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관 아들의 휴가와 농부 아들의 휴가는 한 세대가 지나도 비교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 1992년 12월, 입대 후 10개월 만에 첫 휴가를 나와서 찍은 필자의 사진. 군생활을 하면서 얼굴이 햇볕에 너무 타서 카메라 플레쉬를 터트렸는데도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뉴데일리
    ▲ 1992년 12월, 입대 후 10개월 만에 첫 휴가를 나와서 찍은 필자의 사진. 군생활을 하면서 얼굴이 햇볕에 너무 타서 카메라 플레쉬를 터트렸는데도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뉴데일리
    나는 1992년 3월 입대해 1994년 7월까지 27개월 동안 군복무를 했다. 세월은 쏜살같이 흘러 내가 입대한 시점으로부터 한 세대에 가까운 27년이 흘렀다. 최근 추미애 법무부장관 아들(서씨)의 군 휴가 특혜논란을 보면서 대한민국에서 나의 군 시절이 자연스럽게 겹쳐졌다. 추미애라는 대한민국 장관 아들의 ‘황제휴가’ 논란과 돈 없고 빽 없는 농부의 아들이 군에서 겪은 휴가 모습이 비교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요즘 병영생활은 내가 군생활을 했을 때와는 비교 자체가 힘들 정도로 많이 변했다. 따라서 오래 전 군대 경험을 가지고, 21세기에 신세대 병영에서 일어나는 문제와 비교하며 왈가왈부하는 것은 경우에 맞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한반도의 분단현실이 여전하고, 그에 따른 ‘국민개병제’라는 본질이 그때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북한의 핵무장으로 한반도의 긴장과 위기상황 등 객관적인 정세는 내가 근무하던 시절보다 훨씬 불안하다고 할 수 있다. 헌법에 명시된 국방의 의무 조항 또한 변동 없이 유지되고 있다.

    게다가 요즘 아무리 군대가 편해지고, 내무생활에 편의시설이 갖춰졌다고 한들 의무입대와 낮은 보수, 단체생활은 개인주의와 개성이 강한 신세대 장병들에게는 쉽지 않은 환경일 수 있다. 단순히 편해진 것만으로 군생활의 잣대를 삼는다면, 군대 내의 자살이나 자살충동, 총기사고, 탈영, 따돌림 등의 사건·사고가 해마다 증가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어진다. 따라서 군대가 편해진 것과 단체생활에서 오는 신세대 장병들이 받는 스트레스 강도는 별개의 문제로 보는 게 옳은 시각이라 할 수 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내가 굳이 케케묵은 나의 군생활을 꺼내서 추미애 장관의 아들 휴가와 비교하는 것은 지금과 당시의 두 시대를 단순비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하지 않은 대한민국의 지도층의 이기적이고 타락한 모습을 반추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미복귀 상태로 23일 연속 휴가? 있을 수 없는 일"


    나는 추미애 장관 아들의 휴가 특혜 의혹 사건을 처음 접했을 때 사건 자체를 이해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일단 내가 군 복무 시절에는 들어보지 못했던 ‘병가’라는 제도 때문이다.

    통상 ‘병가’라면 집이나 의료시설에서 치료받을 목적으로 휴가를 내는 것을 의미하는데, 군대에 왜 민간기업에서 운영하는 병가제도가 존재하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군인이 수술 후 일반병원에서 장기간 치료를 받는다는 것도 나의 군 상식으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이 때문에 나는 추미애 장관 아들 휴가 특혜 문제가 불거졌을 때 보통 연예인 병사가 다른 병사들보다 휴가를 더 많이 사용하는 것처럼, 추 장관 아들도 그런 일에 휘말린 것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보도를 보고 경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추 장관의 아들 서씨는 한  번 병가로 휴가를 나온 사병이 복귀하지 않은 상태에서 휴가를 두 번이나 연장을 해서 19일의 병가를 사용했고, 미복귀 상태에서 또 다시 추가 휴가를 신청해 나흘간이나 휴가를 더 사용했다는 것이다. 사실이라면 군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병가 외에도 추 장관 아들은 같은 시기 근무한 카투사 병사들의 평균휴가일수(33일)보다 25일이나 더 많은 58일의 휴가를 사용했다.

