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 없는 이집트, ‘MB’ 떠오를까 서방국가들 촉각북아프리카, ‘이슬람 神政일치 국가화’ 도미노 가능성도정부 “수에즈 운하 폐쇄 등 극단적인 사태는 없을 것”
  • 지난 12일 이집트의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이 전격 하야했다. 이 소식은 미국과 유럽증시가 동반상승할 정도로 큰 파급력을 보였다. 세계가 이집트 소요사태에 이처럼 많은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뭘까.

    Q. 이집트 소요사태의 원인은 무엇인가? 무바라크 대통령의 독재 때문인가?

    이집트 소요사태의 ‘방아쇠’는 한 젊은 노점상을 경찰이 폭행한 게 알려지면서라고 한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美외교전문이 트위터 등 SNS를 통해 퍼지면서 정권에 대한 반감이 폭발했기 때문이다. 위키리크스는 美정부가 수에즈 운하의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 이집트 정부에 지난 32년 동안 600억 달러를 원조하는 한편, 최근 5년 사이에는 무능하고 부패한 무바라크 축출을 위해 반정부 운동가들을 지원해 왔다고 폭로했다. 이에는 무바라크 정권의 부정축재에 대한 내용도 들어 있었다.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84세)은 1973년 10월 중동전쟁에서 중동 국가로는 처음으로 이스라엘군을 격파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일약 중동의 영웅이 된다. 1981년 사다트 대통령 퇴진 등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대통령에 당선됐다. 처음에는 국민적 지지를 얻었지만 헌법마저 바꾸면서 장기집권을 했다. 나중에는 그의 아들에게 권력을 승계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였다. 여기다 그동안 무바라크의 아들들은 국정에 개입해 부정부패를 일삼았던 것도 드러나 파문이 일었다.

    결국 2008년 이후 식량 가격 폭등, 실업률 등으로 불만이 쌓여있던 이집트 국민들이 30년 동안 정권을 잡고 있던 무바라크 대통령 퇴진 운동을 벌인 것이다.

    Q. 이집트 시위대가 바라는 건 민주화인가?

    이집트 시위대가 원하는 건 ‘정치제도 민주화’보다는 과거 우리나라의 4.19처럼 현재의 궁핍한 생활이 정권의 부정부패 때문이므로 이들이 물러나면 훨씬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면이 강하다. 즉 ‘생활고 타개’를 위한 시위라는 것이다.

    이번 시위의 주축은 ‘히티스테’라고 불리는 청년 실업자들이다. 이집트 실업자 대부분은 30대 이하 청년층이다. 이들에게 2008년 이후 급등한 생필품 가격은 엄청난 고통을 가져다주었다. 또한 이집트 실업자들은 이성관계에서도 차별을 받는다. 이슬람 국가에서는 결혼을 하려면 신부 측에 거액의 지참금을 줘야 한다(사랑 때문에 결혼하는 게 아니라 결혼하면 사랑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실업자 신세인 청년층들은 결혼도 할 수가 없다. 이 때문에 이집트 젊은 남성들은 지참금이 필요 없는 외국인 여성을 아내로 맞이하기를 바라는 경우가 많다. 반면 이집트 남성들 중 부유한 상위 20%는 중혼을 하고 있다.

    즉 이집트에서 생활하면서 실업자라는 점은 결혼의 기회도 없고 기본적인 의식주도 해결하지 못하는 생활을 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이번 시위는 ‘정치 민주화’보다는 ‘먹고 살기 위한 시위’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Q. 그렇다면 북아프리카 국가들에서 ‘민주화 시위’가 일어나고 있다는 보도는 거짓말인가?

    우리나라의 87년 6월 항쟁이나 서방국가들이 생각하는 ‘민주화’와는 조금 거리가 있다. 현재 시위대 등이 주장하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은 정치제도의 ‘민주화’가 맞다. 하지만 우리나라나 서방국가에서의 민주화 운동은 어느 정도 경제적 발전을 이룩한 뒤 독재적인 정치제도를 타파하자는 요구였지만 이집트에서는 무바라크 정권이 사회 모든 것을 좌지우지했기 때문에 상황이 다르다. 즉 ‘민주화 시위’는 맞지만 시민의식이 바탕이 된 ‘정치참여 요구’가 핵심이라고는 보기 어렵다는 말이다.

