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19년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선출된 44세 이승만.ⓒ연세대이승만연구원
    ▲ 1919년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선출된 44세 이승만.ⓒ연세대이승만연구원
    여기서 1919년을 조명한다. 이 해는 3.1운동이 일어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이승만이 임정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5천년 민족사 최초의 자유민주공화국이 탄생을 준비한 역사, 그리고 이승만이 최초의 자유 민주주의 지도자로서 임정을 공산화하려는 소련 레닌과 싸우며 세계최초로 ‘반공주의’를 정립하는 계기가 된 해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국제정치-국제법 박사 이승만이 격동하는 세계 정세를 꿰뚫어 전체주의와 대결하며 한국의 건국역사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며, 그것은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물론, 세계사에서 보기 드문 글로벌 지도자(Global Leadership)의 면모를 확립한 기간인 까닭이다. 
  • ▲ 외교독립운동의 동지--40대 이승만과 60대 마사리크. 두 사람은 한국과 체코슬로바키아의 '건국의 아버지'가 된다.(자료사진)
    ▲ 외교독립운동의 동지--40대 이승만과 60대 마사리크. 두 사람은 한국과 체코슬로바키아의 '건국의 아버지'가 된다.(자료사진)
    ◆체코의 마사리크와 협력–‘외교독립운동’의 성공사례

    해가 바뀌고 파리에선 연합국 강화회의가 열리는데도 서울에선 ‘만세운동’ 소식이 없다.
    1919년 1월 이승만은 하와이 교민들과 대한인국민회(회장 안창호)가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라며 대표로 선출하자 미국 본토로 떠난다. 
    이승만은 미국무장관 서리 프랭크 폴크(Frank L. Polk)에게 파리행 여행증 발급을 신청한다. 미국적을 얻지 않았던 이승만은 무국적자이므로 미국을 떠날 때마다 여행증을 발급받아야 하는 불편을 감수한다. 이것은 서재필, 안창호, 김구와 본질이 다른 점이다. 여행증 발급신청과 동시에 이승만은 백악관에 윌슨 대통령 면담도 신청하였다.

    이승만은 미국 내서 독립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한다. 시위운동은 그의 ‘외교독립운동’에 필수적인 선전도구의 하나이다. 당시 미국에 망명해있던 아일랜드나 체코 등 약소민족들의 독립운동을 이승만은 잘 알고 있었다. 
    특히 독일식민지 체코의 프라하 대학 교수 토마스 마사리크(Thomas Garrigue Masaryk, 1850~11937)를 워싱턴에서 자주 만나 두 나라 독립문제를 협의하곤 했다. 두 사람의 운동방식이 같았기 때문이었다. (임병직 [임병직 회고록] 여원사, 1964)
    마사리크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부터 1918년 종전까지 미국내서 독립운동을 벌여 불과 4년만에 외교선전투쟁으로 체코와 슬로바키아 두 민족을 통합시키며 독립을 쟁취해내 ‘전설적 국부’가 된다. 미국 내서 마사리크의 독립운동 방식이 바로 이승만이 주창해온 ‘외교 독립운동’이었을 뿐 아니라 ‘건국이념’도 ‘칸트의 영구평화론’ 등 사상적 전략적 공감대가 깊었다. (김학은 [이승만과 마사리크] 북앤피플, 2013).  
    의기투합한 두 거물의 친교는 체코 독립(1919)후 마사리크가 3선 대통령을 지낸 뒤에도 계속된다. 뒷날 1933년 제네바 국제연맹에서 독립운동을 벌인 이승만이 소련 방문을 추진할 때 프라하로 마사리크를 방문하려다가 시간이 안 맞아 포기하기도 했다.(이승만 일기 ‘Log Book of SR’)
  • ▲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보낸 '국무총리' 선출 통보문(왼쪽)과 서울에서 결성된 '한성임시정부'설립과 이승만 집정관총재 선출 선포문.ⓒ뉴데일리DB
    ▲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보낸 '국무총리' 선출 통보문(왼쪽)과 서울에서 결성된 '한성임시정부'설립과 이승만 집정관총재 선출 선포문.ⓒ뉴데일리DB
    ★서재필을 만나 ‘필라델피아(Philadelphia: 약칭 Phila)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말하자 주저하던 서재필도 동의했다. 이승만은 2월 13일 서재필과 공동서명한 ‘대한인총대표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 개최 초청장을 미주, 유럽 등 해외 대표들에게 발송하였다.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국역 이승만 일기] 2015)
    미국 독립의 성지 필라델피아에서 영문표기대로 ‘제1회 한국인 의회’ 형식의 대회를 열어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행진을 벌임으로써 미국 정부와 미국인들에게 건국의지를 과시하자는 것, 3.1운동후 잇따라 생긴 임시정부들보다 한 달 앞서 개시한 미국내 임시정부 설립운동이었던 것이다.

