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사우디 영사관서 토막살해"… 사우디 "왕실과 무관"… 트럼프, 대놓고 사우디 편들어
  • ▲ 사우디아라비아 언론인 '자말 카쇼기(Jamal Khashoggi)'. ⓒ 연합뉴스
    ▲ 사우디아라비아 언론인 '자말 카쇼기(Jamal Khashoggi)'. ⓒ 연합뉴스
    지난 2일(현지시각) 약혼녀와 재혼하기 위해 전 아내와의 이혼 증빙서류를 떼러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사우디아라비아 총영사관을 찾은 중년 남자가 갑자기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올해 나이가 예순인 이 남성은 영어로 '자말 카쇼기(Jamal Khashoggi)', 현지어로 '자말 카슈끄지'로 불리는 사우디아라비아 출신 언론인이었다. 

    사우디에서 유력 일간지 기자로 활동하던 그는 모하메드 빈 살만(Mohammed bin Salman) 왕세자 등 사우디 왕실 권력을 비판하는 칼럼을 수차례 썼다가 반정부 인사로 내몰려 해외를 떠도는 신세가 됐다. 이러한 그의 사정을 잘 알고 있던 터키인 약혼녀는 "아무래도 카쇼기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며 실종 신고를 했고 터키 당국은 즉각 수사에 나섰다. 

    며칠 뒤 터키 당국은 충격적인 사실을 언론에 알렸다. "카쇼기가 총영사관 안에서 토막 살해 당한 것 같다"는 1차 수사 결과를 발표한 것.
  • ▲ 모하메드 빈 살만(Mohammed bin Salman)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 스플래쉬닷컴
    ▲ 모하메드 빈 살만(Mohammed bin Salman)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 스플래쉬닷컴
    "카쇼기, 사우디 암살단에 붙잡혀 7분 만에 사망"

    터키 당국은 카쇼기가 사라진 날 15명의 사우디 남성이 터키에 입국한 사실에 주목했다. 조사 결과 정체불명의 이들 남성은 사우디 왕실에서 급파한 전문 '암살단'이었다. 이중에는 '시신 해부 전문가'도 포함돼 있었다고 한다. 

    터키 당국은 "영사관 CCTV에 카쇼기가 들어온 모습은 찍혔어도 나가는 모습은 담기지 않았다"며 "안에서 사망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밝혔다. '예니 샤파크(Yeni Safak)' 등 터키 언론은 한 발 더 나아가 "카쇼기는 영사관 안에서 암살 요원들에게 붙잡혀 손가락이 잘리는 등의 모진 고문을 당하다 7분 만에 사망했고 시신은 여러 토막으로 절단됐다"면서 자세한 사망 과정까지 묘사했다. 

    "손가락 절단 등 고문 당한 뒤 토막살해"

    배후 인물로는 사우디 왕실의 실세, 모하메드 빈 살만이 지목됐다. 카쇼기는 생전 빈 살만 왕세자가 쿠데타에 가까운 시도로 정권을 찬탈하고 반대파를 숙청했다며 그를 무자비한 독재자로 묘사해 사우디 왕실의 미움을 샀다. 

    사사건건 개혁 정책을 비판하고 보수층을 대변해온 카쇼기는 '왕위 계승권'마저 확보한 빈 살만에겐 마지막으로 넘어야 할 산이었다. 동기는 충분했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카쇼기가 실종된 사우디 총영사관 밖에서 빈 살만의 개인 경호원을 봤다는 목격담이 전해졌고, 빈 살만이 사우디 공안 당국에 "카쇼기를 압송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워싱턴포스트 기사까지 타전됐다. 당시 현장 요원이 빈 살만 측근과 수차례 통화를 나눴다는 얘기도 나왔다. 여기에 터키 당국은 "카쇼기의 살해 과정을 담은 음성과 영상파일이 확보했다"며 사우디 왕실을 향한 의구심을 더욱 가중시켰다.

