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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미의회 연설 "겁쟁이 미국" 규탄 "남북통일" 주장

이주영 건국대명예교수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입력 2014-03-03 09:42 | 수정 2014-03-03 15:34
미 국회 연설에서 33번의 박수를 받다

 
  1954년 5월의 제네바 정치회의가 결과 없이 끝남에 따라,
6 · 25 전쟁에 관한 처리도 더 이상 다룰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미국 두 나라는 서로를 설득해야 할 중요한 일들이 남아 있었다.   
   우선, 미국은 극동에서 공산주의의 팽창을 막기 위한 동북아시아 정책을 원만히 수행하기 위해 한국과 일본의 관계 개선을 희망했다. 

   이에 반해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이 일본이 아닌 한국을 동북아시아 반공정책의 중심에 놓고
 대대적인 군사-경제 원조를 제공하기를 희망했다. 왜냐하면 한국이야 말로 반공전선(反共戰線)의 첨병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의 차이를 줄이기 위해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7월 25일 미국 방문에 나섰다.
 사전에 미국의 실무자들에게 이번 방문이 한국과 일본의 동맹 선언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워싱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이승만은 답사에서 미 국무부  안에 도사리고 있는 소련에 대한 유화론자들을 맹렬히 비난했다. 즉, 이길 수 있는 6.25전쟁이었지만 ‘워싱턴의 겁쟁이들’이 휴전을 서두름으로써 한국의 통일을 막고 공산세력의 위세만 높여 주었다고 비판했다.

   그와 같은 강경 어조는 7월 28일 오전에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행한 연설에서도 나타났다. 
   하원 의장 조셉 마틴이 “미국 국민들이 경탄해 마지않는 불굴의 자유 전사”를 소개한다는 말에 뒤이어 그의 영어 연설은 시작되었다. 

   이승만은 “자유세계는 공산세계를 타도하려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그 ‘자유의 싸움’에서 한국이 선봉을 맡겠다.”는 말로 강경발언을 시작했다.

   공산주의자들의 혁명운동 때문에 온 세계가 거칠어졌으므로 자유세계도 강해지지 못하면
 그들의 노예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세력을 반반씩 나누어 가지고 있는 좌우합작(左右合作)의 어정쩡한 상태에서는 결코 세계평화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공산국가인 중국이 언젠가는 자유세계를 크게 위협하게 될 것이므로, 무력으로 타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선견지명을 느끼게 하는 발언이었다. 
   그는 연설 도중에 33회의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약 40분간의 연설을 끝내고 의원들의 기립박수 속에 그는 퇴장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연설은 중도 성향의 미국인들에게는 강경하게만 들렸다.
그들에게 공산주의는 그렇게 심각한 위협이 아니었던 것이다. 
   좌파 언론들은 이승만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반발을 보이기도 했다.    
 
일본 문제로 아이젠하워와 다투다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의 미국 방문 기회를 계기로 한국과 일본이 태평양동맹(태평양아시아조약기구) 안에서 손을 잡도록 약속하는 한미공동선언문을 발표하게 할 작정이었다. 
   이에 대해 이승만은 그러한 선언은 좀 더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직 한국인의 감정이 일본과 손을 잡을 단계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승만은 한일 예비 회담 당시  일본 측 대표인 구보다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찬양했던
망언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이승만은 미국 방문 길에 일본을 들르라는 미국 측의 강력한 권유를 뿌리쳤던 것이다. 
   이와 같은 배경 속에서 7월 30일 백악관에서 2차 정상회담이 열릴 예정이었다. 

   숙소인 영빈관에서 백악관을 향해 출발하기 직전, 이승만은 미국 측이  마련한 공동성명의 초안에 “한국은 일본관계에 있어서 우호적이고 . . . ”라는 내용이 들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한일동맹의 가능성을 언급한 내용이었던 것이다. 

   이승만은 크게 분노했다. 그러고는 회담장인 백악관에 가기를 거부했다. 

   측근들의 간청으로 회담장인 백악관에 가기는 했지만 약속 시간에 늦었다.
그 때문에 두 정상 사이에는 실랑이가 벌어졌다. 
   아이젠하워는 전날 한국의 원용덕 헌병사령관이 중립국 감시위원단의 공산 측 대표들을 쫓아낸 데 대해 항의했다. 그에 대해 이승만은 그들이 간첩 행위를 했기 때문에 추방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로 응수했다. 
   다시 아이젠하워는 “과거는 어떻든 간에 한국과 일본의 국교 정상화가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이승만은 자신이 대통령으로 있는 한 일본과는 상종을 않겠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화가 난 아이젠하워는 화를 내며 옆방으로 갔다.
 그러자 이승만은 “고얀 사람”이라고 화를 냈다. 

   아이젠하워가 화를 삭이고 다시 돌아와 한일 국교 문제는 보류하고 다른 문제를 토의하자고
제의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외신기자클럽 연설 준비로 일찍 일어서야겠다며 퇴장해버렸다. 
   이처럼 이승만은 작은 나라의 대통령이었지만 국가의 자존심이 걸려 있을 때는
큰 나라의 대통령에 대해서도 굽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개인적으로 아이젠하워에게 꿀리지 않는 높은 학력과 국제 감각, 그리고 유창한 영어 실력이 있었기에 그렇게 당당하게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나라는 약했지만 그 지도자는 강했던 것이다.  

뉴욕 시가행진에서 백만 군중의 환영을 받다     
   
   아이젠하워와의 2차 정상회담에서 느꼈던 이승만의 불쾌감은 모교인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으면서 마음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8월 2일 뉴욕 시에서 ‘영웅 행진’이란 카퍼레이드를 받게 되자, 이승만 대통령의 언짢은 마음도 확 풀렸다. 
   숙소인 왈도프아스토리아 호텔을 출발해서 브로드웨이를 거처 뉴욕 시청에 이르는 길에 백만 시민이 나와 열렬히 환영해주었다. 그것은 외국인으로서는 전례가 없는 대환영이었다. 
   고층 빌딩에서는 색종이 꽃이 쉴 새 없이 뿌려지고, 선두에는 3군 군악대가 행진곡을 연주했다. 이 대통령은 모자를 벗고 연신 손을 흔들어 답례했다. 

   뉴욕 시청에 도착해서는 밴 플리트 장군의 환영사를 들었다.
그와 같은 성대한 환영식은 소련에 중심을 둔 세계 공산주의와의 싸움에서
용감하게 맞선 한국 국민에 대한 미국 국민의 감사 표시였다.  
   그날 오후 이승만 대통령은 컬럼비아 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설즈버거 <뉴욕타임스> 사장과 기업가 록펠러 등을 만나
한국 재건에 미국 기업들이 참여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8월 4일 뉴욕을 떠나 미주리 주의 인디펜던스로 몸이 아픈 트루먼 전 대통령을
방문했다. 6 · 25 남침 당시 한국을 즉각 도와준 데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그리고 나서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호놀루루를 거쳐 1954년 8월 13일에 귀국했다.
(계속)             
<이주영 /건국이념보급회 이승만 포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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