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운동의 기획자는 하와이 이승만 "총궐기 하라"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
    목이 터져라 만세를 외치는 3.1운동이 폭발한 날은 1919년 3월1일, 서울 종로 파고다 공원에서 애국시민들과 청년들이 만세를 부르고, 태화관(泰和館)에선 민족대표 33인중 29인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불렀다. 미리 연락한 일본경찰대가 대기하다가 이들을 연행하였고 파고다공원 만세 인파를 해산시키며 줄줄이 끌어갔다.
    민족대표 33인이 이 거사를 일으켰는가? 맞다. 하지만 그 배후엔 민족의 카리스마 이승만의 전략적 지도력이 이들을 결합시켜주었음을 역사는 기록에서 지워버리고 있다. 

    이날의 역사적인 만세운동은 그러나 이승만이 요청한 ’거사‘(擧事) 계획보다 늦어도 너무 늦게 터졌다. 그 전해 1918년 미국 윌슨 대통령이 1월8일 국회 연두교서에서 국제연맹 창설과 약소민족 자결주의 등 14개조를 발표하였을 때, 전쟁중인 연합국들의 관심은 국제연맹에 쏠렷을뿐 약소민족의 해방에 대하여는 무관심하였다. 따라서 민족자결주의는 한참 후에야 세계에 알려진다. 
    하와이에서 독립운동하던 이승만 박사는 달랐다.
    윌슨이 선언한 민족자결주의는 프린스턴 대학시절 총장 윌슨과 이승만이 자주 토론하던 약소민족 해방 독립론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대통령에 출마한 윌슨을 찾아갔을 때 윌슨은 이승만에게 ”한국 독립을 위해 협력하겠다“고 다짐까지 하지 않았던가.

    세계1차대전이 종말에 이르던 1918년 10월, 이승만은 국내인사들에게 ’거사‘를 일으키라고 밀서를 나누어주었다. 귀국인사차 하와이로 찾아온 유학생 여운홍(呂運弘, 여운형 동생)과 평북선교사 샤록스(Alfred M. Sharrocks) 등이 대표적 인물들이다. 이들을 통하여 이승만은 본국의 이상재(李商在), 송진우(宋鎭禹), 함태영(咸台永), 양전백(梁甸伯), 이종일(李鍾一) 등에게 알렸고, 일본과 중국에도 연락하도록 재촉하고 있었다.
  • ▲ 청년 이승만 박사와 스승 윌슨 미국대통령ⓒ뉴데일리DB
    ▲ 청년 이승만 박사와 스승 윌슨 미국대통령ⓒ뉴데일리DB
    ’고요한 아침의 나라‘(Land of Morning Calm)는 전쟁이 끝나는 11월까지도 ’고요‘하였다.
    전후처리를 위한 파리 강화회의(Paris Peace Conference)가 1월에 열린다는 뉴스에 조바심치는 이승만은 다시금 밀사와 밀서를 보낸다.

    결론부터 말하면 한국최대의 독립만세운동 ’3.1운동의 기획자‘는 누구보다 먼저 움직인 이승만 박사였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 전쟁이 끝나면 우리도 다른 약소민족들과 함께 독립할  기회가 반드시 온다“ 결정적인 때가 왔음을 직감한 이승만이 제각기 우왕좌왕 동요하는 국내외 애국지사들을 조직적으로 움직이게 묶어주는 중추역을 해냈다는 이야기이다.
    당시 국내서 가장 재정이 풍부하고 조직이 큰 천도교단을 기독교 감리교 조직과 연결고리를 만들어 준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천도교 손병희(孫秉熙)는 1월 말쯤 독자적으로 거사를 논의하던중 김성수 측과 함태영 기독교 측의 제의를 받아 2월 하순 합동작전을 펴기로 합의한다.
    여기서 이승만의 ’밀사‘에 대한 증거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 ▲ 청년 이승만 박사와 스승 윌슨 미국대통령ⓒ뉴데일리DB
    ◆인촌(仁村) 김성수(金成洙,1891~1955)의 증언 기록

    「중앙학교의 숙직실은 새로 지은 교사 앞 운동장의 동남 편에 있었다. 조그만 기와집이었다. 오늘날에는 화강암 석조 대강당이 있는 터였다. 지금은 다른 곳에 옮겨서 옛날의 숙직실을 복원했고 원래 숙직실 자리에는 ‘3.1운동 책원지(策元地)’라는 기념비가 서있다.
    이 숙직실은 일제 초기 가장 우수했던 민족의 수재들이 드나들었던 아지트였을 뿐 아니라 후에는 3.1운동의 모의 장소가 되기도 했고 인촌(仁村)과 고하(古下)의 살림집이기도 했다. (중략)
    1918년 12월 어느 날 워싱턴에서 재미 동포들과 구국운동을 하고 있던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이 밀사를 보내왔다. 
    “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론의 원칙이 정식으로 제출될 이번 강화회의를 이용하여
    한민족의 노예생활을 호소하고 자주권을 회복시켜야 한다. 미국에 있는 동지들도
    이 구국운동을 추진시키고 있으니 국내에서도 이에 호응해주기 바란다.”
    밀사(密使)는 이런 내용의 밀서(密書)를 휴대하고 있었다.

