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년 전 ‘군인의 아내’, 그리고 오늘...
    ‘전쟁의 달’에 그들을 다시 본다!

    이 덕 기 / 자유기고가

  •   이번에는 침낭(寢囊)인가?
    함정, 비행기, 방탄복, 전투화.... 그만큼 해 처먹었으면, 이제 끝날 때도 되지 않았나.
      이 나라 ‘궁민(窮民)의 군대’를 배경으로 여러 십 수 해가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방산·군납 비리가 대표적일 것이다.
    처 죽여도 시원찮을, 아니 마땅히 처 죽여야 될 소수 고위직의 작태가
    관행(慣行)이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궁민(窮民)들은 열불이 난다.

      그래도 이 나라 궁민(窮民)들은 ‘궁민(窮民)의 군대’를 버릴 수 없어서
    그저 품에 안고 왔으며, 그렇게 계속 안고 간다.
    그에 대한 기대는 세월이 흐르고 강산이 변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 하지만 그 바램에 비하면 정작 ‘군인’에 대한 사랑·존경은 상대적으로 너무 작다.
      전후방에서 우직하게 이 나라 지킴이의 외길을 걷고 있는
    대다수 직업군인과 그 가족들에 대한 시선과 대우는 마냥 불편하기만 하다.
    과거에는 거의 멸시(蔑視)와 천대(賤待) 수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군바리’로 상징되는 이 나라 직업군인의 위상은
    흔히 그렇게 부르는 궁민(窮民)들이 너무도 잘 알고 있으리라.

      며칠 전 오래된 책과 자료 부스러기들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헌 스크랩북에서 색 바랜 신문 기사를 발견했다.
    약 20년, 정확히 19년 전 이맘때 어느 일간지 독자투고란에 게재된
    전방부대 하사관[최근에는 부사관으로 불린다]의 아낙네가 기고한 글이었다.
    제목은 ‘군인의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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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난히 햇볕이 따가운 6월의 토요일 늦은 하오.
    오늘도 남편은 훈련으로 집에 오지 못한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아이들은 “공부하라!”는 내 성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TV앞에 앉아있다. 아이들의 저녁을 준비하면서도 초조감을 감추지 못한다.
    지금 어느 곳에선가 땀 흘리고 있을 남편을 떠올리며...
      나는 전방부대에서 하사관으로 근무하는 군인의 아내이다.
    “나 태어난 이 강산에 군인이 되어...” 이제는 중년이 된 여가수가 처음 이 노래를 불렀을 때
    나는 전문대 졸업반이었다. 부푼 꿈에 행복했고, 이제는 아련한 추억으로 남은 그 시절,
    우연한 기회에 남편[그 때도 군인이었다]을 만나
    강렬한 그의 시선과 순수한 열정에 반해 결혼했다.
    남편을 따라 여러 차례 이사를 다니며 아이를 낳고, 고생도 참 많이 했다.

  •   포(砲) 소리가 간간이 들리는 이곳 최전방에 이사 온지도 몇 해가 지났다.
    우리네 최전방 군인가족들의 생활은 인내와 희생, 그리고 근검절약 그 자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남편들은 고된 훈련과 근무로, 부인네들은 남편의 박봉에 시달리면서...

    그러나 이런 생활보다 더 참기 힘겨운 것은 신문이나 TV에서 마주치는 요즘 세태와
    가끔 만나는 친척·친지들의 남편 직업, 즉 군인에 대한 모멸과 천대에 가까운 눈초리들이다.
    나와 남편, 아이들이 이 나라가 아닌 곳에서 살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드는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   군인은 항시 목숨을 내놓을 준비와 함께 살아가는 직업이다.

    그런 남편과 사는 아내에게 있어 TV드라마에 나오는 호사스런 옷가지와 가구,
    가끔 신문 지면을 장식하는 과소비·호화사치 생활은 꿈도 꾸지 못할 먼 나라 얘기다.
    또 정치판의 이러저러한 얘기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다.
    그러나 내 남편과 나는 왜 우리가 여기에 와 있는가를 확실히 알고 있다.
    누구라도 이곳에 오면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국가안보’ ‘부국강병’이란 말들이 내겐 너무 거창하고 어렵다.
    하지만 그 어려운 것들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군인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내 남편이
    누구에게든 자랑스러운 존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정도는 알고 있다.
    그리고 그이가 아내인 나에게 미안함과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도록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이제 한국전쟁 47주년이다.
    이 땅의 자유와 민족의 생명을 위해 숱한 젊음이 이름 모를 산하에서 스러져갔다.
    내 남편이 그런 전장에 나서는 일이 없기를 아내 된 나는 항상 간절히 기도한다.
    그렇지만 그것이 나 하나만의 기도로 이루어질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초조하고 우울해진다.
    내 딸아이에게 장차 네 남편도 아빠와 같은 군인이었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게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있겠는가.

      어제 저녁 남편이 벗어놓은 먼지 묻은 푸른 군복, 땀 내음이
    남편의 사랑으로 다가오는 그것을 세탁기에 집어넣으며,
    나는 오늘도 조그만 바램을 가슴에 새긴다.
      ‘군인의 아내’, 영광스런 이름으로 불리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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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이 일간지에 실리고 나서, 국군 통수권자 네 분이 바뀌었다.
    과연 이 나라 ‘군인의 아내’들은 영광스러워 졌을까?
    <더    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