    대회를 준비하는 동안 3월10일 이승만은 한국에서 3.1운동 터졌다는 소식을 듣고 서재필과 기뻐하던 중, 3월21일 ‘대한공화국’이라는 임시정부가 생기고 자신을 ‘국무경’으로 추대하였다는 뉴스를 알게 된다. “홍보가 곧 독립운동”인 이승만은 즉각 워싱턴으로 달려갔다. 미국의 AP통신 기자를 만나 인터뷰, “임시정부 대한공화국 국무경으로서 동양에 처음 되는 예수교 국가를 건설하겠다”고 평소의 지론을 펼쳤다. 기독교 국가 미국에 대한 지원요청 메시지였다.
  • ▲ 1919년4월16일 필라델피아 소재 미국 독립기념관. 1776년 조지 워싱턴이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의자에 앉아 기념사진을 찍은 이승만과 미주 한인대표자들.ⓒ연세대이승만연구원
    ▲ 1919년4월16일 필라델피아 소재 미국 독립기념관. 1776년 조지 워싱턴이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의자에 앉아 기념사진을 찍은 이승만과 미주 한인대표자들.ⓒ연세대이승만연구원
    ◆ ‘임정 초대대통령’탄생...연합국에 ‘정부수립’ 승인요청

    필라델피아 대한인대표자회의는 4월14일 ‘리틀 시어터’(Little Theater)에서 막을 올렸다. 연장자 서재필이 의장을 맡았고, 참석자는 장택상(張澤相) 민규식(閔圭植) 윤병구(尹炳求) 민찬호(閔贊鎬) 정한경(鄭翰景) 임병직(林炳稷) 김현철(金顯哲) 장기영(張基永) 천세헌(千世憲) 유일한(柳一韓) 김현구(金鉉九) 조병옥(趙炳玉) 노디 김(Nodie Kim:한국명 김혜숙) 등 150여명이다. 미국 교민단체 총회장 안창호는 이 대회를 외면하고 연락도 없이 중국 상하이로 떠났다고 이승만은 일기에서 섭섭해한다. 

    16일까지 3일간 영어로 진행된 회의에서 이승만은 ‘미국에 보내는 호소문’ ‘임시정부지지 선언문’ 등 5개결의문의 작성과 통과를 주도하였다. 회의를 마친 참가자들은 리틀 시어터를 나와 미국 독립기념관까지 시가행진을 벌였다. 가랑비가 내리는 거리, 필라델피아 스미스(Thomas B, Smith) 시장이 제공한 기마대와 군악대의 선도를 따르는 행열은 대행 태극기를 앞세우고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KOREA INDEPENDENCE LEAGUE’(한극독립연맹)라고 쓴 대형 플래카드를 들었다. 
    독립기념관에 도착한 일행은 역사적인 방으로 들어갔다. 1776년 7월 4일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이 독립선언서를 서명 선포했던 의자에 이승만이 앉았다. 서재필은 임정대통령이니 거기 앉으라 권하였다. 기념 촬영 뒤에 이승만은 영어로 번역한 ‘3.1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선창하였다. “대한민주국 만세!” “미국 만세!”를 3창한 일행은 ‘자유의 종’을 한사람씩 만지며 독립을 다짐하며 독립기념관을 나왔다.