    仁村-古下-幾堂 등 세 사람은 ‘이제야 말로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절박감을 느끼고 숙직실 방안에 머리를 맞대고 앉아 어떻게 할까를 논의했다. 그러나 당장 묘안이 없었다.
    거국적인 항일 독립운동을 주도해야 된다는 목표는 설정되었다.」
                            (동아일보사 발행 [仁村 金性洙-사상과 일화] 1985.6.25. p121)

    이것은 3.1운동 석달 전 겨울, 이승만이 보낸 밀서를 가져온 밀사를 만나고서야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심하였다는 인촌 김성수의 회고 증언이다. 
    당시 김성수(1891~1955, 만27세)는 중앙학교 소유자, 공동소유자인 고하 송진우(古下 宋鎭禹,1890~1945, 만28세)는 교장, 기당 현상윤(幾堂 玄相允,1893~1950, 만25세)은 교사, 일본 와세대 대학 유학선후배로서 20대 후반의 팔팔한 애국지사들이다.
    그들에게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은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복음’이었기에 “뭔가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절박감에 쫓기고 있을 때 모세처럼 나타난 이승만의 밀서야 말로 젊은 피를 폭발시키는 뇌관이나 다름없었다는 고백이다. 왜냐하면 이승만 박사는 젊은이들의 우상,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자, 더구나 윌슨 대통령이 프린스턴대학 총장때 이승만에게 박사모를 씌워준 은사이므로 사제지간인 두 지도자가 손을 잡으면 독립을 가져다줄 것만 같은 기대감이 식민지 전체를 부풀게 하는 희망의 등불이었던 것이다.
    세 청년은 천도교와 손잡기로 작정하고, 손병희(孫秉熙,58세) 측근 최린(崔麟, 40세, 보성학교교장)을 찾아 그의 제자인 현상윤이 달려간다. 당시 국내최대 조직과 재정의 천도교를 끌어들이는 지하작업은 다음해 1919년 1월 권동진(權東鎭) 오세창(吳世昌) 최린이 동대문 밖 천도교 소유의 상춘원(常春園: 현 숭인동)에서 손병희를 만나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합의하였고 2월 하순 이승훈(李昇薰), 함태영(咸台永)등 개신교 대표들과 합류, 3월1일 궐기를 결정하게 된다. 그 뒤에 태평양 멀리 이승만의 ‘먼 손’이 있을 줄이야.
  • ▲ 부통령 김성수와 대통령 이승만.(자료사진)
    ▲ 부통령 김성수와 대통령 이승만.(자료사진)
  • ▲ 임영신의 회고록 표지. 오른쪽은 독립운동 시절의 이승만과 임영신.ⓒ뉴데일리DB
    ▲ 임영신의 회고록 표지. 오른쪽은 독립운동 시절의 이승만과 임영신.ⓒ뉴데일리DB
    ◆승당(承堂) 임영신(任永信,1899~1977)의 증언

    ‘이승만의 밀서’에 대한 기록 가운데 승당(承堂) 임영신(任永信)이 자서전 [나의 40년 투쟁사]에 보다 상세히 남긴 상황설명이 볼만 하다. 임영신은 3.1운동 몇해 후 이승만과 합류, 독립운동을 벌였고 해방 후엔 이승만의 유엔외교에 앞장섰으며 건국정부에서 초대 상공부장관을 맡은 여걸이다.