    "박노항 검거‥ 20년 지났지만 '신의 아들' 여전히 존재"


    군대는 보고와 명령으로 움직이는 집단이다. 상부 명령 없이는 영외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할 뿐 아니라, 휴가나 업무차 영외로 나갔던 병사가 복귀시간을 지키지 않으면 그 즉시 탈영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추 장관 아들 서씨는 관련 서류 하나 없이 휴가를 세 차례나 연장받는 비상식적인 일이 벌어진 것이다.

    나는 추 장관 아들 사건을 처음 접했을 때 그런 일을 저지른 개인의 잘못을 탓하기 앞서 규정이 적용되지 않은 군기가 있는대로 빠진 우리 군의 한심한 모습에 개탄이 먼저 나왔다. 야당 대표의 청탁에 이처럼 쉽게 무너지는 군대라면, 이는 추 장관 개인의 일탈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2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두 명의 이름이 있다. 바로 우리나라 병역비리의 대명사로 알려진 ‘원용수 준위’와 ‘박노항 원사’다. 이 두 사람이 저지른 광범위한 병역비리 범행은 1998년에 발각되었다. 이 가운데 박노항 원사는 여장(女裝) 차림으로 3년을 숨어 살다 2001년에야 검거되었다.

    이들은 내가 입대할 무렵인 1990년대 초에도 병무청에 있으면서 수없이 많은 부유층과 권력층, 군 장성들로부터 돈을 받고, 군대를 빼주거나 편한 보직으로 옮겨주었다. 박노항은 청탁 건마다 당시 돈으로 1000만원을 받았고, 그가 챙긴 돈은 100억대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이 검거되었을 때 나는 ‘바로 저 사람들 때문에 내가 힘든 부대에 배치받아 그토록 고생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노항이 검거된 지 20년이 되었지만 당시 내가 가졌던 대한민국 군대와 병무행정에 대한 배신감과 허탈감을 잊지 못하고 있다.

    "입대 1년 만에 '바깥' 구경… 매일 휴가 나가는 꿈"


    1992년 3월25일, 나는 어머니의 배웅 아래 춘천 102보에 입대했다. 개나리와 진달래가 망울이 올라오는 완연한 봄의 길목이었지만, 꽃샘추위가 제법 쌀쌀했다. 지금은 해체된 양구의 2사단 노도부대 신병훈련소에서 6주간의 훈련을 거친 뒤, 5월 초에 자대배치를 받았다.

    나는 일병을 달고 입대한 지 10개월 만에 기다리던 첫 휴가를 나왔다. 쌀쌀하던 춘3월에 입대하여, 그해 12월 발목까지 쌓인 위병소 앞 눈길을 헤치며 걸어나왔다. 눈 미끄럼을 타면서 동기들과 남면으로 뛰어가던 당시의 흥분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도 그럴 것이 10개월 만에 나온 휴가였지만, 군에서 봄·여름·가을·겨울을 다 겪었으니 그야말로 1년 만에 바깥세상을 구경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군에서 공식 휴가는 일병·상병·병장(말년휴가) 때마다 한 번씩 모두 세 번 주어진다. 그 사이에 부대장의 재량에 따라 2박3일, 3박4일, 4박5일 단위의 각종 포상휴가·위로휴가 등이 끼어 있다.

    정규휴가는 일병 첫 휴가의 경우 9박10일, 나머지 상병과 병장 때는 8박9일로 기억하고 있다. 나는 27개월 군생활 중 진급 시 주어지는 세 번의 공식휴가와 1993년 팀스피리트 훈련으로 연대 전체가 받은 4박5일 간의 단기 포상휴가 한 번을 포함, 총32일의 휴가를 받았다. 그 외 어떤 휴가도 나온 적이 없었다.

