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성감옥의 '3만 의형제' 

    한성감옥 시절 정순만(鄭淳萬,1873년생), 이승만(李承晩,1875년생), 박용만(朴容萬,1881년생)은 ‘3만 의형제’를 맺었다고 한다. 출옥후 미국에 가서도 이승만과 박용만은 의기투합, 하와이로 건너가 정착하여 미주지역 초기 독립운동을 각자의 방식대로 이끌게 된다. 그런데 이 ‘형제 지도자’들이 5년 만에 갈라서고 박용만은 이승만을 제거하려는 최대의 ‘적’으로 변신한다. 왜 그랬을까?

  • ▲ 이승만 앨범의 박용만 얼굴ⓒ연세대이승만연구원
    ▲ 이승만 앨범의 박용만 얼굴ⓒ연세대이승만연구원
    ★우성(又醒) 박용만(1881~1928)의 면모부터 살펴보자.
    강원도 철원 출생, 일본 게이오의숙(慶應義塾) 유학 중에 귀국, 일제의 황무지 개척요구에 반대 투쟁을 벌이다가 1904년 한성감옥에 갇히면서 이승만을 만나 ‘3만 의형제’를 맺는다.
    그해 8월, 이승만이 출옥하여 11월 미국 유학을 떠난 뒤 박용만도 출옥하여 도미한다.
    이때 이승만이 옥중에서 몰래 쓴 저서 [독립정신]의 원고를 숨겨 가져다가 이승만에게 전달하고 동시에 이승만의 아들 태산(봉수)도 데려다주었다. LA에서 [독립정신] 출간에 앞장선다.

    곧 박용만은 숙부 박희병(朴羲秉)이 살고있는 콜로라도주 덴버(Denver)에 가서, 고등학교를 졸업, 네브라스카 대학에서 정치학과 군사학을 전공한다. 여름방학기간에 ‘한인소년병학교’(Young Korean Military School)을 개설, 한인청년 30명을 모집하여 군사훈련을 시키면서 [국민개병설](國民皆兵說) 등 군사관계 책 세권을 출판한다. 1912년 8월 네브라스카 대학에서 일종의 ROTC 과정을 이수한 그는 정치학 학사로 졸업한다.
    1908년엔 이승만의 도움을 받아 ‘애국동지대표회’를 소집, 이승만이 회장이 되어 미주독립운동조직을 만들기도 했던 두 사람은, 이승만이 프린스턴대 박사를 마치고 귀국하였다가 일본의 탄압에 ‘쫓겨 미국에 다시 갔을 때 네브라스카(Nebraska)에서 만난다. 그리고 교민이 가장 많은 하와이를 독립운동기지로 삼자고 합의한다. 
       
    1912년 11월, 박용만은 자신의 ’무장투쟁 독립론‘을 향한 결정적 행보를 시작한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대한인국민회‘ 지방총회 대표자회의에 참석, 안창호 등과 함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결성 선포문‘을 기초하였다. 
    이 선포문 주요내용이 유명한 ’무형정부=자치정부‘ 규정들이다.
    첫째, 중앙총회는 대한국민을 대표하여 공법상에 허한 바 가정부(假政府)의 자격으로 입법·행정·사법의 삼대기관을 두어 완전히 자치제도를 행할 일.
    둘째, 회원과 아님을 물론하고 각국 각지에 있는 대한국민에게 그 지방 생활정도를 따라 얼마씩 ’의무금‘을 정하여 전체 세입·세출을 정관할 일.
    셋째, 일체 회원은 병역의 의무를 담임할 일.(다만 연령에 따라).
    즉, 대한인국민회는 해외 모든 한국인들을 통치하는 무형의 정부로서 3권을 자악, 고민들의 국방의무, 남세의무까지 행사하며 범법자에게는 사법권을 발동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멸망한 대한제국을 대신하여 사실상 ’임시정부‘를 지향하겠다는 그들의 결의였다. 

    다음달 12월초 하와이 호놀룰루에 먼저 정착한 박용만은 ‘대한인국민회’의 하와이 지방총회 기관지 [신한국보]를 개명한 [국민보]의 주필을 맡는다. 이어 총155개조에 달하는 하와이 지방총회(이하 국민회) ‘자치규정’을 제정하고, 하와이 군도를 통치하는 ‘자치정부’의 주역이 되었다. 곧바로 네브라스카 대학때 실험해 본 ‘무장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호놀룰루 뒤편 큰 산 너머에 교민의 소유 파인애플 농장에 ‘대조선독립군단’(The Korean Military Corporation)을 창설하고 부속기관 ‘병학교’(兵學校, Korean Militay Adademy)를 개교, 막사와 군문(軍門)를 지었다.([국외한인사회의 민족운동] 윤병석 지음. 일조각, 1990)
    박용만은 하와이 이민 노동자들 가운데 고종황제의 ‘광무군인’(光武軍人) 출신 200여명을 중심으로 군사교육과 훈련을 개시한다. 건축과 교육 등 비용은 국민회가 거두는 ‘의무금’ 즉 자치정부의 세금으로 충당하였음은 물론이다.
  • ▲ 박용만이 설립한 '대조선국민군단' 단장정복을 입은 모습. 칼을 차고 있다.ⓒ연세대이승만연구원
    ▲ 박용만이 설립한 '대조선국민군단' 단장정복을 입은 모습. 칼을 차고 있다.ⓒ연세대이승만연구원
    교육사업 v 군사훈련...이승만 v 박용만 노선충돌