    「교사 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산 밑에 있는 공지에서 기도회를 열기 시작했다.
    교편을 잡고 있는 동창생들에게 편지로 이런 모임을 갖도록 권유했다. 그들의 반응은 열렬했으며 수개월 내로 9개의 모임이 되었다. (중략)
    하루는 서울에서 온 행상 하나가 집에 왔다. 그가 보따리를 풀었을 때 나는 밑에 삐라가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서울의 지하운동본부에서는 행상들이 연락원이 되고 있다는 말을 들은 것이 생각났다.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행상은 주저하였다. 그의 정체를 알고 싶은 나는 이런저런 지하운동 이야기를 남한테 전해들은 말처럼 나누던 중에 ‘이승만 박사’라는 이름을 슬쩍 던지는 순간 그의 눈이 빛나는 것을 보았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당신은 지하운동본부에서 왔지요?’라고 말하자 그는 끄덕였다. 나는 와락 끌어안았다. 그는 몇 장의 삐라를 꺼내주었고 나는 열심히 읽었다. (중략)
    1918년에는 두 개의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1차대전이 끝난 것과 유행성 감기가 전국에 퍼진 일이다. 얼마 전부터 지하운동단체에서는 전국적인 통신망을 개척하여 나도 어떤 사업가의 도움으로 상하이와 접촉을 가지게 되었다. 그때 상하이를 통하여 우리는 이승만 박사로부터 이런 메시지를 받았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세계평화를 위하여 14조문을 선언하였다. 그중 한조문이 민족자결권이다. 여러분은 이 조문을 최대한으로 이용해야만 된다. 여러분의 의사 표시가 국제적으로 알려져야만 한다. 윌슨 대통령은 확실히 여러분을 도울 것이다.」

    그해 겨울 내내 이 메시지는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전달되었다. 상하이에 있는 한국 지하운동본부는 프랑스 조계 안에 있다고 알려졌다. 이승만 박사의 메시지는 남경으로 전달되고 그곳엔 제2의 비밀본부가 있었다. 다른 연락원이 두만강까지 와서 대기 중인 연락원에게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한국으로 메시지를 가져오기에는 겨울이 가장 안전하였다. 강이 얼어서 다리에 있는 일본군 순찰대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략)
    독한 감기에 걸려 이틀이나 코피를 흘린 2월 어느 날 연락원이 서울에서 내려왔다.
    ‘3월1일 큰 시위를 결정하였소. 정오에 종이 울리면 모든 한국인은 자유를 위하여 절규할 것이오. 우리의 시위가 파리 베르사이유 회의에 알려지면 세계의 민주국가들이 우리를 자유로 만들어 줄 것이오.’」
    만 20세 교사로서 전라북도 지하운동 대표였던 임영신은 부랴부랴 몇날 밤을 새우며 태극기를 만들어 전주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다.
  • ▲ 우남 이승만전 표지(화산 문화기획, 1995)
    ▲ 우남 이승만전 표지(화산 문화기획, 1995)
    ◆이승만 자서전...“기회는 왔다, 총궐기하라”

    김성수와 임영신의 기록보다 이승만 자신의 회고담이 가장 확실한 증언이 될 터이다.
    다음은 자서전 [雩南 李承晩 傳] 가운데 ‘3.1운동 전후’(p211~219) 장에서 ‘밀사와 밀서’ 관련 내용만 요약한 것이다.

    「...윌슨이 국회에서 연두교서로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발표 하였을 때 이승만이 세상의 누구보다 기뻐한 것은 당연하다. 프린스턴 대학 총장시절 윌슨이 집으로 불러 만찬을 즐기며 토론할 때마다 이승만이 주장하였던 ‘약소민족 해방론’이 마침내 미국 대통령의 공식연설로 공표되었던 것. 또한 그후 망명한 이승만이 바로 지난해 ‘한국독립을 세계에 호소하는 선언문’에 서명해달라고 요청하였을 때 윌슨 대통령이 “지금은 때가 아니오. 때를 기다리시오. 그때가 반드시 올 것‘이라던 ’그 때‘가 마침내 눈앞에 열린 것이었다.