    휴가를 몇 개월 앞두고부터 나는 매일 휴가 나가는 꿈을 꾸었다. 부모님은 어떻게 계시는지, 올 가을 추수는 내가 도와드리지 못했는데 잘했는지, 동기와 후배들은 잘 있는지 등...

    너무 먼 고향길… "'나는 잘 있으니 면회 오지 마시라' 당부"


    고향인 경북 예천의 시골 고향집까지 내려가자면 양구에서 횡성까지 간 후 다시 원주에서 안동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꾸불거리는 국도를 따라 안동에 간 다음 안동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집에 가야 했다. 휴가 올 때 갈 때 이틀을 온전히 길에서 버려야 했다.

    안동에 도착하면 시골로 들어가는 막차는 늘 끊긴 후였다. 부대에서 주는 휴가비(차비)로는 버스요금도 빠듯했기 때문에 택시를 탈 수도 없었다. 하염없이 걷다가 길 가는 차를 세워 타거나, 일단 남의 차를 얻어타고 가다가 도중에 내려서 거기서 다시 몇 시간을 터벅터벅 걸어 밤 12시가 넘어 집에 도착한 적도 있었다. 그래도 그때는 군인이라고 차를 세우면 다들 방향이 맞는 곳까지는 태워주었다.

    나는 또한 자대배치 후 제대할 때까지 단 한 차례의 가족이나 친구 면회도 오지 않은 우리 중대 내의 유일한 병사로 기록되었다. 부모님이 경북 예천에서 강원도 양구로 면회를 한 번 오려면 최소한 3일이 소요되었다. 나도 누구보다 면회 오는 전우들이 부러웠으나 집으로 보내는 편지에는 늘 “군생활 잘하고 있으니 면회는 아예 올 생각을 하지 마시라”고 당부했다.  

    "배경 없는 농부‥ 도시서민 자식들만 '빡센' 군생활"


    앞서 박노항 원사 이야기를 했지만, 내가 군생활 때도 이른바 사회 지도층은 자식들을 군에 보내지 않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렇게 부모의 힘과 빽에 의해 군에 가지 않는 이들을 ‘신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이들 고위층·부유층의 자식들은 불가피하게 입대하더라도 무슨 조화를 부려서 6개월 혹은 18개월 방위로 줄줄이 빠지곤 했다.

    입대 후에도 자식들을 조금이라도 편한 부대로 빼돌리기 위한 경쟁이 치열했다. 102보에서 빼고, 훈련소에서 빼고, 사단에서 빼고, 연대에서 뺀다. 이렇게 빼고 빼고 하다 보면 결국 나처럼 아무런 배경이 없는 농부의 자식과 도시서민의 자식들은 가장 힘들다는 부대에 배치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이렇게 이른바 저주받은 ‘어둠의 자식들’이 군에서 밤낮없이 구르며 훈련을 받는 동안, 부모를 잘 만난 ‘신의 아들’들은 고시에 합격하고, 대기업에 들어가고, 국회의원이 되고, 장관이 되었다. 이들은 한 세대가 지난 오늘날에 와서도 자신이 부모 덕에 가졌던 손쉬운 출세의 길을 제 자식에게 물려주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고 있다.

    추미애 아들 사건을 보며 내가 가장 절망한 것은 이처럼 조금도 변하지 않은 대한민국의 현실이었다. 20대 초반의 나를 절망시켰던 이런 후진국형 범죄행위가 21세기 대한민국 군대에서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서글프게 다가왔다. 그래서 장관 아들의 휴가와 농부의 아들 휴가 비교는 한 세대가 지나도 유효한 것이다.

    돈 없고 빽 없던 가난한 농부였던 아버지는 입대하기 위해 큰절을 올리는 아들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내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은 아래와 같은 말 한마디였다.

    “상관 말 잘 듣고 몸 건강하거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