    ◆박용만보다 석달 늦게 하와이로 간 이승만은 교육사업에 매진한다.
    앞에서 보았 듯이 노동자들의 자녀들을 데려다가 무료로 교육시킬 때, 동포들의 호응이 뜨거워 그때그때 성금으로 꾸려가지만 학생들이 증가하면서 기숙사의 필요성이 절박해진다.
    약 2000달러를 모금하여 여학생 기숙사를 마련하자 미국학교에 다니던 남학생들이 몰려옴에 따라 남학생 기숙사도 필요해진다.
    이승만은 국민회에 손을 내밀었다. 당시 국민회 소유의 빈터가 남아있으니 학교를 짓자고 제안하였다. 국민회 측은 “형편대로 하라. 교육이 뭐 그리 급하냐‘고 거절한다.
    그러면서 국민회 회관을 5천여달러나 들여 건축하는 것이었다. 기숙사 건축을 위해 모금하던 이승만은 국민회가 회관건립 모금을 강행하자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불신을 드러낸다.
    교민의 ’의무금‘이 대부분 박용만의 군사학교 지원과 국민회관 건립에 사용되기 때문이다.
    2중3중의 모금에 시달리는 동포사회의 불만도 팽배하였다. 

    요컨대, 이승만의 독립운동과 박용만의 독립운동 노선의 차이가 평행선의 충돌을 재촉하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 ▲ 박용만의 '대조선국민군단'의 사관학교 '병학교'의 막사와 군문 낙성식 기념사진(1914년 8월29일)ⓒ연세대이승만연궈원
    ▲ 박용만의 '대조선국민군단'의 사관학교 '병학교'의 막사와 군문 낙성식 기념사진(1914년 8월29일)ⓒ연세대이승만연궈원
    국민회 부정부패 탄로...집행부 숙청, 이승만이 장악

    ★1915년 봄, 마침내 ’터질 것이 터지는 스캔들‘이 터지고 말았다.
    재선된 국민회장 김종학(金鍾學)의 집행부가 건축비에서 2,379달러나 유용한 것이 드러난 것이었다. 국민회는 ’자치규정에 따라‘ 처벌은 하지않고 착복한 돈을 변상하게 하였다.
    이승만은 참고 참다가 [태평양잡지]에 장문의 ’성명서‘를 발표한다.
    ”대저 국민회관 건축이 우리에게 학식을 주겠는가, 재정을 주겠는가“ 간부들이 국민회를 망치고 있으며 교육사업을 방해하여 동포들에게 겹겹이 피해를 준다고 질책하였다.
    ”지난 2년간 사탕밭에서 땀 흘려 모은 돈을 받아 무엇에 썼는가. 학생 기숙사는 한번 세우면 영원히 우리 자녀들을 양성하는 시설이다. 재정출납을 보면 쓰라는 것은 쓰지 않고 쓰지 말라는 것에 쓴 것이 많으니...(중략)....국민회 임원들이 공의를 무시하니 국민회가 위태롭다.“