    ★4월15일 채택된 5개 결의안 가운데 ‘한국인의 목표와 열망’(Aims and Aspiratioms)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이승만이 ‘건국의 종지(宗旨)’라 번역, 홍보했 것처럼, 이것은 대한민국 헌법의 요지였다. 
    ‘정당한 권력은 통치를 받는 자로부터 나온다’를 비롯, ‘미국의 정체를 모방한 정부’ ‘대통령과 내각은 국회에 책임을 진다’ ‘지방의회 설립’ ‘세계만방과 자유통상’ ‘의무 교육’ ‘종교의 자유’ ‘언론 출판의 자유’등 주요항목들은 1948년 제정한 건국헌법의 뼈대가 되었다.
  • ▲ 이승만이 만든 대통령 취임 엽서. 오른쪽은 동포들이 만든 축하카드.ⓒ연세대이승만연구원
    ▲ 이승만이 만든 대통령 취임 엽서. 오른쪽은 동포들이 만든 축하카드.ⓒ연세대이승만연구원
    ◆ 연합국들에 정부수립 통보...한성임시정부 법통 고수

    4월11일 상하이 임시정부에 이어 4월23일 서울에서도 ‘한성임시정부’가 등장한다. 13도 대표자들이 새로운 독립국 지도자로 이승만을 ‘집정관 총재’란 직위에 선출하였다. 
    이 같은 사실은 6월초쯤 서울의 ‘미국인 친구’가 한성정부 서류를 몰래 갖다 줌으로써 이승만이 뒤늦게 처음 알게 된다.(유영익 [이승만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세대 출판부, 2009)
    이때부터 이승만은 몇 번 썼던 ‘임시정부 총리’(Premier for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직함을 ‘대한민국 대통령’(President of the Republic of Korea)으로 바꾼다. 이유는 한반도 전역의 대표성을 지닌 한성임시정부의 집정관총재이며 국가대표로서 미국 대통령과 대등한 직함이어야 세계 외교를 펼치는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

    ★“대통령 직함 쓰지 말라”는 상하이 임시정부 안창호의 반발을 물리친 이승만은 한성정부 체제와 대통령 호칭을 고수, 그해 9월13일 통합 임시정부 체제를 만들게 하고 ‘대통령’ 직함을 관철하여 해방 날까지 이를 고수한다.★
  • ▲ 비 내리는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의회'를 마친 150명 대표들이 태극기를 앞세워 독립행진하는 모습.ⓒ연세대이승만연구원
    ▲ 비 내리는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의회'를 마친 150명 대표들이 태극기를 앞세워 독립행진하는 모습.ⓒ연세대이승만연구원
    이승만은 즉각 ‘대통령’(President) 이름으로 5개 외교문서를 작성 발송한다.
    파리 강화회의 의장 클레망소(Georges Benjamin Clemenceau), 미국대통령 윌슨, 프랑스 대통령 뽀앙까레(Raymond Poincare), 이탈리아 국왕, 영국 조지6세, 중화민국 대통령 쉬스창(徐世昌)에게 “한반도에 완벽한 자율적 민주정부가 탄생"하였으며 자신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는 사실을 통보하고. ‘대한민주국 정부’를 승인해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이승만은 윌슨에게 추가 편지를 보내어 ”1882년 조미수호 조약 제1조에 의거하여 미국은 독립을 원하는 한국 국민을 위해 ’거중조정‘의 의무가 있다’고 강조하였다. 이것은 이승만이 대미외교에서 기회 있을 때마다 미국의 ‘반성과 협력’을 끌어내려 이용한 ‘용미(用美)전략’을 구사한 첫 출발이었다.

    ★이승만과 서재필은 ‘한인친우회’(League of the Friends of Korea) 결성에 나섰다.
    미국 전역에 한국을 지워하는 미국인 조직을 엮는 작업은 5월2일 필라델피아 시티클럽에서 발기, 16일 필라델피아 22명으로 처음 결성된다. 
    6월6일엔 이승만이 워싱턴에서 ‘대한자유공동대회’(Mass Meeting for Korean Freedom)를 열어 워싱턴 한인친우회를 결성한다. 이 회의는  필라델피아 회의와 달리 미국인들이 주동이 되어 미국정부와 의회에 보내는 결의문을 채택한다. 특히 이승만의 ‘외교무기’ 곧 조미조약상 미국의 ‘거중조정’ 의무를 이행하라고 미국인들이 촉구한 것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 ▲ 워싱턴 임정대통령 사무실의 이승만. 오른쪽은 일본천황에게 보낸 '한반도 철수 요구' 영문 통고문.ⓒ뉴데일리DB
    ▲ 워싱턴 임정대통령 사무실의 이승만. 오른쪽은 일본천황에게 보낸 '한반도 철수 요구' 영문 통고문.ⓒ뉴데일리DB
    ◆ 일왕에게 ‘통고문’...“즉시 한반도애서 철수하라“

    파리 강화회의 조약국들에게 ‘정부수립’ 통보를 하기 전에, 이승만은 한성정부의 출범을 알자마자 맨먼저 6울18일 일본 ‘천황’에게 대한민국 대통령의 이름으로 ‘일본 철수 통고문’을 발송하였다.
    국가수반으로서 외교전례에 따라 ‘Your Majesty“로 칭한 영문 문서의 주요대목을 보자.

