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심도 없나?...김정은 온다고 초호화 별장-요트 사다니"국힘, 창조적으로 죽였다 살려라"
  •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사와 광복절 기념사가 천명한 자유의 이념은 안타깝다.
    그 의의(義意)를 정부·여당 사람들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그만큼 한국 역대 집권당과 국민은,
    자유를 연설문에나 등장하는 수사학 정도로나 간주했다.
    마치 공기나 물을 대하는 것처럼. 

    이러고도 자유대한민국이란 말을 쓸 자격이 있을까?
    자괴감이 치솟는다.

    오늘의 아시아 상황에서,
    한반도 상황에서,
    한국 상황에서,
    자유를 지향하고 쟁취하고 수호한다는 건 무얼 어떻게 한다는 뜻일까? 

    아시아 상황과 한반도 상황은 여러 가지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다. 

    이런 비자유(非自由) 민주주의 아래서 살고 싶나?

    비자유(非自由) 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
    즉 ’자유 없는 민주주의‘의 재앙이란 시각에서,
    아시아·한반도·한국을 바라보기로 한다.

    아시아 대륙을 짓누르는 '자유 없는 민주주의'(권위주의)는 이런 것들이다. 

    (1) 미얀마 군벌(軍閥) 독재 같은 전근대적 보나파르티슴, 

    (2) 시진핑·김정은 같은 극좌 전체주의. 

    (3) 중앙아시아 ‘스탄’ 국가들의 개인숭배 권위주의, 

    (4) 이란·아프가니스탄·중동 일대의 종교적 근본주의.  

    (5) 튀르키예(터키) 에르도안의 정교분리 권위주의.

    이 모든 종류의 좌·우 권위주의는,
    그 지역 주민, 특히 여성들에게 자유인들은 상상도 못 할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

    이 비극을 얼마나 절실하게 공감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윤석열 대통령이 말한 ‘자유’란,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실체냐,
    아니면 단순한 수사학이냐가 결판 날 것이다.

    핏물 뚝뚝 떨어지는 자유의 실체는?

    자유와 인권을 염원하는 중국 정치범들,
    티베트인들,
    직업훈련원이란 가짜 이름의 수용소에 갇힌 신장·위구르인들,
    싸우는 미연마 민주 국민과 자유 레지스탕스 대원들,
    얼마 전 사형을 집행당한 미얀마 정치범 4명과 그 유가족들,
    아프가니스탄 여성들,
    북한 수용소 군도(群島) 정치범들,
    북한 지하기독교인들,
    카렌족·로힝야족·체첸족 등 아시아 소수민족들.

    이 모든 피압박자들이 흘리는 피와 눈물을,
    오늘의 태평스러운 한국인들은 과연 알까, 모를까?
    모를 것이다.
    내가 알 게 뭐냐 할 것이다. 

    우상호에게 묻고 싶다

    586 운동권 우상호는,
    “윤석열 정부 국정 우선 과제 중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이 그렇게 중요한 일인지 모르겠다”
    “먹고 사는 문제가 얼마나 급한데 이게 왜 현안이냐?”
    고 했다. 

    그렇다면 우상호는,
    왕년에 ‘먹고살기 힘든데’ 민주화 운동이란 이름의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혁명(NLPDR)’ 짓은 왜 했나? 

    까짓(?) 남의 나라 고통이니 그런다 치고,
    그러나 적어도 오늘의 비(非) 좌파 정치인이라면,
    그리고 자유 대한민국 시민이라면,
    그래도 자기가 사는 나라의 임박한 전체주의 위협쯤엔 관심을 좀 가져야 하지 않을까? 

    전체주의가 엄습하면,
    가장 먼저 깨갱 하며 “아이고 죽겠네, 사람 살려” 할 자들은,
    바로 “난 그런 덴 관심 없다“고 하는 무관심층일 것이다. 

    그런 자들이 혼나는 꼴을 보고 싶은 짓궂은 심보에서라면,
    그런 재난이 ‘닫치기 5분 전’까지는 아슬아슬하게 와봤으면 싶다. 

    한국 같은 선진국에서 웬 ‘극좌 전체주의 위협’이냐고?
    웬 과잉 호들갑이냐고?
    그렇다면 물어보자.

    민노총의 배설물..."가공할 역모다"

    8.15 민노총 도심 반미(反美) 집회를 어떻게 보나?
    그런 자들이 백주 대로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고 북한 직업동맹의 연대사(連帶辭)라는 걸 여봐란 듯 읽었다.
    한미·동맹과 한·미 연합훈련도 깨버리겠다고 거품을 물었다.