    실제로 국민회의 수입은 박용만이 ’의무금‘을 신설한 뒤 급증하였다. 의무금만 1만달러가 넘고 모금액도 5천달러가 넘었다. 그 중에 이승만의 교육사업엔 한 푼도 안주고 대부분 박용만의 사업용으로 지출되었고 ’병학교‘ 교관들 옷까지 새로 사주었다. 게다가 박용만과 몇몇 간부가 개인 돈 쓰듯 한다는 소문도 무성하다. 더구나 김종학 회장은 연봉을 720달러에 호화생활을 함으로써 동포사회는 진작부터 들끓고 있었다. 당시 노동자의 월급은 20~25달러, 이것저것 떼고 나면 저축할 돈이 남지 않았다. 더구나 알고 보니 박용만의 ’병학교‘ 재정은 2년에 7만달러가 넘었고, 그곳 파인애플 농장도 엄청난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궁지에 몰린 김종학이 임시대회를 소집한다. 그동안 건축비 내역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김종학의 횡령액이 1,345달러나 새로 드러났다. 이에 김종학의 ’자체 문책‘을 두고 이승만지지 대의원들이 들고 일어났다. 
    ”어찌하여 죄인 김종학을 징역살이 안 시키는가? 이러러면 다 해체하라“
    임시 총회장은 김종학을 미국 법정에 공금횡령 혐의로 고발, 미국 경찰이 김종학을 체포 연행하였다. 
    새 집행부를 구성하는 과정에 기존 세력이 회의장에 난입 폭력사태가 일어났다. 
    이승만은 끄덕도 하지 않고 국민회 장악에 성공한다. 
    ”피땀 흘린 동포들의 돈으로 일회성 이벤트에 물 쓰듯 하고, 회관이나 짓고 ’산너머 병학교’를 지원하는 것은 ‘모래 위에 집짓는 짓‘이므로“ 이승만은 동포의 교육과 복지에 전념하겠다고 천명한다. 하와이 신문들은 연일 흥미꺼리로 보도하고 김종학은 보석금을 내고 석방되었다.
  • ▲ 호놀룰루 기차역 앞에 선 이승만과 박용만(오른쪽, 1913.4.20)ⓒ연세대이승만연구원
    ▲ 호놀룰루 기차역 앞에 선 이승만과 박용만(오른쪽, 1913.4.20)ⓒ연세대이승만연구원
    ◆ 박용만, 이승만과 끝내 결별...베이징에 새 근거지

    이승만은 반대파인 박용만을 잃고 싶지 않아 편지를 보낸다.
    ”내 가슴속에는 당신에 대한 우정과 형제애 뿐이오. 당신에게는 옛 옥중동지보다 더 나은 친구가 없다는 것을 분명이 아시오. 국민회를 망치는 저들과 양자택일 하여 정하기 바라오. 언제나 변함없는 당신의 형 이승만“
    박용만의 군사학교 행사 때마다 참여하여 격려해왔던 이승만은 이번에 부정을 저지르는 패들과 손을 끊고 함께 새 출발하자고 예정을 드러내 포용하려 애썼다.

    박용만은 그동안 자기 명의로 해놓았던 국민보 회사와 국민회관의 부동산 일보를 원래대로 하와이 국민회 지방총회에 반납하였다. 국민회의 지원이 끊진 ’병학교‘도 이전하고, 사퇴하였던 [국민보] 주필을 다시 맡았다. 
    ”우리의 친애하는 박용만 군이 다시 국민보로 들어와 생사존망을 같이 하기로 하였으니 재외동포와 2천만 본국 동포를 위하여 큰 행복이니...“ 이승만은 이렇게 사설로써 박용만을 환영한다. 무장투쟁 독립론 지도자를 끌어안은 이승만 개인의 행복이기도 했으리라.
    이렇게 하와이 국민회를 장악한 이승만은 이때부터 ’예수교를 근본 삼는 자유민주 공화국‘의 실험을 탄탄하게 이어 갈 수 있었다. 

    ★ ’타고난 무골‘ 박용만은 끝내 이승만에게 ’결별‘을 고한다. 
    첫째, 박용만이 군사를 키워 독립을 쟁취하려던 ’병학교”가 결국 해체되고 말았다.
    [국민보] 주필로 복귀한 박용만이 “고국의 독립을 위해 군자금을 모집하자”는 논설을 썼는데,
    이 글을 보고받은 일본 외무대신이 “반란 선동을 왜 방치하느냐”고 미국 정부에 강력히 항의, 하와이 총독이 박용만 학교의 무기 등을 조사하여 본국에 보고하였다. 미국 내무부는 “폐쇄하라” 지시한다. 이런 상황이 되자 ‘병학교’에 땅을 빌려준 농장주가 박용만에게 “나가달라”고 요구하고 결국 박용만은 ‘사관학교’를 포기해야 했던 것이다. (미국 FBI 보고서, [박용만 평전] 방선주 논문: [이승만과 김구]제2권. 손세일 지음).

    둘째, 병력을 훈련시켜 언젠가 일본을 무찌르겠다는 꿈에 빠진 박용만이 ‘무장투쟁’을 쉽사리 포기할 리 없었다. 그는 진작부터 ‘원동(遠東)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중국 상하이에서 ‘동제사’(同濟社)를 조직, 300여명 동포 청년들과 독립운동을 벌이는 신규식(申圭植)과 연대하고 박은식(朴殷植), 신채호(申采浩)등 무장투쟁파들과 연락을 계속하면서 ‘대동단결선언’을 이끌어낸다. 
    박용만은 ‘길게 준비하자며 설교’나 하는 이승만과 마침내 결별을 결심하고, 지지자들과 새로운 조직 ‘갈리히 연합’을 결성한다. 곳곳에 지부를 만들고 [공고서]를 발행하여 이승만 세력을 규탄하기 시작하였다. “김종학의 원수를 갚자”는 세력의 유언비어성 증상모략은 두고두고 이승만을 괴롭힌다. 

