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정 안 맞는다→ 아픈건 아니다→ 아프다… 4시간 만에 "감기몸살" 해명
  • ▲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4일 러시아 순방을 마치고 귀국하는 모습. 청와대의 설명에 따르면 이때부터 문 대통령의 컨디션은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 제공
    ▲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4일 러시아 순방을 마치고 귀국하는 모습. 청와대의 설명에 따르면 이때부터 문 대통령의 컨디션은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 제공
    "문재인 대통령이 러시아 순방 등 과도한 일정과 누적된 피로로 인해 몸살감기에 걸렸다"고 청와대가 27일 밝혔다. 청와대는 "이 때문에 (대통령이) 27일 열릴 예정이었던 규제혁신회의는 물론 매티스 국방장관 면담 등 이번 주 일정을 취소하고 휴식에 들어갔다"고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청와대가 대통령 건강 문제를 감추면서 출입 기자들 사이에 각종 추측이 난무하는 등 종일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대통령께서 편찮으신 건 아니냐'는 질문에는 "네(편찮은 게 아니다)"라고 짧게 답했는데 결과적으로 거짓을 말한 셈이 된 것이다. 비록 대통령의 건강상태가 '일급 기밀'로 취급되기는 하지만 불필요한 혼란을 가져왔다는 비판이 뒤따르는 대목이다.

    #1. 오전 청와대 "내일 일정 많다"

    지난 24일 오후 러시아 순방에서 복귀한 문 대통령은 다음날부터 연일 일자리 문제에 대한 메시지를 집중적으로 내면서 의욕적인 모습을 보였다. 일자리 수석과 경제 수석, 시민사회수석을 교체하는 등 강도 높은 인사 카드를 꺼내 들었다. 27일 오전까지만 해도 청와대는 "내일 일정도 많다"며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 드라이브를 예고했었다.

    문 대통령은 28일에는 매티스 미국 국방장관의 접견과 시도지사 당선인 만찬 일정이 잡혀있었다. 북핵 문제·한미연합훈련·주한미군 등 외교·안보 문제는 물론 지방정부와의 소통 문제 등 굵직한 국내 현안이 기다리고 있었다. 향후 일정 또한 만만치 않은 것으로 알려진 상황에서 문 대통령의 행보에 무게감이 실리고 있었다.

    #2. 점심 시간에 깜짝 브리핑… 잇단 일정 취소

    하지만 27일 점심 시간대를 기해 급작스럽게 청와대 고위 관계자의 춘추관 방문이 공지됐다. "오늘 일정과 관련이 있다"는 설명 외에 청와대는 이렇다 할 설명을 내놓지 않았다.

    이날 오후에는 규제혁신회의가 예정돼 있었다. 앞서 문 대통령이 속도감 있는 정책을 주문한 터라, 이 부분에서 새로운 메시지가 나올지가 관건이었다. 장하성 정책실장의 라이벌 격인 김동연 경제부총리가 주재하는 회의였기 때문에 더더욱 관심이 집중됐다.

    그런데 청와대 고위 관계자의 일정 관련 방문 공지 이후, 규제혁신회의는 물론 유네스코 사무총장 접견 일정까지 당일 예정된 모든 일정이 줄줄이 취소됐다. 청와대 출입하는 기자들이 혼란에 빠진 대목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정책과 관련된 일정을 취소할 만큼 중요한 일이 생겼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기자들 사이에 혼란은 곧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청와대가 관련 내용을 함구하는 사이 대통령 와병설은 물론 김동연 경제 부총리 퇴출설, 북한 도발설, 제3차 남북정상회담설, 북한 고위인사 방남설 등 확인되지 않은 각종 추측이 청와대 안팎을 나돌았다. 특히 청와대는 지난달 26일, 2차 남북정상회담을 했지만 그 결과는 다음 날 오전에 발표한 전례가 있다. 이번에도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었기 때문에 기자들은 촉각을 곤두세울 수 밖에 없었다.

    #3. 일정이 안맞아서 취소했다고?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기자 브리핑에서 "유네스코 사무총장과는 접견 일정이 맞지 않아 취소했다"며 "규제개혁 점검회의는 이낙연 국무총리가 준비한 내용이 미흡하다고 판단해 대통령에 일정 연기를 건의했다"고 밝혔다.

    이 설명은 문재인 대통령의 일정 변화 사유를 속 시원히 설명하기는커녕 오히려 의혹에 불을 붙였다. 특히 유네스코 사무총장과의 접견 일정의 경우 취소된 정확한 이유는 물론이고 누가 먼저 취소를 요청했는지조차 공개되지 않았다. 규제혁신회의 역시 질책성 일정 취소가 아니냐는 시선에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직접 "이 건은 경제부처에 대해 대통령께서 질책하시거나 하는 내용이 아니다"라고 해명까지 했다.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는 부인했다.

    #4. 안아프다→ 일정 안맞는다→ 아프다

    "편찮으시냐"는 질문에 아니라고 답했던 청와대는 4시간 뒤인 오후 5시쯤 다른 관계자를 춘추관으로 보냈다. 이 관계자는 "청와대 주치의가 대통령께 주말까지 휴식할 것을 강력히 권고했고, 이에 따라 대통령의 목요일, 금요일 일정을 취소 및 연기키로 했다"고 설명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대통령 건강이 이런 정도면 내일부터 다시 정상적으로 일정을 소화하실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주치의가 오후에 들어와 진료한 뒤 이런 당부를 주셨다"며 "오후 4시에 임종석 비서실장이 대통령 참모들에게 이야기했다"고 덧붙였다.

    이어 "내일 일정이 있는데 대통령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 여러분들의 시선을 피할 수 없지 않겠느냐"며 "취소할 수 있는 것은 취소하고 연기할 수 있는 것은 연기 할 것"이라고 했다. 어설프게 사실관계를 감추려고 하다가 오히려 각종 의혹만 불거지자 다급히 새 해명을 내놓은 셈이다.

    #5. 전날에는 폭우, 낙뢰 때문이라더니…

    청와대는 심지어  전날 문 대통령이 유엔참전용사 추모식에 폭우와 낙뢰를 이유로 불참한 것에 대해서도 해명해야 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어제는 여러분도 눈으로 확인하셨겠지만 폭우와 낙뢰로 인해 취소된 것"이라며 "제가 직접 확인했는데 헬기 앞까지 오셨다. 좀 컨디션이 안 좋으셨는데 내색을 하지 않으셨던 것"이라고 했다.

    #6.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역대 대통령이 재임 기간 병을 얻어 휴식을 취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4년 4월 네덜란드-독일 순방 과정에서 감기에 걸려 마지막 네덜란드 일정 일부를 취소하고 귀국한 뒤 공식 일정을 잡지 않았다. 지난 2015년 4월 중남미 순방 일정 도중에는 몸살을 앓아 당시 청와대가 "전체적인 건강 상태가 많이 좋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 하루나 이틀 정도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쌍꺼풀 수술을 이유로 한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적이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병으로 인해 휴식을 취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빅 이벤트'가 많았던 문재인 정부의 특징 때문이었을까. 이날 대부분의 출입 기자들은 문 대통령이 일정을 취소한 진짜 이유를 파악하느라 하루종일 진땀을 뺐다.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열어두고 각 부처 등에 확인작업을 거쳤다. 청와대의 대응이 아쉬운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