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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건국사(16) 30만$ 현상금 사나이, 태평양을 밀항

입력 2023-01-20 17:07 수정 2023-01-30 10:12

▲ 중국인으로 변장한 이승만. 상하이로 밀항할때부터 중국 가서 활동기간중 신변안전을 위해 중국인 옷을 입었다.ⓒ연세대이승만연구원

화물선 밑창 '시체 창고'에 숨은 대통령

짙푸른 하늘에 총총한 별들이 쏟아지는 새벽, 검은 물결이 뱃전을 날름거리는 화물선에 뛰어오른 검은 그림자 두 명이 재빨리 큰 철제 상자 같은 공간에 숨어들었다. 
내통한 선원은 밖에서 문을 잠갔다. 전등도 없는 내부는 깜깜하고 통풍도 안 되는 창고였다. 들키지 않을까 가슴 졸이는 두 사나이는 기다란 나무 궤짝들 위에 누워 눈을 감았다. 
얼마쯤 잤을까...천장 위를 분주히 오가는 게다짝 소리에 눈이 떠졌다. 시간이 지나며 방안이 더워지고 철판 지붕이 태양열에 달궈지는 듯 숨이 막힐 지경에 갈증이 났다. 
아무 일 도 할 수 없는 그들은 궤짝에 누운 채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릴 뿐이다. 
부두와 연결된 건널 판이 거두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뿌웅 뿌우웅 뱃고동 소리, 드디어 출항이다. 두 남자는 조마조마 하면서 태평양 파도에 몸을 맡겼다. 
누군가 문을 열고 나오라 했다. 위층 갑판으로 나갔다. 다음날 아침 8시쯤 망망한 태평양 바다 물결 앞에 카우아이(Kauai) 섬이 보인다. 아뿔사...가슴이 철렁...하와이 서쪽 끝 작은 섬에 우리를 내려놓고 떠나려는 게 아닐까

“이 가방은 뭐야? 망할 중국 놈 밀항자 새끼들” 낯선 선원이 소리 쳤다.
중국인 옷으로 변장한 이승만이 고래를 저었다. 영어를 못 알아듣는 시늉이다.
“그래, 되놈 시체들과 잠잔 기분이 어때? 왜 몰래 탄 거야? 엉?”
맙소사! 침대 삼아 잠잔 궤짝들이 미국서 죽어 고국에 가는 중국인들 시체를 담은 관일 줄이야. 새삼 으스스 했다.
옆에 있던 임병직이 영어가 서투른 체 중얼중얼 대답한다.
“이 분은 제 아버지인데...도저히 먹고 살 수 없어 고향으로 돌아가려고...용서해주시오”
45세 대통령 이승만과 27세 비서 임병직은 누가 봐도 부자 같이 보였고, 실제로 부자처럼 밀착된 평생 동지다.
잠시후 선장이 부르더니 이것저것 묻고 항해사를 불러 일이나 시키라고 말했다.
그제야 안도한 이승만과 임병직에게 항해사는 화물선 병실을 숙소로 배정해주었다.

▲ 1920년 11월 하와이서 상하이로 밀항하던 때 이승만이 쓴 일기ⓒ연세대이승만연구원

이승만에게 주어진 일은 야간 항해 때 바다를 살피는 망보기였고 임병직에겐 갑판 청소를 맡겼다. 이때 영어를 못하는 사람이 된 이승만은 뱃머리에 앉아 밤바다를 둘러보며 한시(漢詩)를 짓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이때의 작품 아홉수가 지금도 보존되어있다.
꿈 많은 20대 청년 임병직과 임정대통령 이승만은 밤마다 뱃머리에 앉아 철야 망보기 근무를 하며 대화를 나눈다. 망국민의 설음과 상하이 임시정부 지도자들의 갈등과 이승만 공격, 기약 없는 독립운동의 향방 등 온갖 상념에 밤새우는 고독한 부자(父子), 다음과 같은 이승만의 칠언절구(七言絶句)는 명작이라 한다.

