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군 수백명 학살, 궤멸적 타격 입혔는데…文, 대한민국장 서훈하고 현충원 안장자유시 참변 이후 소련 적군에 편입… '장군'으로 알려졌지만 실체는 소련군 대위 독립운동했지만 뚜렷한 반민족행위… 소련 공산당에 충성해 '건국유공자' 자격 논란
  • ▲ 독립기념관은 서거 후 78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홍범도 장군(1868∼1943년)의 생전 미공개 영상과 사진 등 16점을 17일 공개했다. 사진은 1922년 1월 홍범도 장군의 모습. ⓒ독립기념관 제공 / 연합뉴스
    ▲ 독립기념관은 서거 후 78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홍범도 장군(1868∼1943년)의 생전 미공개 영상과 사진 등 16점을 17일 공개했다. 사진은 1922년 1월 홍범도 장군의 모습. ⓒ독립기념관 제공 / 연합뉴스
    문재인정부가 올해 광복절을 기해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 안장됐던 홍범도의 유해를 가져와, 17일 그에게 건국훈장 1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추가 서훈했고, 18일 대전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이러한 과정은 많은 논란을 낳았고, 이런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는 훨씬 더 정밀한 토론이 필요하다. 그가 무장독립운동을 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1921년 이후 그의 행적은 논란투성이다.

    1921년 한인사회당의 당수이자 한국 공산주의의 아버지 격인 이동휘의 선전에 따라 만주, 연해주의 무장독립세력은 소련 아무르 지역의 자유(自由)시(스보보드니: 스보보드니는 러시아어로 자유의 뜻이기에 한국에서는 이 도시를 ‘자유시’라고 부른다. 러시아어 발음은 ‘스바보드니’에 더 가깝다)에 집결했다.

    이동휘는 소련공산당에게 어마어마한 돈을 받고 한국의 독립군들을 소련군으로 편입시키려는 흉계를 가졌다. 자유시에 모인 4500명 정도 되는 이들에게 여러 지원을 약속한 소련 볼셰비키 정부는 이들을 적군(赤軍, Red Army)으로 강제 편입시키려 했고, 이에 응하지 않는 한인들을 1921년 6월 28일에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이것이 유명한 자유시 참변이다. 그때 홍범도는 소련군의 편에서 이 학살에 가담했다.

    희생자 수는 기록마다 다르지만, 한인 피해자가 많았던 것에는 의견일치를 이룬다. 광복군 참모장을 지내고 1948년 대한민국 수립 후 대한민국 육군 중장, 외무부 장관을 지낸 김홍일은 이때 한국 독립군은 700~800명 사망, 부상자 수백 명, 벌목 노동장으로 끌려간 인원수는 1000여 명이 넘는다고 기록했다. 자유시 참변 이후에도 항일 무장독립군은 시베리아와 만주 여러 곳에서 사살·체포당하거나 강제노동에 끌려갔다. 이 이후 만주에서 한인들의 자생적 무장 항일투쟁은 사실상 사라졌다.

    홍범도는 그 직후 이런 협력의 대가로 1922년 2월 모스크바에서 소련의 최고지도자인 블라디미르 레닌으로부터 금화 100루블과 군복 한 벌, 홍범도의 이름이 새겨진 권총 등을 선물로 받았다. 자유시 참변 이후 홍범도는 휘하 병력 300명을 소련 적군(Red Army)에 편입시켰고, 그 자신은 소련군 제5군단 합동민족여단 대위로 편입됐다.

    즉 그는 장군이 아니라 소련군의 대위였다. 김일성이 실제로 장군이 아니고 소련군 대위로 소련군과 함께 1945년 한반도의 북부지역으로 들어온 것과 흡사한 장면이었다. 김일성은 이후 소련군 소령으로 진급했다. 홍범도는 1937년 스탈린의 악명높은 한인들에 대한 중앙아시아 강제추방으로 카자흐스탄으로 옮겼으며 극장의 수위로 지내다가 1943년 10월 25일 사망했다. 필자가 1994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카자흐스탄 고려인 원로 언론인에게 들은 바로는 그 지역 깡패에게 살해된 것이라고 했는데, 더 알아봐야 할 부분이다.

