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여나 주책맞게 결혼식이라도 하면 어쩔까 걱정했더니 다행히 생략되었다.

    그로부터 한달 반 후에 박미주는 고수연을 데리고 합가(合家) 했다.
    방 5개짜리 아파트에서 사는 터라 머릿수대로 방을 차지할 수 있었지만 가구 정리는 해야만 했다.
    박미주 모녀가 들고 올 가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사가 끝난 날 윤상기가 아파트 주민한테 이삿턱으로 떡이나 나눠주면 어떨까 하고 의견을 내었다가 박미주에게 원샷에 거부되었다.
    이사 간 것도 온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깟 것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맞는 말이다.

    한턱 쓰기 좋아하는 아버지 말에 은근히 가슴을 조였던 윤대현은 박미주가 마음에 들었다.

    엄밀히 말한다면 절반이 가고 온 셈이었으니 이사가 아니다. 박미주의 주장 속에는 은근슬쩍 티내지 않고 살자는 그런 의도가 포함되어 있을 것이었다.

    고수연? 그 조개는 이사가 다 끝나고 늦은 저녁까지 먹고 나서 세 식구가 포도주 한잔씩을 마시고 있을 때 짜잔 하고 등장했다. 그러더니 윤상기한테 건성으로 머리만 까닥 하고나서 제 방으로 지정된 욕실 딸린 세컨드룸으로 들어가 버렸다.

    세컨드룸이란 이 90평짜리 아파트에서 두 번째로 힘센 자가 차지하는 방이다.
    즉 두 번째로 좋은 방으로써 어제까지 윤대현의 방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윤상기의 압력 때문에 넘겨줘만 했다. 물론 그냥 넘겨준 것은 아니다.
    한달 용돈을 30만원 올렸다.

    윤상기는 건설업 하청을 오래 한 때문으로 로비력이 뛰어났다. 비밀도 철저하게 지킨다.
    그래서 앞으로 용돈이 박미주의 손으로 집행될 것을 예상하고 공식적으로는 월 50, 박미주 모르게 따로 30을 집행하기로 미리 말을 맞췄다.

    그날 밤 서드룸, 세 번째로 힘센 자의 방. 즉 아파트에서 가장 후진 문간방 침대에 비스듬히 누운 윤대현이 핸드폰을 귀에 붙이고 말했다.

    상대는 최병태.
    고등학교, 대학교 동창으로 군대까지 같은 시기에 갔다 와서 절친이다. 대학도 같은 경상대로 과는 다르지만 매일 만나 인생을 토의하는 사이.

    「앞으로 평온하지는 못할 것 가터. 둘 중 하나가 무릎을 꿇어야 분위기가 정리가 된다.」
    하고 윤대현이 결의에 찬 표정으로 말했을 때 최병태가 큭큭 웃었다.
    「근데 걔가 어디 고등학교 나왔다고 했지?」
    「그런거 알아서 뭐해 인마? 관심없다.」
    「알아봐.」
    최병태가 말을 잇는다.
    「숙화대 영문과 3학년이라고 했지? 고등학교만 알아내면 걔 내력을 알 수가 있을테니깐  말야.」
    「......」
    「우리 과에도 여학생이 다섯이나 돼. 그 중에서 걔하고 고등학교 동창이 있을 지도 모른단 말이다.」
    「알아서 국보법 위반 혐의로 고발하게?」
    「인마, 걔 남자관계 등등을 알아내면 니가 비장의 카드로 써먹을 수가 있지 않겠어? 안그냐?」
    「허긴 그러네.」
    「걔 괜찮냐?」
    「좃같다니까.」
    「진짜 쏘세지 같단말야?」
    「시발노마, 무슨 쏘세지?」
    「얼굴이 기냐고?」
    「아냐.」
    해놓고 윤대현이 고수연의 얼굴을 눈 앞에 떠올렸다.

    갸름, 쌍꺼플 없는 미끈한 눈, 야무진 입술, 허리 잘룩, 다리 길고 엉덩이가 솟아서 쎅끼가 있음.
    그 순간 눈을 치켜 뜬 윤대현이 뱉듯이 말했다.

    「걸레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