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공인에 대한 '표현의 자유' 인정… '고영주 유죄' 원심 파기
  • 8년 전 한 공개석상에서 당시 대선 후보였던 문재인 대통령을 가리켜 '공산주의자'라고 말했다는 이유로 불구속 기소된 고영주(72·사진 좌) 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에게 대법원이 무죄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 3부(주심 안철상 대법관)는 지난 16일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에 회부된 고 전 이사장의 상고심에서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 2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중앙지법으로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400여명이 모인 신년하례회에서 피해자(문재인 대통령)에 대해 자신의 경험담 등을 근거로 '공산주의자'라는 취지로 발언한 것은 공적 인물인 피해자의 정치적 이념이나 행적 등에 관해 자신의 평가나 의견을 표명한 것에 불과하다"며 "피해자의 명예를 훼손할만한 구체적인 사실의 적시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려워, 이를 '허위 사실의 적시에 해당한다'고 본 원심판결을 파기 환송한다"고 판시했다.

    대법 "'문재인은 공산주의자'라는 발언, 명예훼손죄 아냐"

    공적 인물의 경우 비판과 의혹 제기를 감수해야 하고, 그러한 비판과 의혹에 대해서는 해명과 재반박을 통해 극복해야 한다고 전제한 재판부는 "다만 사람이나 단체가 가진 정치적 이념은 외부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을 뿐 아니라 그들이 어떠한 이념을 가지고 있는지를 정확히 증명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므로, 정치적 이념에 관한 논쟁이나 토론에 법원이 직접 개입해 사법적 책임을 부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에 따라 피고인이 피해자를 공산주의자라고 지칭한 것은 그 개념의 속성상 피해자가 갖고 있는 생각에 대한 평가일 수밖에 없고, 그 평가는 판단하는 사람의 가치관에 따라 상대적이어서 이를 증명이 가능한 구체적 사실이라고 보기 어렵다"며 "누군가를 공산주의자라고 표현했다는 사실만으로 명예를 훼손할만한 구체적 사실의 적시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못박았다.

    문재인 대통령이 소송을 제기한 지 만 6년만에 무거운 짐을 벗게 된 고 전 이사장은 17일 본지와의 통화에서 "유력 정치인의 이념은 국가적으로 큰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공개하고, 수시로 검증과 토론의 대상이 돼야 한다는 지론에는 변함이 없다"며 "1심 재판부는 제 발언에 문재인 대통령을 모멸하려는 의도가 보이지 않고, 그런 취지의 의견 진술이나 문제 제기는 광범위하게 허용해야 한다고 판결했는데, 2심 재판부는 제 발언이 단순한 의견 표명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검증 가능한 구체화된 허위사실의 적시에 해당한다고 판결해 납득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고 전 이사장은 "애당초 기소가 될 수도 없는 사건으로 6년째 들들 볶였는데 이번 대법원 판결로 한시름 놓게 됐다"며 "문재인 정부 들어 '표현의 자유' 만큼은 계속해서 허용 범위를 넓혀왔던 사법부가 이에 역진하는 판결을 내리기는 힘들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앞서 문 대통령이 같은 이유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 항소심에서 1000만원 배상 판결(원고 일부 승소)을 받은 고 전 이사장은 "공인에 대한 '표현의 자유'를 인정, 저를 명예훼손죄로 처벌할 수 없다고 판시한 대법원 판결이 민사 재판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으로 전망한다"며 "문 대통령에 대한 법적 대응 여부는 파기환송심과 민사소송 3심 결과를 지켜보고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고영주 "부림사건은 민주화운동 아닌 공산주의운동"

    지난 2013년 1월 4일 고 전 이사장은 '애국시민사회진영 신년하례회'에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 위원장 자격으로 참석, "이 사람(문재인 후보)이 대통령이 되면 우리나라가 적화되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문제"라고 전한 뒤 "부림사건은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공산주의 운동이며 (부림사건 변호를 맡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 후보도 그걸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밝혀, 정치권에 뜨거운 화두를 던졌다.

    이로부터 2년 후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의 법률대리인(당 법률위원장)을 맡은 박성수 송파구청장이 고 전 이사장을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는 한편, 1억원의 손해배상까지 청구하는 민사소송을 제기하면서 양측간 법정 공방이 전개됐다.

    이에 형사소송 1심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형사11단독(부장판사 김경진)은 "피고인의 자료나 진술 등을 보면 악의적으로 모함하거나 인격적인 모멸감을 주려는 의도는 보이지 않고, 오히려 자유민주주의 체제라고 믿어 온 체제의 유지에 집착하는 것으로 보인다"며 "한국전쟁을 겪은 세대와 이후 세대가 생각하는 공산주의 개념이 다른 것처럼 피고인이 표현한 공산주의의 개념도 다르고, 따라서 공산주의자란 표현이 허위 사실인지를 판단할 수 없다"고 고 전 이사장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2심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형사항소9부(부장판사 최한돈)는 "피해자가 대통령이 되면 우리나라가 적화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하는 것은 피고인의 경험담이나 이를 기초한 것이기 때문에 사실 적시에 해당한다"면서 "명예훼손죄에 해당한다는 데 문제가 없다"고 판시했다.

    그러면서 "이 발언의 중대성과 우리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이념갈등을 고려하면 이 발언은 표현의 자유 범위 안에서 적법하게 이뤄진 것으로도 보기 힘들다"며 원심을 파기하고, 고 전 이사장에게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앞서 문 대통령이 고 전 이사장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심리한 서울중앙지법 민사83단독(부장판사 김진환)은 고 전 이사장에게 3000만원의 배상 책임이 있다고 판결했다. 항소심 재판부(서울중앙지법 민사항소7부) 역시 고 전 이사장에게 배상 책임이 있음을 지적했으나 당시 고 전 이사장의 발언이 연설문 없이 즉흥적으로 이뤄진 것이라는 점을 참작해 배상액을 2000만원 감액했다. 이후 고 전 이사장이 항소심 판결에 불복하면서 이 사건은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