    사우디 "몸싸움 벌이다 숨졌다" 공식 발표

    당초 "카쇼기가 영사관을 제 발로 걸어 나간 뒤 실종됐다"고 밝혔다가 'CCTV에 나가는 모습이 찍히지 않았다'는 터키 당국의 설명에 머쓱해진 사우디 정부는 "지난 2일 총영사관에 들어간 카쇼기가 용의자들과 몸싸움을 벌이다 사망했다"는 공식 입장을 밝혔다. 사우디 정부는 카쇼기가 타살됐음을 암시하는 단서가 속속 드러나면서 뒤늦게 '사망'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카쇼기가 사우디 왕실이 보낸 암살단에 의해 살해됐을 수 있다는 의혹 만큼은 철저히 부인으로 일관했다.
  •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 연합뉴스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 연합뉴스
    사우디 "카쇼기 사망 사건, 왕실과 무관"

    사우디 검찰은 "터키 이스탄불 주재 사우디 영사관에 들어갔던 카쇼기가 용의자들과 주먹다짐 끝에 사망했다"며 고문이나 타살, 신체절단설을 부인하면서도 ▲그가 무슨 이유로 용의자들과 다퉜고 ▲가해자가 누구인지 ▲어느 정도의 몸싸움이 벌어졌길래 사망했는지 ▲현재 시신은 어디에 있는지 등에 대해서는 자세한 언급을 회피했다.

    사우디 외무장관이 밝힌 공식 입장은 더욱 기막혔다. 아델 알주바이르(Adel al-Jubeir) 사우디아라비아 장관은 지난 21일 미국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용의자들을 모두 조사했으나 빈 살만 왕세자와 무관한 이들로 확인됐다"며 "카쇼기를 우발적으로 죽인 것은 사우디 왕가의 지시를 받지 않은 자들이 벌인 독자적인 범행"이라며 철벽방어에 나섰다. 한 마디로 반정부 인사인 카쇼기를 해친 것은 그를 억지로 송환하려던 부하들의 '과잉 충성'에서 비롯된 작전이었다는 것이었다.

    트럼프는 "무죄추정의 원칙" 강조

    놀라운 점은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식의 사우디 측 해명에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되레 맞장구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사건 직후 빈 살만 왕세자와 통화를 나눈 뒤 "그는 카쇼기 사망 사건과 (자신을 포함한) 사우디 왕실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해명했다"며 "철저한 조사를 하겠다고 약속한 만큼 조만간 진상이 밝혀질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만일 사우디 왕실이 이번 사건의 배후로 밝혀진다면 강력히 처벌해야 한다"고 밝히면서도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선 "무죄 추정의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고 말하는 등 끝까지 사우디 왕실을 감싸도는 발언을 했다. 또 트럼프 대통령은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선 "빈 살만 왕세자는 진정한 애국자"라면서 "그가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길 원하지 않으며 사우디가 여전히 미국의 대중동 정책의 핵심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고 강조했다
  • ▲ 걸프지역의 유전. ⓒ 연합뉴스
    ▲ 걸프지역의 유전. ⓒ 연합뉴스
    미국, 사우디와 1천억달러 무기 수출 계약

    파이낸셜타임즈와 뉴욕타임즈 등 영미 언론은 "이처럼 미국의 입장이 연일 사우디를 규탄하는 성명을 내놓는 영국·프랑스·독일 등과 확연히 다른 이유는 지난해 사우디와 맺은 1,100억달러(한화 125조원) 규모의 무기 수출 계약 때문일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미 100억달러 이상 무기 수출을 진행한 양국이 이번 '카쇼기 사망 사건' 때문에 갈등을 빚는 건 현명하지 못한 처사라는 걸 양국 지도자 모두 인식하고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사우디가 무려 100조가 넘는 '미국 채권'을 갖고 있다는 사실도 미국이 사우디 왕가를 의식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외신들은 보고 있다.

    게다가 오는 11월 대이란 원유 제재 조치가 취해질 경우, 부족해질 수 있는 원유량을 충족시키려면 미국으로선 '산유 부국'인 사우디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라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사우디는 올해 초 가격 안정을 위해 원유 공급을 늘리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그러나 만약 미국 정부가 카쇼기 사망 사건의 책임을 사우디 왕실에 묻는 쪽으로 방향을 틀 경우 사우디로부터 '고유가 역풍'이 불어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실제로 사우디 외교부는 미국 의원들이 '마그니츠키 인권 책임 법안(Global Magnitsky Act)'에 근거, 사우디에 대한 경제 제재 가능성을 언급하자 "그런 조치가 취해진다면 우리는 그것보다 더 큰 대응을 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 ▲ 재러드 쿠슈너(Jared Kushner) 백악관 수석고문. ⓒ 연합뉴스
    ▲ 재러드 쿠슈너(Jared Kushner) 백악관 수석고문. ⓒ 연합뉴스
    트럼프, 사우디 왕가 도움으로 '파산 위기' 모면

