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제가 생기고 갈등이 생겼을 때 남의 탓을 하지 않고 자신을 돌아보고 탓하는 것은 참으로 성숙한 자세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서는 이러한 미덕도 과도한 겸양이거나 오히려 사태해결에 도움이 안 되는 경우도 있다. 최근 일부 여당 의원들이 ‘물리력에 의한 의사진행 불참’을 선언한 것이나 야당에서 남북한 간의 긴장이 높아진 것에 대해 남한을 탓하는 것이 이러한 경우다.
     
    지난해에도 국회는 여야간 대립의 극한을 달리다 결국은 새해 예산안 통과 과정에서도 격렬한 몸싸움을 연출하였다. 국격을 떨어뜨림은 물론 선진민주국가로의 이행을 가로막는 한국정치의 독소다. 국민의 뜻을 대변하여 깊이 있는 토론과 토의를 거쳐 표결을 통하여 국가의 법과 정책을 결정하는 국회의 기본정신과 존재이유를 망각하는 작태다.
     
    국회의 한심한 모습을 국민은 물론 여야의 정치인, 언론 모두 한 목소리로 질타하고 있다. 국제 언론에서도 대서특필할 만큼 이는 비정상적이고 지극히 수치스러운 일이다.
     
    이에 여당 의원 20여명은 ‘물리력에 의한 의사진행 불참’을 선언하고 ‘직권상정제한법’도 발의 하였다. 거대 여당 의원으로서 표결에 있어서 절대로 물리적인 힘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선언은 일면 성숙하면서도 겸손해 보인다.
     
    그러나 언뜻 보면 바람직해 보이는 이러한 행동도 자세히 살펴보면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우선 이는 마치 국회의 후진적인 의사진행 방식에 대한 책임이 모두 여당인 한나라당에게만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거대여당’인 한나라당만 올바로 처신을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문제의 핵심은 물리력을 행사하느냐 마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국회가 제대로 그 기능을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국회의 역할은 산적한 법안을 속히 처리해서 나라 살림을 제대로 꾸려 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국회의 의사진행 자체를 물리적으로 가로막는 야당이 있을 때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
     
    미국 상원도 야당의 의사진행 방해로 인해서 심각한 진통을 겪고 있다. 이에 3선 상원의원에 카터 행정부에서 부통령을 역임하였고 1984년 대선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월터 몬데일은 최근 뉴욕타임즈에 기고한 칼럼에서 야당이 걸핏하면 필리버스터를 이용하여 법안에 대한 토의 자체를 가로막는 행태를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현재 상원전체 100명중 60명이 동의해야만 필리버스터를 중단시킬 수 있는 원내 규정을 단순 다수결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엄청난 재정적자와 높은 실업률, 두 개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미국의 상원이 무책임한 정쟁에 휘말려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 상황은 어떻게 해서든 타개해야 한다는 논지다.
     

    우리 국회도 마찬가지다. 이번 새해 예산 처리과정에서도 보았듯이 야당은 ‘여야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표결자체를 거부한다. 예산에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아예 의사진행을 못하게 한다. 그리고 표결처리를 위해 물리력을 동원하면 “헌법적인 절차에 의지하지 않고….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독재다”라며 비판한다. 만일 여야 합의가 가장 중요한 것이라면, 차라리 헌법에 “여야 합의가 다수결 원칙보다 우선한다”는 조항을 넣는 것이 나은 것 아닌가?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인 다수결의 원칙 마저 존중되지 않는 상황에서 여야 합의만 고집 하는 것은 자칫 ‘내 탓이오’라는 겸양 보다는 대안 없는 인기영합주의의 소치로 비칠 위험이 있다.
     
    남북관계에 있어서도 종종 이와 유사한 경우를 본다. 남한의 군함이 북한의 어뢰공격으로 격침되고 영토가 포격을 받아서 군장병과 민간인이 희생이 되는 상황에서도 야권 일부에서는 이 모든 것이 이명박 정부가 대북 강경정책을 채택함으로써 남북간의 긴장을 높였기 때문이란다.
     
    사실 이러한 궤변에 가까운 논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 사회 깊숙이 파고들었다. 과거 통일부 장관을 지낸 한 인사는 남한의 군사독재가 통일의 장애가 된다고 주장한 경력을 갖고 있다. 장관이 된 이후 북한의 선군정치나 주체사상에 대해서는 한마디 비판을 못하는 사람이 남한의 체제에 대해서는 유독 비판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남한이 통일을 가로막고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우리 학생들에게 ‘평화교육’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치 남한이 북한에 대해서 호전적이고 도발적인 자세를 견지하고 있어서 한반도 긴장상태가 지속되고 있으며 따라서 남한만 평화를 사랑하게 되면 평화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논리였다. ‘서울 불바다’를 운운하고 ‘한반도 핵전쟁’을 위협하는 북한 보다 남한이 문제라는 것이다.
     
    과도한 겸양은 미덕이 아니다. 특히 그러한 겸양의 자세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지 못하고 오히려 상황을 오도 하고 책임소재를 불명확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 온다면 이는 우려스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