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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일 바로 잡자
김효선 /이승만 연구소 사무총장1. 3·1운동 후 임시정부 태동
3.1운동 후 국내외에서는 8개의 임시정부가 조직되었다. 그러나 정부의 형태를 갖추고 각료 명단을 발표한 임시정부는 1919년 3월 21일 블라디보스톡의 대한인국민의회에서 선포한 ‘노령임시정부’와 4월 13일 상해에서 발족된 ‘상해임시정부’, 4월 23일 한성에서 선포된 ‘한성임시정부’, 4월 10일 평안도에서 조직된 ‘조선민국임시정부’, 4월 15일 길림에서 선포된 ‘고려임시정부’, 4월 17일 평안도 지방에서 선포된 ‘신한민국임시정부’ 등 6개의 정부였다.그러나 형식적으로나마 기구를 갖춘 것은 노령임정과 상해임정 그리고 한성정부에 불과했고, 그밖에는 정당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2. 각처의 임시정부 통합운동
각처에서 선포된 임시정부의 난립은 이념상의 갈등과 역량의 분산으로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그 결과 독립운동 단체들 간의 연합 내지는 통일이 시급한 문제로 떠올랐다. -
5월부터 상해와 노령 사이에 임시정부 통합운동이 활발히 전개된다. 상해임정 측은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정부관계자와 각 지방 출신 인사들의 의견을 모아 다음과 같은 통일안을 마련하여 노령임정 측에 제시했다.
① 상해와 아령에서 설립한 정부들을 일체 작소하고, 오직 국내에서 13도 대표가 창설한 한성정부를 계승할 것이니 국내의 13도 대표가 민족전체의 대표인 것을 인정함이다.
② 정부의 위치는 아직 상해에 둘 것이니 각지에 연락이 비교적 편리한 까닭이다.
③ 상해에서 설립한 정부의 제도와 인선을 없이한 후에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 제도와 그 인선을 채용하되, 상해에서 수립 이래 실시한 행정은 그대로 유호를 인정할 것이다.
④ 정부의 명칭은 대한민국임시정부라 할 것이니 독립선언 이후에 각지를 원만히 대표하야 설립된 정부의 역사적 사실을 살리기 위함이다.
⑤ 현재 정부 각원은 일제히 퇴직하고 한성정부가 선택한 각원들의 정부를 인계할 것이다.안창호와 원세훈 사이에 타결된 5개항의 통일안이 최종적으로 마무리되자 1919년 8월 30일 노령의 대한국민회의 총회에서 ‘대한국민의회와 상해임시의정원의 동시 해산’과 ‘국민의회의원 5분의 4가 상해임시의정원에 들어가는’ 조건아래 '한성정부'를 붕대하기로 결정하며 만장일치로 해산을 선포했다.
상해(대한민국)임시정부는 상해임정을 해산하고 '한성정부'를 정통정부로 인정하며 한성정부 각원까지 승계하자는 안과 국무총리제의 헌법을 대통령제 헌법으로 개정하기 위한 '임시정부 개조 및 임시헌법 개정'에 관한 정부안을 상해임시의정원에 제출했다. 이 안은 의정원의 토의를 거쳐 1919년 9월 6일 통과됨으로써 통합임시정부가 탄생된다.
이로써 각지에 난립됐던 임시정부가 국내 13도 대표가 모여 수립된 '한성정부'를 중심으로 통합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리고 통합임정은 임시정부의 소재지는 상해에, 명칭은 '대한민국임시정부'로 하기로 하고 같은 날 이승만 박사를 통합임정의 '임시대통령'으로 선출한다.
3. '한성 임정'으로 통합...승인·개조 분쟁
외형상으로는 임시정부의 통합이 완료된 것 같았다. 그러나 통합임정은 대한국민의회(노령정부)측과 상해임정과의 사이에 승인·개조분쟁 등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그 과정에서 상해임정 측의 정치적 우위를 점하기 위한 안창호의 의도가 드러나는 등 분쟁은 지속됐다. 그러다 대한국민의회의 실세인 이동휘가 통합임정에 참여하고, 11월 3일에는 각원이 취임했다. 비로소 이승만은 임정의 성립을 인정했고, 통합임정은 명실상부 통합정부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출발하게 된 것이다.
4. 한성정부 법통 계승해야...기념일 4월23일 또는 9월6일로
지금까지는 대한국민의회가 상해임정에 통합되었다고 파악함으로써 상해임정 중심의 독립운동사가 쓰여졌다. 그리고 상해임정을 정통성이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로 격상시켜 해마다 상해임정 수립일인 4월 13일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일로 정하여 정부주관 기념행사를 거행해 왔다. 정부 주관 하에 공공연하게 역사왜곡이 자행되어 왔던 것이다.대한민국임시정부는 노령, 상해임정을 해산하고 한성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여 통합된 것이 우리 임시정부의 역사이다. 이렇게 통합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명실공히 국권을 상실한 일제 36년 동안 독립운동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했다.
즉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통성은 한성정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일은 한성정부 수립선포일인 4월 23일이나 세 개의 임정이 통합이 선포된 9월 6일을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일로 기념하는 것이 올바른 역사일 것이다.
5. 이념편향-왜곡된 임정역사 바로 잡아라
대한민국임시정부 태동의 역사부터 왜곡되어 있으니 상해임정을 중심으로 연구된 독립운동사가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는 불문가지(不問可知)이다. 3·1운동 이후 각지에서 조직된 8개의 임시정부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상해임정을 정통성을 가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로 기념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에도 부합되지 않는다.차제에 양식 있는 역사학자들은 왜곡된 독립운동사부터 재조명하는 일에 앞장서야 할 것이며, 특히 그릇된 역사를 바로잡아 국민에게 올바른 국사를 교육시켜야 할 의무가 있는 정부는 반드시 왜곡된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일을 바로잡아 부디 제대로 된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기념식을 거행하기를 바란다.
선진국가, 일류국가는 슬로건이나 경제적 성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선진국이란 국민의 의식이 얼마나 선진화되어 있느냐에 달려있다. 오늘날 선진국임을 자처하는 일류국가들은 자기 나라의 역사를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 널리 홍보하여 자국의 우월함을 과시하고 있다. 자기 나라의 역사조차도 올바로 알지 못하는 국민과 왜곡된 역사가 정사(正史)처럼 회자되는 부끄러운 현실이 오늘의 우리 모습이다. 그것도 편향된 이념의 갈등 속에서 자행되는 역사왜곡이라면 더더욱 부끄러운 일이다.3·1운동 이후 각처에서 수립된 임시정부는 모두가 민족의 독립을 염원하던 선조들의 결정체였다. 어느 지역에서 수립된 임정이 정통성이 있으며 더 우월한 지위에 있다고 자리매김할 수 없다. 그것을 미화하거나 과대 포장할 필요도 없다. 다만 우리는 그 시대의 선조들이 처해있던 상황에서 최선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후대에 전달하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