    홍범도의 자유시 참변 참가는 '반민족 행위'였고 그 이후 무장 항일운동의 씨를 말린 직접적 이유가 됐다. 그는 건국훈장 1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수여 받았지만 사실 그는 대한민국건국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는 소련 공산당 당원이자 소련군 대위로서 공적 생활을 마친 사람이다. 죽을 때까지 공산주의자였고 그의 고향은 평안도이니 차라리 북한으로 송환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수도 있다. 실제로 북한정권은 홍범도 유해가 한국에 가는 것을 격하게 비판하고 북한으로 와야한다고 주장했다. 자유시 참변은 항일무장독립운동사에 '궤멸적 타격'을 입힌 사건이며 홍범도는 소련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하며 이 참변에 가담했다. 홍범도는 자유시 참변 직후 있었던 소련군에의 편입을 거부한 독립군을 처벌하는 재판의 재판장을 맡기까지 했다. 게다가 자유시 참변은 우발적 사건이 아니었다. 러시아 내전 중에 볼셰비키 정권과 백군을 돕는 일본 사이에 비밀정전협정을 맺으며, 일본이 철수하는대신 만주 연해주에서 한국무장독립군 정리를 일본이 요구해서 꾸며진 계략이었다. 그리고 소련 볼셰비키 정권의 사주를 받은 이동휘의 꼬임에 넘어간 사건이었다.

    문재인 정권과 한국 좌파들 그리고 국사업자들(한국 PD공산주의 운동의 선구자였다가 자유주의자로 거듭난 박성현은 대부분 한국의 국사학자들은 학자가 아니고 국사업자라고 부른다)은 의도적으로 공산계열 인사들을 우대한다. 북한 정권의 검열상으로 6.25 전쟁의 전범(戰犯)인 김원봉을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라고 주장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조차 있었다. 차라리 광복군의 최고지도자들이었다가 대한민국의 건립과 건군(建軍)에 참여한 지청천, 이범석, 김홍일을 국군의 뿌리라고 얘기하는 것은 일리 있는 주장일 것이다.

    또한 이들은 아무리 독립운동을 했어도 이후 행적에 문제가 있으면 여지없이 반민족행위자라는 낙인을 찍었다. 기미독립선언문을 쓴 최남선, 애국가의 작사가인 윤치호를 위시해서, 이광수, 장덕수, 송진우, 이묘묵, 신봉조 등 무수히 많은 지식인들은 3.1 운동 시에 투옥되는 등의 항일운동을 한 선각자들이었다가, 나중에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 중일전쟁 이후 일본의 태평양전쟁을 지지하는 단체) 참여 등의 행위 때문에 “반민족행위자”라는 칭호를 받게 됐다.

    그러나 똑같은 기준을 홍범도에게 들이댄다면 그의 후반부 행각은 반민족행위였고 소련 공산당과 소련군에 대한 충성이었기에 절대로 건국유공자가 될 수 없고 독립지사가 될 수 없다. 같은 기준으로 엄밀히 평가한다면 말이다.

    ‘전광’이란 가명을 쓰고 공산주의자로서 항일운동을 한 전설적 인물이 있었다. 그의 본명은 오성륜(吳成崙)이었다. 한국 좌파들의 그리도 좋아하는 님 웨일스의 “아리랑”을 보면 오성륜의 항일운동은 대단했다. 그러나 그는 많은 다른 이들처럼 중일전쟁 이후 일본에 협력하는 길을 택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에게는 “반민족행위자”라는 낙인이 없다.

    북한으로 넘어가 부수상 등 온갖 높은 직위를 가졌던 홍명희도 분명히 “임전대책협의회”라는 일본의 전쟁을 지지하는 단체에서 활동했지만 역시 반민족행위자라는 낙인이 없다, 공산계열 인사들 또는 북한이나 소련 공산당에 협조한 인물들에 대해선 한없이 관대한 처분이 내려진다. 요번 홍범도 유해 안장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를 보면 마치 대한민국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된 듯한 느낌까지 받는다. 이런 심각한 문제들을 앞으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