    Q. 지난 12일 무바라크 대통령이 하야한 다음 당분간 군부에 권력을 넘긴다고 했다.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게 되면 ‘민주화’와는 거리가 먼 것 아닌가?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이다. 현재 이집트에는 제대로 된 야당이나 정치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무바라크 정권이 1996년 헌법 개정을 통해 야당이 제대로 활동을 할 수 없도록 만들어 버렸다. 현재 ‘야권’으로 알려져 있는 ‘무슬림 형제단’ 또한 정권의 억압을 피하기 위해 자신들을 ‘종교단체’라고 표현하고 있다.

    한편 이집트 군부는 5.16 혁명 당시 우리나라의 군처럼 그나마 중립적이고 서구화된 조직이다. 또한 지금까지 대통령들은 대부분 군부 출신이다. 무바라크 대통령 또한 군 출신이다. 이집트 국민들은 군을 중동 패권을 둘러싼 이웃 국가들과의 경쟁에서 나라를 지키는 존재이자 정치에 있어서는 중립적인 조직으로 본다. 때문에 무바라크 대통령은 임시로 군부에 권력을 이양하겠다고 했고 국민들도 지지의사를 보인 것이다.

    Q. 언론에서 야권으로 보도되는 ‘무슬림 형제단’은 어떤 단체인가?

    무슬림 형제단(Muslim Brothers, MB라고도 함)은 1차 세계대전 후 영국이 이집트를 독립시켜주지 않자 시작된 시위로부터 탄생했다. 무슬림 형제단의 창설자 ‘하산 알 반나’는 이집트 독립 시위에 참여하면서 당시 터키의 케말 파샤 등과 같은 세속적인 민족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민주주의 이론과 제도는 건전한 이슬람 사회 건설을 방해하고 사회를 타락시킨다고 주장했다. 하산 알 반나는 이런 세속적 민족주의자들에 반기를 들어 ‘와하비즘’과 같은, 순수 이슬람으로의 복귀만이 무슬림 사회의 정화와 발전을 보장해줄 것이라고 여겼다. 그는 1928년 ‘꾸란’과 ‘하디스’만을 믿고 따른다는 ‘무슬림 형제단’을 창설했다.

    하산 알 반나가 만든 ‘무슬림 형제단’은 ‘이븐 한발’, ‘이븐 하즘’ ‘안 나와위’ ‘이븐 타이미야’ ‘이븐 압둘 와합’ 등 이슬람 원리주의 주창자들이 정립한 사상과 행동을 교본으로 삼았다. 무슬림 형제단은 1930년대 후반에 이미 이집트에서 가장 큰 단체로 발전했다.

    무슬림 형제단은 이후에도 反영국, 反정부적 태도를 취했다. 이들은 1950년대 초 수에즈 운하에 대한 공격을 시도하기도 했고, 서양인들 소유의 건물을 공격하기도 했다. 또한 이집트의 근대적 발전을 이끈 나세르의 암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1954년 암살에 실패한 뒤 나세르에 의해 조직이 철저히 무너졌다. 나세르는 한편으로는 이들의 요구를 다수 수용해 ‘범아랍주의’와 ‘민족사회주의’ 정책을 펼쳐 지지세력을 끌어들이기도 했다. 1964년 나세르는 대사면을 통해 무슬림 형제단 관계자들을 대거 석방하며 유화정책을 폈다.

    하지만 이집트 ‘세속 정치’와 무슬림 형제단과의 관계는 좋아지지 않았다. 무슬림 형제단이 원하는 것은 종교 교리로 통치되는 국가였던 반면 이집트 정치권은 범아람주의와 사회주의 정책을 통해 중동 패권을 장악하는 게 목표였기 때문이다. 특히 1970년대 사다트 대통령 집권 중 이집트와 이스라엘 간의 평화조약이 체결되자 무슬림 형제단은 이 평화조약에 반대해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들과 손을 잡고 정부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초부터 집권하고 있는 호스니 무바라크 정권도 사다트 정권의 맥을 잇다 보니 무슬림 형제단과의 관계가 좋을 수 없다.

