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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선진화포럼] 대선 후보들에겐 '국가'가 안보이나?
대통령 임기 5년, 그러나 대한민국엔 임기가 없다
-대선후보의 국가경쟁력을 위한 전략이 절실하다-
천 영 준 (한국선진화포럼 10기 NGL, 연세대 창조경영센터 선임연구원)
● 코 앞의 대선, 프레임에 ‘알맹이’가 없다
대선이 한 달여 남짓 남은 만큼 세 후보 사이의 긴장감도 높아지는 상황이다. 그 동안 세 후보가 제기했던 프레임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경쟁 레이스의 첫 번째 화두는 경제민주화와 재벌개혁이었다. 그 동안 불균형 성장의 부작용이 심했으니 부를 고르게 분배하기 위해 대기업의 독점적 지위를 혁파하자는 주장이었다. 어떤 후보는 중소기업 진흥을 통해 경제적 성과를 창출하는 기업 수를 늘리자고 주장했다. 한편 다른 후보는 계열분리명령제나 출자총액제한제도의 강화를 외치면서 대기업 단속을 외쳤다.
학계나 여론의 반응도 뜨거웠다. ‘정치적 목적의 포퓰리즘 규제’라는 후보 공약에 대한 비판이 나오는가 하면, ‘경제민주화는 회장을 노동자가 선거로 뽑는 정도의 자극이 있어야지 투명성과 이익 배분이 무슨 민주화인가’하는 극단적인 논의 대립이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안철수 후보와 문재인 후보의 단일화 논란이 커지면서 상황은 정치공학적인 국면으로 치달았다. 서로에게 협조 전략을 펴던 두 후보가 공격을 시작하면서 아름다운 경쟁은 본격적인 싸움으로 변질됐다. 그러나 이들 간의 정당 민주주의 논란은 노이즈 마케팅의 일환이었고, 나름대로의 가치를 창출하지는 못하는 정치공학적 프로세스로 비화되는 게 현실이다.
이 와중에 국가 정체성 문제로 논의가 선회되면서 양 후보의 ‘박근혜 끌어내리기’가 시작됐다. 인혁당 사건, 정수장학회 논란 등 40여 년 전의 이슈가 화제가 되면서 대선 후보의 윤리성과 역사 의식을 문제 삼았던 것이다. 이조차도 시간이 지나면서 잠잠해지자 정치권은 ‘또 다른 막판 대선 프레임’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상황이다.
● 문제는 제대로 된 정책 공약과 경제다
그러나 대선 경쟁에서 체계화된 경제정책에 대한 고민은 점점 뒷전이 되고 있다. 지난 2002년과 2007년 대선 당시에는 각각 외환위기와 금융위기의 상흔이 가시지 않았다. 그 탓에 경제 정책과 재정 운용에 대한 긴장감이 대선 후보들 사이에 공유되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위기가 상시화되고 있는 이번 대선 레이스에서는 ‘슬로우 모션(Slow motion)’ 불황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지, 일자리를 만들어서 국민소득을 창출하기 위한 전략을 어떻게 구사할 것인지 명시적인 비전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현대경제연구소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30대 기업 순이익 68조원 중 37조원이 삼성, 현대차, 기아차의 순이익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3대 글로벌 기업이 전체의 55% 이상을 차지한다는 사실은 다른 기업들이 ‘삽질’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년에도 경제성장률은 좀처럼 개선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인식이 경제계와 분석가들 사이에서 공유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세 대선 후보의 경쟁 패러다임은 ‘창조경제’나 ‘행복한 경제’와 같은 관념적인 논의에 치중되어 있을 뿐, 위기 시대의 국가 경제정책을 어떻게 관리하겠다는 비전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 때문인지 이번 대선은 ‘허공을 붙잡는 경쟁’이라는 소리가 각계에서 들린다.
익명을 요구한 어느 명문대학 경제학과 교수의 표현에 따르면 “정치는 현실의 정책과 이익집단 간 조정을 위한 상호 협력과 조정의 과정인데 정작 정치에 남아 있는 건 이상과 철학 밖에 없다”고 한다. 그 동안 공감 커뮤니케이션과 감성을 강조한 나머지 대선 레이스에서 과학성과 현실성이 상실되었다는 지적이다.
