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준이라는 말보다 급(級)이라는 표현이 어울리겠다.
    김민성은 언제부터인가 남녀간의 급을 의식해왔다.
    그리고 스스로 내린 결론은 같은 급끼리 어울려야 세상이 조용해진다는 것이다.

    플라이급은 플라이급끼리, 헤비급은 헤비급끼리, 플라이와 헤비가 어울리면 둘 사이뿐만 아니라 세상에도 피해가 온다.

    김민성의 관점에서 보면 하주연은 헤비급이다. 그래서 미들급 수준인 자신과 맞지 않았다.
    욕심이야 나지만 어울렸다가 상처를 받게 될테니 처음부터 땡기지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가장 보편적인 시대의 흐름이기도 하다.

    전에 개천에서 용나던 시절에는 감상(感想) 또한 풍부해서 플라이와 헤비급의 결합도 가끔 이루어졌지만 해방 60년이 지난 작금은 어림없는 수작이다. 개천에서는 똥나고 돈 있는데서 돈 나온다.

    그래서 다음날 아침, 김민성은 하주연의 불어터진 얼굴을 보고서도 초연해질 수가 있다.
    하주연이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았으므로 윤지선이 혼자서 서둘렀다.
    아침에 다시 동해 쪽으로 떠나기로 했으므로 짐을 꾸리는 것이다.

    「형!」
    그때 베란다에 서있던 하주연이 방안에 있는 김민성을 불렀다. 표정이 굳어져 있어서 가방을 싸던 윤지선까지 하주연을 보았다. 

    「왜?」
    하면서 김민성이 힘들게 몸을 일으켰을 때 하주연이 빨리 오라고 손짓까지 했다. 그래서 윤지선도 함께 베란다로 나왔다. 하주연이 눈으로 아래쪽을 가리켰다.

    바로 밑쪽은 주차장이다. 그런데 주차장에 세워진 하주연의 붉은색 스포츠카 옆에 사내 하나가 서있다. 바로 조우현이다. 머리를 든 김민성이 쓴웃음을 짓고 하주연을 보았다.

    「그렇지. 우연히 보았다.」
    「어떻게 하지?」
    베란다에서 조금 안으로 물러난 하주연이 굳어진 얼굴로 김민성에게 묻는다.

    「쇼 해야지 뭐.」
    김민성이 당연한 일 아니냐는 표정을 짓고 말을 잇는다.
    「우리가 도망갈 이유가 있냐? 저놈이 프론트에 물으면 금방 우리 방 번호를 알텐데.」

    머리를 돌린 김민성의 시선이 윤지선에게로 옮겨졌다.
    「지선이 넌 먼저 나가. 그렇지. 네가 먼저 택시 잡아타고 동해로 가 있어라.」
    「내가?」
    하고 윤지선이 멍한 표정으로 물었으므로 김민성이 혀를 찼다.

    「그럼 주연이가 나가야겠냐?」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주연이하고 옷 벗고 놀 시간은 없어. 저놈이 곧 올라올테니까 말야.」
    「누가 뭐래?」

    눈을 흘긴 윤지선이 가방을 집어들더니 하주연에게 말했다.
    「그럼 나, 동해에서 기다릴게. 동해 제일호텔이라고 했지?」
    「그래, 내 이름으로 예약했으니까 방에 들어가서 기다려.」
    어느덧 차분해진 하주연이 윤지선에게 수표 몇 장을 건네주며 웃는다.

    「쇼 할라니까 가슴이 뛰네.」
    「야 얼릉가. 그놈 오기 전에.」
    김민성의 재촉을 받은 윤지선이 다시 눈을 흘기더니 몸을 돌렸다.

    윤지선이 방을 나갔을 때 하주연이 웃음 띤 얼굴로 김민성을 보았다.
    「쟤, 형한테 빠졌어.」
    「너도 어젯밤 들었잖어? 내가 죽여주거든.」
    했지만 하주연은 웃지 않았고 김민성도 정색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