    이 가공할 역모의 배설물을 어떻게 보느냔 말이다.
    이러고도 대한민국이랄 수 있나?
    무시해 버리면 그만이라고? 

    허허,
    계속 그렇게 놓아둬 봐라.
    그래서 나중엔 어느 지경까지 갈 것인지를 두고 봐라.

    이런 무책임한 ‘가치 허무주의’를 깨지 않고선,
    비(非)자유 민주주의 위협, 자유민주주의 위기를 절감하지 않고선,
    한국인들은 극좌 전체주의로부터 생명과 재산과 사람다움을 좀처럼 지켜낼 수 없을 것이다. 

    중도실용?
    자유와 압제 중간쯤에 엉거주춤 서자고?

    ”싫다. 완전한 자유 쪽에 서겠다“면?
    어쩔래? 

    어른거리는 북한 주사파 시진핑 제국주의

    이제 우익 권위주의 독재는 더는 없다.
    앞으로 올 건 오고 있는 건,
    극좌 전체주의 일당독재,
    즉 시진핑·김정은의 ‘인민 전정(人民 專政)’이다. 

    한국 좌파 운동 배경엔 언제부터인지 이미 북한 주사파 시진핑 제국주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이 바뀐 권위주의 얼굴을 똑똑히 제대로 알아봐야 한다. 

    미국과 서구 학계는 권위주의란 우익 쪽에만 있다고 설정했었다(RWA).
    비판이론(新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아도르노(Adorno)가 그랬다.
    근래엔 사회심리학자 알티메여(Altemeyer)가 그 줄에 섰다.  

    그러다 더 근래엔 코스텔로(Costello) 교수팀이 7천여 개 사례 연구를 통해,
    ”권위주의는 좌익 극단주의에도 있다(LWA)고 실증했다.
    좌파가 장악한 미국 대학도 변하는 낌새다.

    한반도인들과 한국인들에겐,
    그러나, 그런 실증이 굳이 필요 없다.
    한국 자유인들은 체험을 통해,
    민주화 운동 주도권이 어떻게 자유주의자·온건 진보주의자들 손을 떠나,
    극좌 주사파·레닌주의자 손아귀로 넘어갔는가를 너무나 생생하게 피부로 느꼈고 알았다. 

    자유의 예봉은,
    < 따라서 1987년 민주화 후론 극좌 전체주의 일당독재를 향해 정조준해야 한다.
    조지 오웰의 <1984>가 말해주었듯이. 

    네안데르탈인은 왜 멸절했을까?

    네안데르탈인은 왜 호모 사피엔스에게 자리를 내주었나? 

    호모 사피엔스는 교환(barter)을 알았고,
    네안데르탈인은 그걸 몰라  그리됐다는 이야기가 있다.
    교환 상업 경영을 하다 보니 공정한 룰(rule)의 지배가 생겼고,
    거기서 다시 자유로운 생활 양식이 생겼다는 설이다.
    실제인진 의문이나 그럴듯한 이야기다. 

    한반도에서도 이 과정은 예외가 아닐 것이라 믿으면, 지나친 낙관일까?
    그 낙관은 지난 5년 사이 비관으로 변질했다.
    비겁한 우파 일부가 ‘자칭’ 진보’에 찍히지 않으려 우~하고 좌클릭한 탓이다.
    우파라는 미디어들 메신저들까지 그랬다.
    김정은이 오면 모시려고 초호화 별장과 요트까지 마련하려 했다. 

    우파 스스로 초래한 미친 세월

    치사하게 되었다.
    좌파는 좌파니까 그랬다 치지만,
    우파란 일부마저 자긍심 자신감 자존심을 송두리째 스스로 갖다 바친 미친 세월이었다.

    스스로 초래한 그 치욕을 이젠 떨쳐버려야 한다.
    그러려면 자유는,
    공기와 물처럼 공짜일 수 없는 생명 그 자체라는 걸 알아야 한다.

    국민의 힘부터 구체제 잔재인
    친이계,
    강남좌파,
    기회주의자,
    중간파,
    탄핵 파,
    바른미래당,
    박근혜보다 더 ’친박‘이려는 분파,
    이런 과거사는 역사의 기록으로 넘겨야 한다. 

    국민의 힘 뜻있는 인사들이 재야 투사들과 손잡고 국민의 힘을 창조적으로 죽였다 살려야 한다.
    정통 자유 나무에 뿌리박은 정통 자유 레지스탕스 전사집단을 장엄하게 재창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