● 일본의 ‘뒷북 사례’를 반면 교사로 삼아라
2012년 대선을 보고 있노라면 2009년 일본의 자민당과 민주당 정권 교체기에 그 나라 정치인들이 내걸었던 ‘뒷북 공약’을 생각하게 된다. 과감한 재정개혁과 축소민영화를 내걸었던 고이즈미 정부 이후 아베 정권, 후쿠다 정권, 아소 정권 등이 그럴듯한 국가 전략과 청사진을 내놓지 못하자 당시 민주당은 ‘국가전략국’이라는 기관을 설치하겠다고 나섰다.
진보적인 색채를 띈 중도 민주주의 정당이 아시아에서 일본의 안보위기와 경제적 위상추락을 염려하면서 거시적인 계획을 짜는 부처를 만들겠다는 소식을 내놓자 일본 언론이 잠시 술렁거렸다. 그러나 새로운 기관과 장관직을 설치하겠다는 발표가 난 그 순간, 이미 늦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었다.
뚜렷한 경제정책과 안보에 대한 관점 없이 ‘사회보장국가’, ‘개인이 행복한 나라’와 같은 추상적 비전을 외쳤던 집권 민주당은 미-일 외교 경색이나 후쿠시마 원전 방사능 유출 사고, 댜오위다오 논란과 같은 상시화된 위기 이슈들에 대한 초동 대응에 미진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잃어버린 10년’에 이어 ‘잃어버린 5년’이 새로 등장했다는 비판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글로벌 저성장 국면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고 있는 국가 중 하나가 일본이라는 해석이 있다. 인구는 고령화되어 가는데, 정작 산업의 혁신 중추는 점점 위상이 하락하고 있고, 금융 중개기관이 혁신 투자에 돈을 뿌려줄 만큼 여유가 많지 않은 최대의 악조건에 놓여 있는 탓이다. 오랫동안 전략 없이 ‘삽질’하다가 늦은 타이밍에 국가 전략을 수립한 관념 정치의 결과다.
어느 역사학자의 표현에 따르면 경쟁의 가장 기초적인 원형은 전쟁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제 국제경제는 대규모 세계전쟁이 아니라 국지화된 게릴라전이 반복되고 있는 양상이다. 과거 1960~1970년대 같았으면 10년에 한번 올만한 위기가 1~2년에 한 번씩 닥치고 있고, 기업들은 서서히 실패를 거듭한 나머지 ‘학습된 무기력(無氣力)’의 상황에 놓여 있는 국면이다.
조금 있으면 삼성을 비롯한 국내 대기업 대다수가 부의 80%를 해외에서 창출하는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예측도 제기된다. 대내외적으로 불확실성은 가중되고 있는데, 정작 정부는 온갖 규제와 시스템으로 기업을 묶어 ‘철퇴 때리기’로 일관하는 탓이다.
우려할 소식은 또 있다. IMF 외환위기 당시처럼 다시 대기업들이 외국계 컨설팅사로부터 경영진단을 받는 상황이라고 한다. 대규모 구조조정을 통해 ‘살을 덜어내기 위한’ 준비인 셈이다. 이러한 시국에 개혁과 정치의 이상이라는 이름으로 부담만 준다면, 글로벌 경쟁 환경에서 우리 기업들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질 수 밖에 없다.
물론 복지와 분배는 중요하다. 현 정권이 압도적인 득표율을 기록하며 정권교체에 성공한 배경에는 경제인 출신의 대통령이 효율적인 경제정책으로 기업을 살리고 그 낙수효과를 통해 국민의 삶도 나아질 것이라는 유권자의 기대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러나 미진한 낙수효과에 국민은 인내심을 잃었고 분노했다. 그리고 5년 동안 쌓였던 분노가 이번 대선에서 경제민주화와 재벌개혁이 가장 큰 이슈로 부각되게끔 만들었다.
상황이 그렇다고 해도 미래의 대한민국을 이끌고 나갈 지도자라면 화난 국민만 달래는 역할을 해선 안 된다. 현실적인 경쟁력을 고려한 경제정책과 비전 제시가 절실하다.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공정한 경쟁과 분배를 도모하되, 이미 글로벌화된 경제환경에서 산업 경쟁력이 중국 등 후발주자에게 밀리는 이 어려운 형국을 어떻게 극복할지 큰 틀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당장의 인기와 득표에 현혹돼 포퓰리즘을 쫓는 대선 후보라면 대통령 될 자격이 없다. 지도자는 넓게 볼 줄 알아야 한다. 대통령의 임기는 5년이지만, 국가는 5년만 지속되고 끝나는 게 아니다. 5년 뒤, 10년 뒤, 100년 뒤를 생각하며 비전을 제시하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국민은 그런 인물을 대통령으로 뽑아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