一身漂漂水天間   물과 하늘 사이를 떠다니는 몸
萬里太洋畿往還   만리 태평양을 오가기 몇 번인고
到處尋常形勝地   여기저기 명승지도 심드렁하구나
夢魂長在漢南山   꿈도 혼도 늘 머물기는 서울 남산

(이승만의 영문 ’상해 방문기‘-연세대이승만연구원 소장, 임병직[임병직 회고록] 앞의 책)

▲ 워싱턴 구미위원부 시절 이승만(앞줄 가운데)과 비서 임병직(뒷줄 왼쪽부터 두번째). 아래 큰 얼굴은 건국후의 임병직.ⓒ연세대이승만연구원

◆이승만은 그해 여름쯤 상하이에 가기로 작정했다. 그동안 중국 땅에서의 ’비합법적 활동’에 부정적이던 이승만은 ‘필라델피아 독립선언‘후 워싱턴에 임정대통령 사무실을 차리고 ’대한민국 특파구미주찰위원회(大韓民國 特派歐美駐紮委員會) 설치를 공포, 8월25일부터 ‘구미위원부’로 통칭한 사살상 임정 외교본부를 가동하여 세계를 상대로 ’임정 홍보‘와 외교활동에 전념했다.
임정 총리 이동휘에게는 “당신은 원동지역을 맡고 나는 이곳서 국제외교를 맡겠다”는 역할분담을 통지하고 1년여를 동분서주 뛰어다닌 것이다. 

문제는 ’통합 임정‘(9월13일 출범) 대통령으로서 상하이의 파벌싸움과 ’대통령 공격‘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상황이다. 1920년 5월이래 이동휘와 비서장-차장급 인사들이 짜고 ’대통령 불신임 운동‘을 펼치며 상하이에 부임하지 않으면 불신임 결의를 하겠다는 편지까지 보내 왔다. 
이를 방치하면 임정분열이 불가피하므로 불화를 막는 강력한 조치가 필요해 결국 이승만이 중국행을 서둘렀다고 한다. (이원순 [인간 이승만] 신태양사, 1988. 반병률 [이승만과 이동휘], 유영익편 [이승만 연구] 연세대출판부,2000)

▲ 1941년 이승만이 팔을 낀 평생친구 보스윅. 1920년 이승만의 중국 밀항선을 주선해준 하와이 사업가.(오른쪽)ⓒ연세대이승만연구원

★워싱턴 구미위원부를 떠난 이승만은 6월말 하와이로 돌아와 중국행을 준비한다.
김규식과 노백린(盧伯麟,1875~1926)도 동행하려 했으나 일행이 많으면 위험하다. 무국적자 이승만이 미국 여행증을 받는다면 다 노출된다. 상하이까지 밀항(密航)하는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의 목에는 일본이 30만달러 현상금을 걸어놓았기 때문이다.(이원순 [세기를 넘어서] 신태양사, 1989)

 임병직과 단둘이 가기로 정한 이승만은 일본에 기항하지 않는 배편을 주선해달라고 친구 보스윅(William Borthwick)에게 부탁한다. 호놀루루 저축은행장까지 지낸 보스윅은 당시 장의사를 운영하며 이승만을 도와왔는데 뒷날 죽는 순간까지 함께 하는 ’50년 지기’가 된다. 그는 이승만 일행을 자신의 별장에 숨겨두고 배편을 알선하였다. 겉으로는 이승만이 이미 상하이로 떠난 것서럼 가짜 소문을 냈다. 
마침내 11월16일 새벽, 중국인 노동자로 변장한 이승만과 임병직은 배에 올랐다.
캘리포니아에서 목재를 싣고 상하이로 직행하는 네덜란드 화물선 웨스트 하이카(S.S. West Hika) 호, 보스윅의 부탁과 선장의 지시를 받은 2등 항해사 스나이더(Snyder)가 두 사람을 안내하였다.