    즉 무슬림 형제단은 1996년 이후 완전히 사라진 이집트 야당 정치권을 대신한 ‘종교단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지향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Q. ‘무슬림 형제단’과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지향점이 다른 것 같던데

    ‘이슬람 근본주의자’ 중 한 계파라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 그나마 알려진 이슬람 근본주의 계파는 사우디 아라비아에 근거지를 둔 ‘와하비즘’과 이란 정권, 와하비즘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실제로는 종교독재국가를 꿈꾸는 탈레반 등이 있다.

    ‘무슬림 형제단’도 ‘와하비즘’에 상당한 영향을 받아 ‘종교국가 건설’을 꿈꾸지만 그 실천방식은 와하비스트나 탈레반 등과 조금 다르다. 와하비스트나 탈레반 등은 이슬람의 4대 율법인 ‘꾸란’ ‘샤리아’ ‘하디스’ ‘파트와’를 철저히 지킬 것을 강요하는 반면, ‘무슬림 형제단’은 ‘꾸란’과 ‘하디스(모하메드의 어록을 종교학자들이 정리·해석한 것)’를 중심으로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Q. 이집트 소요사태를 이야기할 때마다 수에즈 운하 이야기가 나오던데 왜 그런가?

    우리나라를 포함한 서방국가들이 가장 큰 관심을 갖는 부분은 ▲포스트 무바라크는 누가 될 것인가 ▲수에즈 운하와 수메드 송유관 운영은 지장 없는가 하는 점이다.

    우선 ‘포스트 무바라크’ 문제의 경우 미국 등 서방국가들은 중동 국가 중 가장 서구화되었다는 이집트가 무슬림 형제단 등에 의해 ‘신정(神政)일치 국가’로 변신하게 되면 북아프리카는 물론 인근 동아프리카 국가에서도 ‘무슬림 신정일치 국가’가 출현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렇게 될 경우 아직은 ‘석유 문명’을 벗어나지 못한 상황에서 ‘무슬림 신정일치 국가’들이 석유를 무기화하게 되면 ‘에너지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수에즈 운하, 수메드 송유관 운영 문제를 주시하는 원인도 비슷하다. 1956년 제2차 중동전쟁은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의 수에즈 운하 국유화 조치에 반발한 이스라엘, 영국, 프랑스가 개입한 사건이라는 점을 주의 깊게 봐야 한다. 지난 2월 3일 <뉴욕타임스>는 ‘수에즈운하와 수메드 파이프라인은 전 세계 석유공급량의 4.5%가 통과하고 액화천연가스 선적의 14%를 차지하는 석유수송의 요충지’라며 이곳의 정상가동이 중요하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실제 수에즈 운하가 막히게 되면 전 세계에 공급되는 원유 중 하루 200만 배럴의 운송에 지장이 생긴다. 특히 아시아, 유럽으로 가는 원유는 1만 km를 더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원유가 급등은 물론 소말리아 해적 준동까지도 우려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Q. 그렇다면 북아프리카의 시위가 우리나라에는 어떤 영향을 끼치나?

    정부 관계자나 정유업계 등에서는 13일 현재 이집트 소요사태가 진정 기미를 보이고 있어 심각한 영향은 없을 것으로 보면서도 사태 파악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정부는 지난 2월 1일부터 지식경제부와 정유업계, 에너지경제연구원 등의 전문 인력으로 ‘석유수급 비상대책반’을 편성한 뒤 사태 파악과 대응책 마련에 주력하고 있다. 정부에서는 ‘소요사태가 장기화되거나 확산되어 수에즈 운하 폐쇄와 같은 극단적인 상황은 생기지 않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하지만 이집트 소요사태는 진정국면에 접어든다고 해도 최근 쿠웨이트에서도 10만여 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민주화 시위가 일어나고,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부정부패 정권에 케냐, 탄자니아 등 아프리카 국가들도 다수 포함돼 있어 시위가 어떻게 확산될지 알 수 없다.

    만약 소요사태가 도미노현상처럼 번져나갈 경우 대부분의 원유를 중동으로부터 수입하는 우리나라는 ‘오일쇼크’에 빠질 수도 있다. 정부가 새로운 원유 공급선을 구축하기 위해 움직여도 수개월 이상 걸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석유 공급을 배급제로 전환하는 것은 물론 심하면 전기공급도 제한될 수 있다. 각종 생필품 가격이 급등하는 건 불문가지다.

    때문에 석유업계 관계자들은 우리나라의 원유 공급선을 다양화하는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