    트럼프 대통령의 개인적인 '취향'도 양국 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타지 마할' 카지노 경영 실패로 2000년대 초반 파산 위기를 맞은 트럼프 대통령은 급전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요트를 매물로 내놨는데 사우디의 알 왈리드 빈 탈랄(Al Waleed Bin Talal) 왕자가 이를 2,000만달러에 사들여 숨통을 트이게 해준 일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사우디 왕가와 인연을 맺은 트럼프 대통령은 사우디 현지에 자회사를 설립하고 부동산을 사우디 왕가에 매각하는 등 긴밀한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트럼프는 대통령에 취임한 후 첫 순방지로 사우디를 택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사위인 재러드 쿠슈너(Jared Kushner) 백악관 수석고문이 빈 살만 왕세자와 친분이 두텁다는 사실도 미국이 사우디 왕실을 적극적으로 비난하지 않고 있는 이유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빈 살만과 동갑내기 친구인 쿠슈너 고문은 지난해 6월 예고도 없이 사우디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같은 해 하반기 사우디 정부는 '왕세자 반대파'들을 상대로 대대적인 숙청 작업을 진행했다. 이에 따라 빈 살만 주도로 이뤄진 '국가 부패 청산 작업'이 미국 정부의 묵인 하에 진행됐다는 얘기도 흘러 나오고 있다. 실제로 사우디 왕족 수백명이 리츠호텔에 구금돼 조사를 받고 자유와 금원을 박탈당하는 초유의 인권 유린 사태가 일어났지만 백악관은 "사우디의 국가 개혁 정책을 지지한다"는 짤막한 입장만 밝혔다.

    카쇼기 실종 이후 발빠르게 수사에 나서며 살인 현장의 녹음 파일을 확보했다고 밝히는 등 사우디 정부를 압박하고 있는 터키 정부도 알고 보면 사우디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신세다. 2011년 '아랍의 봄' 이후로 양국 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으나 경제적으로는 더욱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터키의 관광산업은 사우디 관광객들이 없으면 돌아가지 않을 정도로 사우디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터키 현지 부동산에 투자하는 '큰 손'들도 대부분 사우디 부호들이다. 이 때문에 영미 언론은 에르도안(Erdogan) 터키 대통령이 "진실이 곧 공개될 것"이라며 "정의개발당(AKP) 의원총회에서 사건의 실체를 밝히겠다"고 큰 소리를 쳤지만 종국엔 사우디와 정치적 협상에 나설 것으로 보고 있다.
  • ▲ 무기로비스트 아드난 카쇼기(Adnan Khashoggi). ⓒ 스플래쉬닷컴
    ▲ 무기로비스트 아드난 카쇼기(Adnan Khashoggi). ⓒ 스플래쉬닷컴
    숨진 카쇼기 삼촌은 거물급 무기밀매상

    일각에선 자말 카쇼기의 '삼촌'이 살아 있었다면 지금처럼 백주대낮에 그가 살해당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카쇼기의 삼촌은 전설적인 무기 로비스트 아드난 카쇼기(Adnan Khashoggi)다. 그는 1997년 사망한 영국 다이애나(Diana Spencer) 왕세자비의 연인, 도디 알 파예드(Dodi Al-Fayed)의 삼촌이기도 하다.

    부친이 사우디의 '국부' 압둘 아지즈 알 사우드(Abdul-Aziz Al Saud) 초대 국왕의 주치의였던 아드난 카쇼기는 미국 방산업체에 절친한 사우디 왕가를 연결시켜 무기를 팔게끔 하고 커미션을 챙기는 방법으로 수십년간 거액의 부를 축적했다. 전성기 시절 재산이 40억달러(한화 4조5,000억원)에 달했던 그는 하루에 25만달러(한화 2억5,000만원)를 소비하고, 길이 86m의 초대형 요트 나빌라(Nabila)를 타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등 극도의 사치를 누렸다. 전 세계를 누비며 로비 활동을 벌인 아드난 카쇼기는 곳곳에 자기 인맥을 심어 놓고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해온 것으로 전해졌다.

    각국의 무기 중개 과정에 개입하면서 자연히 국가 정상들과도 친해진 그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이란에 비밀리에 무기를 판매한 '이란-콘트라 공작'에 개입하고, 필리핀 마르코스 대통령의 재산 도피 과정에도 관여하는 등 국제 정치에도 깊숙이 개입하는 모습을 보였다. 활동 영역이 비대해지면서 '정적'들은 점점 늘어났고 그의 사업을 위협하는 요소도 많아졌다.

    결국 미국 내 지주회사가 파산하고 각종 송사에 휘말리면서 자산이 반토막 난 아드난 카쇼기는 말년에 투자 컨설턴트로 변신, '소일거리'로 여생을 보내다 2017년 6월 향년 82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사진 제공 = TOPIC/SplashNews (www.splashnews.com 스플래쉬닷컴) /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