▲ 임정대통령 이승만과 임정 외무장관대리 신익희. 1921년 상하이에서.(오른쪽)

◆“결단코 이곳으로 오지 마시옵소서”

이승만은 일찍이 상하이 지지세력들로부터 임정의 불화를 잠재우고 반대파들의 저항을 진압할 아이디어를 구했다. 놀랍게도 그들은 한결같이 이승만의 중국행을 반대한다는 편지를 전해왔다..
외교담당 장관급 차장 신익희(海公 申翼熙, 1894~1956)는 경기도 광주출신 ‘기호파’이다. “임시정부는 한마디로 당동벌이(黨同伐異)라는 평을 들어왔으며, 이를 혁파할 묘책은 안보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료집-16, 외무부)
‘당동벌이’란 ‘뜻이 맞는 사람끼리 한패가 되어 다른 사람을 물리침’이란 의미로 임정의 패당싸움이 처음부터 얼마나 심했는지를 보여주는 말이다.
임정 수립 주도자의 한명인 현순(玄揗)도 이승만의 상하이 부임을 “극구 반대”한다며 “굳이 오시겠다면 자금을 얼마쯤이라도 가져와야 합니다”고 답했다.

이승만의 측근 통신원 안현경과 장붕은 더더욱 부정적이었다.
“결단코 이곳으로 오지 마시옵소서. 샌프란시스코(안창호파)와 상하이 몇몇 야심가(이동휘파)들이 내응이 되어 세 분(이승만-김규식-여운홍)을 상하이에 끌어들여야 미주-하와이 일이 해결된다 하였고, 대통령께서 이곳에 오시면 안창호는 미국으로 간다합니다” (안현경, 1920.4.23)

“각하를 이곳으로 오시라는 운동은 모두 공심(公心)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여러 가지 작은 허물을 찾아내어 공박하자는 의도에 불과하며, 또 각하를 위하는 사람들은 모두 오시는 것을 원치 아니 하나이다. 연일 국무회의도 하고 차장들이 비밀히 단결되어 각하를 공격할 하자도 찾고 방책도 연구하는 듯 하외다. 추신: 만일 오시려거든 돈 기만원을 가지고 오셔야하며, 또 사용(私用)할 기밀비도 기만원 있어야 하겠소이다”” (장붕, 1920.7.16.)

임시의정원 의장 장붕의 다른 편지에 나오는 색다른 지적도 눈길을 끈다.
“안창호가 임정의 3분의2 이상을 독점하고 있으니 대책이 필요”하다는 말. 
실제로 “안창호가 상하이에 와서 황제노릇 한다”는 반발이 일어날 정도였다.(안창호 [도산일기]). 당시 안창호는 미국에 이어 상하이 흥사단 비밀조직하느라 물심양면 전념하여 1920년 9월20일 ‘흥사단 원동위원부‘를 결성하는데, 해방 때까지 유력자만 190여명으로 중국지역 독립운동가들을 뛰어넘는 규모다.

안희경과 장붕의 보고를 뒷받침하는 자료들이 없을리 없다. 
한인사회당 김립(金立, 1880~1922)이 당수 이동휘에게 사흘마다 보낸 편지들. (★한인사회당은 레닌 혁명후 1918년 볼셰비키 지원을 받아 이동휘가 하바로브스크에서 창당) 그 한 대목만 보자.

“....승만을 몰아내고 다시 국(局)을 정리하려 힘쓸 마음이 많았소이다....설사 승만이 상해에 오지 않을지라도 상해 국중(局中)에 안창호가 공심이 있는 자이면 동심협력하여 이 국을 일신할 수 있아오나...” 이것은 1919년 7월의 편지, 임시정부 통합(9월)이 되기 전에 이미 좌익 이동휘 일파는 이승만을 축출하고 통합임시정부를 꾸리자는 모의를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이승만 반대세력이 이승만의 상해행을 끈질기게 요구한 행위는 ‘이승만 퇴출 계략’ 그것이었다. 

이승만은 임시의정원(국회) 의장 장붕에게 편지를 쓴다.
“재정을 다소간 휴대하고 와야겠다 하심에 심히 난처한 일이라. 내가 어디에서 재력을 득하여 유력정치객들의 수단을 당하오리까. 내게 있는 성력(誠力)으로 대신하고자 할 따름이외다.”

