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군 창설의 숨은 공로자상해로 망명 뒤 첩보활동, 광복군 창설에 기여
  • 우리나라 광복군 창설에 실질적인 기여를 했던 군사전문가가 있었다. 일제 치하에서는 낮과 밤의 생활이 달랐고 망명 후에는 첩보활동을 하며 광복군 창설을 도왔다. 그의 이름은 나태섭이다.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31일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사 특파단으로 서안에 파견되어 한국광복군 창군을 준비하고, 광복군 제2지대 간부,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 총무과장, 군사학편찬위원회 간사로 광복군의 군사 활동을 지원한 나태섭 선생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고 밝혔다.

  • 나태섭 선생은 1901년 황해도 안악군에서 태어났다. 3․1운동에 참여하여 교육을 통한 구국활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선생은 중동학교 졸업 후 안악군 봉삼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사람들 몰래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해 임시정부를 지원했다. 1923년 임정 지원활동이 탄로나자 원산으로 피신했다가 결국 망명하게 되었다. 

    1927년 5월 중국 상해로 망명한 선생은 1934년 2월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특별반에 입교했다. 1934년 8월 남경의 중앙육군군관학교 10기생으로 입학하였고, 재학 중 1934년 12월 한국특무대독립군 제1대장으로 선임되었다.
     
    1936년 6월 중앙육군군관학교 10기생 보병과 졸업 후,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황해도 의원으로 선출된 선생은 7월 한국국민당 청년단장으로 선출되어 임시정부 주변의 각 독립운동 단체의 단원들 보호와 대일정보 수집, 동지 규합, 인쇄물 등 선전활동, 친일분자 및 일본인 정보원 처단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1937년 중일 전쟁이 터지자 임시정부는 보다 적극적인 군사 활동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하면서 군사위원회를 설립했다. 선생은 군사위원회 상임위원으로 군사 활동에 관한 종합적 계획을 수립하는 한편, 군사특파단의 일원으로 서안에 파견되어 장병 모집활동을 전개하는 등 광복군 창설의 실질적 준비 작업을 전개하였다.

    이후 광복군 총사령부 참모 및 서안총사령부 부관으로 활동한 선생은 1944년 군무부 산하 군사학 편찬위원회 간사로 임명되어 한국광복군의 각종 군사학서적을 편찬하고, 군사법규의 기초를 닦았다. 1945년 4월 ‘원조한국광복군판법’을 마련할 때까지는 광복군의 독립성 확보를 위해 혼신을 다하였다.

    광복이후 1945년 9월 화중지역 한인들의 생명보호와 안전한 귀국, 구호활동 등을 펼치다 1946년 5월 귀국한 뒤 1948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국군으로 복무했다. 1956년 예편하고, 1989년 5월 서거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77년 건국훈장독립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