    ”많은 약소민족들이 일어날 테니 한국이 먼저 윌슨대통령의 주장에 호응해야 한다.“
    이승만은 임박한 ’종전에 대비하여 궐기할 준비를 갖추라’는 밀서를 국내외 동지들에게 보내기 시작하였다. 이 지시를 서면으로 보내고 밀사를 통하여 보내고 전신으로도 보내어 뜻있는 동지들의 인식을 새롭게 하였다.
    11월11일 독일의 항복으로 세계1차대전이 끝나고 파리강화회의 예비회담 의제 속에 ‘민족자결주의’가 포함되었음을 확인한 이승만은 곧바로 중국과 일본에 있는 동지들에게 “민족 총궐기의 때가 왔다‘는 지령과 밀서를 다시 한 번 곳곳에 보냈다. 
    그리고 미국의 프랭클린 내무장관과 폴크 국무장관을 만나 ”한국 대표가 파리회의에 참석할 길을 열어달라“고 요청하였다.
    한편 중국 동지들은 상하이에 모여 이승만의 지시에 따라 파리회의 대표(김규식)를 선정하고, 조선 본국과 일본에서 대대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즉시 본국에 장덕수를, 일본에 김철, 선우혁, 서병호 등을 파견하고 여운형을 소련 쪽에 보낸다.
    이에 따라 2월8일 일본 도쿄의 조선인 기독청년회관에 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낭독하고, 손가락을 깨물어 ’독립요구서‘ 혈서를 써서 일본 국회와 정부에 제출하려다가 경찰의 칼 끝에 유혈의 참극을 당하였다....」
     (1949년 대통령 이승만 구술,시인 서정주 기록/화산 문화기획 재출간 1995)
  • ▲ 1919년3월3일 고종의 장례식. 덕수궁 앞에 조문 인파. (스코필드 박사 촬영, 독립기념관)
    ▲ 1919년3월3일 고종의 장례식. 덕수궁 앞에 조문 인파. (스코필드 박사 촬영, 독립기념관)
    ◆이승만이 진술한 대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프린스턴 대학원시절 이승만의 ’약소민족 해방론‘에 의기투합했던 스승과 제자 두 사람의 합작픔이나 다름없다는 추론이 나온다. 이승만도 ”그때 나의 주장에 윌슨이 어디까지 동감했는지...’라는 단서를 붙이고 있긴 하지만, 윌슨의 대통령 연두교서에 전세계의 약소민족 자결권으로 나타났으니 다툴 여지도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 ‘이승만의 3.1운동 기획“은 당사자인 이승만이 밀서를 몇 차례나 보냈다는 본인 진술로써 확증이 된다. 그 밀서들은 일본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과 파고다공원의 3.1독립만세 운동을 행동으로 폭발시키는 결정타 폭약이었던 것이다.
    역사적 사실이 이러한데도 3.1독립운동 역사에는 여태까지 이승만 이름 석자마저 깡그리 무시되어 왔다.

    필자가 2019년 3월 뉴데일리TV (유튜브)에 ’3.1운동의 기획자는 이승만‘이란 방송을 하자 어김없이 반박하는 글이 쏟아졌다. 반박 이유들이 웃음을 자아낸다. 
    ”밀서의 실물을 찾을 수 없다...이승만은 당시 하와이에 있었다...제3자의 기록도 기억력도 믿을 수 없다...다 죽었으니 확인할 길도 없다...“ 등등 억지와 일방적인 부정이다. 어느 좌파 학자는 소위 ’직접사료‘가 발견되지 않았고 ’간접사료‘는 신빙성이 없다며 거짓이라고 막말로 도리질 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한국사 5천년의 기록은 몽땅 거짓이란 말인가.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등은 직접사료인가? 간접사료인가? 왕들의 말과 행동을 기록해 놓은 조선왕조실록은 어떻게 믿을 수 있나? 왕들의 음성녹음이나 사진이라도 보고 들어야 믿겠다는 생억지 아닌가.
    3.1운동에 대한 이승만의 직접진술을 못 믿겠다면 5천년 민족사는 공중분해 되고 만다.
    일본 경찰의 감시망 속에서 극비의 항일운동 '밀서'를 누가 얼마나 오래 보관할 수 있겠나. 즉석에서 불태웠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교묘하게 악용하는 좌파나 친북세력의 ’대한민국 죽이기‘ 작전은 ’이승만 없애기’에 이토록 집요힌 거짓선동을 이 순간까지도 계속하고 있는 중이다.
  • ▲ 1919년 1월 파리 강화회의가 열린 베르사이유궁 거울의 방. 앞줄 왼쪽에서 다섯번째 윌슨 미국대통령.(자료사전)
    ▲ 1919년 1월 파리 강화회의가 열린 베르사이유궁 거울의 방. 앞줄 왼쪽에서 다섯번째 윌슨 미국대통령.(자료사전)
    ★3.1운동이 ”늦었다“는 의미는 1월의 파리강화회의가 열리기 전에 거사해야 미국-영국등 승전국들의 관심을 불러 있으킬 수 있다는 이승만의 요구가 말해준다. 
    다행히 베르사이유 회의는 6월까지 이어지지만 약소국 해방문제는 승전국들의 입맛대로 처리된다. 왜냐하면, 윌슨의 원칙을 연합국들이 걷어찼기 때문이다. 결국 패전국 독일 등의 식민지들만 ’자결주의‘ 이름으로 또 다른 먹잇감이 되었고, 승전 연합국 일본의 식민지 한국은 여지없이 제외되고 말았던 것이다. 영국식민지도 마찬가지, 바로 약육강식의 패권주의 놀음은 또 한차례의 세계대전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이승만의 독립운동은 그때부터 너무나 외로워진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