시나리오’였다. 
    실제로 이동휘는 얼마 뒤 “임시정부는 한인사회당의 정부”라며 레닌으로부터 거액의 공작금을 받는다. 이 이야기는 다음 장에서 보자.

    안창호가 불렀을 때 이동휘는 처음엔 거절했다고 한다. 이승만 등의 국제연맹위임통치 청원서를 들어 ‘이완용 같은 매국노는 싫다’는 이유였다는데, 김립 등 측근들과 소련 코민테른 지원자의 설득에 응하여 상하이로 출발했다. 그리고 9월 11일 통합 임정이 출범한다.
    그때부터 초대 임정대통령 이승만이 상하이에 오기까지 1년 남짓, 그동안 국무총리 이동휘는 상하이에서 코민테른 지원 속에 '고려공산당'을 조직하느라 분주하다.
    이제 미국파와 소련파, 기호파와 서북파의 리더들이 합류한 임시정부는 무슨 활극을 보여주려나.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