▲ 1920년12월28일 이승만 임정 대통령의 상하이 부임 환영식. 가운데 화환을 건 이승만 대통령. 오른쪽에 안창호. 왼쪽에 이동휘 국무총리. ⓒ연세대이승만연구원

◆이승만 “독립전쟁을 위한 준비를 합시다”

12월5일 상하이 황푸강(黃浦江) 부두에 도착한 이승만과 임병직은 인력거를 타고 중국인 여관 멍위엔관(孟淵館)에 들었다. 장붕부터 만나 현지 브피링을 들은 뒤에 이승만은 임정에 도착사실을 알렸다. 임정은 이승만을 상하이 최대규모 벌링턴(Burlington) 호텔로 옮겼다. 12일엔 여운형의 주선으로 프랑스 조계 안의 미국인 선교사 크로푸트(J.W. Crofoot) 집으로 다시 옮긴다. 신변안전 때문이다. 그래서 이집에서 상하이를 떠나는 5월까지 머무른다. 
이승만은 이때부터 상하이YMCA 미국인 총무 피치(George A. Fitch) 목사와 친밀해진다. 

다음날 13일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 처음 정부청사에 나타나 직원들을 먼저 접견하였고, 임정 각 부서는 업무보고서를 만들어 이승만에게 제출하였다. 
그리고 12월 28일 오후 7시30분 교민단 사무소에서 환영식이 열린다. 
‘환영 대통령 이승만 박사’라는 금글씨 대형 한글 현수막과 태극기와 만국기로 장식한 식장에는 임정 각료들, 의정원 국회의원들, 현지 동포사회 인사들로 300여명이 북적거렸다. 박은식, 이일림, 안창호의 축사에 이어 이승만이 답사를 한다. 
감사와 감회를 피력한 다음 “많은 금전이나 대정략을 가지고 온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하여 기대감에 파문을 일으켜 놓은 이승만은 ‘독립전쟁론’을 터트렸다.

“미구에 기회가 옵니다. 겉으로는 아무 일 없는 것 같이 하고 각각 사업하며 비밀히 예비하여 단도와 소총 한 개씩이라도 사서, 적어도 두 놈은 죽이고야 죽겠다는 결심을 가집시다”
외교독립론 주창자 이승만, 이런 말은 이동휘 세력은 물론, 박용만, 신채호 등 무장 투쟁론자들을 의식한 대통령의 수사 만이 아니다. 뒷날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자 국민총궐기 동원령을 방송하고 피흘려 싸우자며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던가. 

상하이 임정의 파벌싸움을 정조준, 이승만은 ‘단합’을 부르짖었다.
“세상이 우리를 단합하는 민족이라 하니 기쁘외다. 단합에 견고를 더하여 넘어져도 한결같이,일어나도 한결같이 향진합시다...(중략)...왜탐정과 이완용을 제하고는 다 한 지체이데, 한사람이라도 불합이라 하면 우리 사업에 그만치 해가 되리다. 어느 곳에서 작정하고 동원령을 내릴 날이 있으리이다.” ([독립신문] 1921.1.15. ‘우리의 처음 맞는 대통령의 연설’)
[독립신문]은 이날 ‘장시간의 연설이 청중들에게 심각한 감동을 일으켰다’고 썼다.
「국민아. 통곡을 말고 희망으로 이 결심을 하자. 우리의 원수, 우리의 지도자, 우리의 대통령을 따라 광복의 대업을 완성하기에 일신하자. 합력하자....우리 생명이 가진 존경과 지식과 기능과 심성을 다 그에게 드리고, 마침내 그가 “나오너라” 전장으로 부르실 때에 일제히 “예”하고 나서자」 이런 환영 찬양 기사는 이동휘, 안창호 등 수뇌부의 암투와 전혀 다른 일반 망국민의 독립열망을 토로한 것이리라. 
새해 1923년 1월 1일엔 신년 축하식을 거행하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임정 각료 및 의정원  등 다 합쳐 겨우 59명, 이들이 출신지역과 이념과 이해관례로 찢어지고 갈라져 날마다 싸움질이다. 이승만은 이들 전원에게 오찬을 베풀었다.
다시 날이 밝자 벼르고 벼르던 이동휘의 붉은 입술이 드디어 폭발한다. <계속>

▲ 상하이 임시정부 요인들 59명이 1921년 1월1일 이승만대통령과 신년축하식후 기념 촬영.ⓒ연세대이승만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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