    셋째, 대한인국민회 총회장 안창호마저 박용만의 이탈행위를 비난하며 “해산하고 복귀하라”고 권고하면서 그동안의 박용만 무장투쟁론을 직격한다.
    “....우리 동지 중에 아무리 무식하여 판단력이 부족한 이라도 전쟁이 어떤 건지 모르고 그런 문제를 제출하는 것은 허망한 것으로 다시 말할 필요도 없겠고...” (안창호 연설 ‘전쟁종결과 우리의 할 일‘. 주요한 편저 [안창호 전서])

    마침내 박용만은 1919년 3.1운동 직후 5월 19일 하와이를 떠났다.
    어디로 갈 것인가. 무장투쟁 동지들이 기다리는 베이징(北京)에 새로운 터를 잡고, 신채호,·신숙(申肅) 등 이승만의 노선에 반대하는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군사통일촉성회‘(軍事統一促成會)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 ▲ 박용만 병학교의 학도들과 교관들. 앞줄 왼쪽 세번째 박용만 교장.ⓒ연세대이승만연구원
    ▲ 박용만 병학교의 학도들과 교관들. 앞줄 왼쪽 세번째 박용만 교장.ⓒ연세대이승만연구원
    박용만의 암살=1928년 10월 17일 청년 2명이 중국 베이징 근처 농장으로 박용만을 찾아와, 1천원을 요구하였다. 박용만이 거절하자 권총을 뽑아 쏘았다. 이해명(李海鳴)이란 청년이다. 
    이 사건을 둘러싼 의혹은 지금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상하이 임시정부 쪽에서 알려진 것은 박용만의 국내 밀입국과 일본 총독 밀회설이다. 
    김현구(金鉉九)의 [우성유전(又醒遺傳)]에 나오는 설명은 다음과 같다. 
    「박용만은 1924년 말경 중국 군벌 펑위샹(馮玉祥)의 사절단 일원으로 서울에 잠입한다. 박용만은 펑위샹의 세력기반이자 일본군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내몽고에서 한인 둔전병(屯田兵) 양성 계획을 제안하였다. 이에 공감한 펑위샹은 밀사3명을 일본관동군과 조선총독부에 파견한다. 목적은 내몽고에 둔전을 설치하는 것이 러시아 공산주의의 남하를 막기 위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일본에 설득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박용만은 중국인으로 변장하여 밀사 3인과 함께 조선에 밀입국한 것이라 한다. 이러한 박용만의 행동이 결국 독립운동진영으로부터 친일파 혹은 밀정으로 오인 받아 살해되었다는 것이다.」
    하와이 대학 교수였던 서대숙의 연구에 따르면 ’이해명은 수사관에게 자신의 진짜 이름은 박인식이라 밝혔고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원으로 상관은 공산주의자 김시현‘이라고 했다. 또  다른 연구에도 ’김원봉이 직접 증언을 하였고 박용만이 밀정이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증거가 없다고 한다. (서대숙, 박용만과 그의 혁명과제:Pak Yong-man and his Revolutionary Career, 한국민족학 연구, Vol.No.4, 1999 / 박태원, [약산과 의열단], 깊은샘, 2015)

    충격적인 소식에 접한 이승만은 상하이 임시정부 측을 책망하는 편지를 쓴다. 
    이에 주석 김구는 반발한다. “박용만의 제거는 친일행위를 응징한 것이므로 형님이 간여하지 마시라”고 답한다. 이승만은 ”박용만이 그럴 리 없다“면서 폭력투쟁을 자제하라고 말한다.
    김구 쪽에서 박용만 암살에 참여한 것일까? 이에 관한 사실도 명백히 밝혀진 것이 없다고 한다.
  • ▲ 네브라스카 대학시절 박용만이 1908년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 '한인소년병학교' 용지에 썼다.ⓒ연세대이승만연구원
    ▲ 네브라스카 대학시절 박용만이 1908년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 '한인소년병학교' 용지에 썼다.ⓒ연세대이승만연구원
    ★자금도 정처도 없이 악전고투하는 독립운동가들의 고달픈 노선 대결—-군대를 만들어 일본과 독립전쟁을 하겠다는 박용만의 무장독립노선도, 안창호의 무실역행(務實力行) 노선도, 이승만의 ’피를 흘리지 않고도 이기는‘ 교육과 외교 독립노선도, 당시 세계1차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방황하는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을 다시 모으는 뉴스가 들려온다.
    바로 1918년 1월 미국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