    ”....본인은 대한민국의 명의와 권위에 입각하여 일본이 한국에서 모든 무장 군대와—--통상적인 외교사절 및 영사들을 제외한---모든 일본 관리 및 민간인 등을 철수시킬 것을 요구한다. 이는 본인에게 부과된 의무이며 한국인의 바람이다. 
    우리는 폐하가 대한민국을 분명히 독립된 주권국가로 인정하고, 아울러 이 취지에 위배되는 모든 조약의 조항들은 무효임을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이 통고문은 비서인 임병직이 직접 일본대사관을 찾아가 전달하도록 했다.
    이승만은 한성정부를 결성하려는 13도 국민대표대회에서 채택된 결의안 ’일본의 통치권 철거와 군사의 철퇴 요구‘등 조항을 알고 있었기에 ’한국 대통령’ 자격으로 이를 일본에 공식 요구한 것이었다. 
  • ▲ 이승만 임정 대통령이 워싱턴에 설립한 '구미위원부' 건물(왼쪽). 초대위원장 김규식(오른쪽)과 찍은 사진.ⓒ뉴데일리DB
    ▲ 이승만 임정 대통령이 워싱턴에 설립한 '구미위원부' 건물(왼쪽). 초대위원장 김규식(오른쪽)과 찍은 사진.ⓒ뉴데일리DB
    ◆’구미위원부‘ 설치...사실상 미국내 임시정부

    파리 강화회의가 6월28일 베르사이유 조약과 함께 폐막, 한국 독립엔 아무 소용없이 끝나자 이승만은 워싱턴에 ’대한민주국 공사관'(Lagation)을 7월17일 개설한다. 
    이미 5월에 ‘집정관 총재 사무실’을 열어 한인친우회 조직확대를 꾀하던 이승만은 8월25일 명칭을 ‘구미 위원부’(The Commission to America and Europe)로 바꾸고 
    초대 위원장에 김규식(金圭植)을 임명한다. 대통령 직권으로 조직을 만든 이승만은 애국성금 등으론 자금이 턱없이 부족하여 공채를 발행하였다. 미국이 임정을 승인하면 1년내 상환하는 조건, 10달러부터 500달러까지 판매한 공채표 자금은 2년간 8만 1,351달러나 되었다. 이것은 당시 각국이 미국서 모은 자금중 가장 큰 금액이었다.

    이 즈음 구미위원부가 벌인 활동은 대단하다. 
    상하이 임정에 매달 1,000 달러씩 송금하고, 서재필의 영문잡지와 파리 황기환(黃玘煥)에게 영문-불문 잡지를 발간케 하였으며 많은 독립관련 영문저서와 출판을 지원한다. 
    무엇보다 미국내 21개 도시와 런던 파리등 유럽에 설치한 ‘한국 친우회’를 적극 후원, 1921년엔 미국에서만 2만5천여명의 회원을 확보하였다.(유영익 [이승만의 생애와 건국비전] 청미디어, 2019)

    대미 정치외교 활동으로는 미국 상-하 의원들에게 한국독립문제를 꾸준히 설득함으로써 마침내 1920년 3월17일 본회의 의제로 상정되었다. ‘한국독립지지 결의안’을 아일랜드 독립지지안과 함께 표결한 결과, 아일랜드안은 가결되고 한국안은 안타깝게도 34대 46으로 부결되고 말았다. 

    이처럼 구미위원부는 각종 외교활동과 더불어 상하이 임시정부를 통괄하며 독립자금을 조달하는 사실상 ‘미국내 임시정부’ 역할을 담당한 기구였다. 뒷날 건국 다음해 1949년 1월 대한민국 주미대사관이 개설될 때까지 존속한다.(유영익 [이승만의 생애와 건국비전] 청미디어,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