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수와 진보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전형이라 할만한 인물을 탐구해 보는 것도 좋은 방안이다. 현대 산업사회가 본격화 하던 시기 이후의 경제 체제에 대해 연구한 대표적인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를 들자면 피터 드러커(Peter F. Drucker, 1909-2005)와 칼 폴라니(Karl Polanyi, 1886-1964)를 꼽을 수 있다. 
     

  • ▲ 문근찬 한국사이버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 뉴데일리
    ▲ 문근찬 한국사이버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 뉴데일리

    1927년 크리스마스 날, 독일에서 대학에 다니던 시절 드러커는 방학에 비엔나의 집에 왔다가 ‘오스트리안 에코노미스트’ 잡지의 편집 회의에 참가해 달라는 초청장을 받았다. 잡지사에서 그런 초청장이 온 것은 그 잡지를 후원했던 드러커의 부친에 대한 감사의 뜻이었는지, 혹은 드러커가 대학 입학 논문으로 쓴 ‘파나마 운하와 국제 무역에 대한 영향’이라는 글 때문이었는지는 모른다. 하여튼 이 자리에서 드러커는 칼 폴라니와 처음 만났고, 그 후 평생의 인연을 맺으며 살았다.
     
    사회 현상에 남다른 감각을 갖고 있던 두 사람은 첫 만남에서 서로 상대방의 천재성을 알아 봤던것 같다. 두 사람은 좀 더 이야기를 나눌 생각으로 드러커는 폴라니의 집으로 함께 가게 되었다. 그곳은 비엔나 변두리의 허름한 동네였는데, 전차를 두어 번 갈아 타고, 또 한참을 걸어서 도착한 연립주택의 5층 꼭대기였다. 드러커는 그 집에서의 크리스마스 만찬 모습을 자신의 자전적 책 ‘방관자의 모험’에 상세히 그리고 있다.
     
    『우리는 도착하자 즉시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식탁에 앉았는데, 식사라고는 껍질을 엉성하게 벗기고 반쯤 익힌 감자밖에 없는, 그야말로 내 생애 최악의 것이었다. 이게 크리스마스 만찬이라니! 그런데 폴라니의 가족들(홀로 된 어머니, 아내, 그리고 여덟 살 난 딸)은 손님인 나와 음식에는 관심도 안 주고, 다음 달의 생활비를 벌 수 있을지에 대해 격렬히 토의했다. 하지만 그들이 이야기하는 돈의 액수란 것이 너무나 적어서 폴라니가 잡지사의 부편집장으로서 받는 액수의 극히 일부분이면 될 정도였다. 궁금증을 참을 수 없어서 나는 조심스럽게 물어 보았다. “폴라니 박사님의 월급이라면 분명 한 집안이 충분히 잘 살 수 있지 않으신가요?” 한참 동안의 침묵이 흐른 후 폴라니 가족은 일제히 대답했다. “자기의 급여를 자기 자신에게 쓰다니, 거 참 훌륭한 생각이군요?” 그들은 비엔나에 넘쳐 나는 헝가리의 전쟁 피난민들을 위해 월급 전액을 쓰고, 자신들이 먹고 사는 비용은 별도로 벌어서 쓰는 생활을 해 오고 있었다. 』
     
    드러커와 폴라니와의 교류는 그 후 드러커의 런던 거주 시절을 거쳐 미국에서까지 평생 동안 이어졌다. 드러커는 1941년 버몬트의 베닝턴 대학에서 정치학과 경제학 분야의 학자를 소개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칼 폴라니를 전임교수가 되도록 소개했고, 그 자신도 1942년 여름 정부 육군성의 일을 마치고 베닝턴 대학의 교수로 취임했던 것이다. 버몬트에서 지내던 1940년 무렵은 드러커가 ‘산업인의 미래(The Future of Industrial Man)’의 초고를 쓰면서 칼 폴라니와 자주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며 지냈던 시절이었다. 드러커가 2년 후 ‘산업인의 미래’에서 대기업 법인 조직이 경제적 조직인 것만큼이나 사회적 조직이고 공동체 사회라는 가설을 제시했다. 새로운 산업사회에서 기업체야말로 중추적인 기관이며 따라서 막중한 책임을 가지고 있는 기관인지를 간파했던 것이다. 그 시절 폴라니는 경제와 사회의 이론적 통합 모델로서, 경제와 공동체를 조화시키면서 경제적 성장과 개인적 자유를 허용하는 대안이 있다는 것을 구상한 ‘위대한 전환(The Great Transformation)’을 썼다. 그는 자본주의나 마르크스주의 등 기존의 체제를 뛰어 넘어, 19세기적 가치의 대안으로서 공동체와 그 안의 인간관계는 분열을 조장하는 시장의 힘으로부터 보호되는 독특한 방식을 꿈꾸었다. 그러나 그가 경제사와 문화인류학을 통해 미래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고 시도할수록 그는 점점 더 수수께끼 같은 고대와 선사시대, 원시경제 속으로 들어갈 뿐이었다.
     
    드러커는 폴라니와의 교류를 통하여 절대적인 하나의 완전한 좋은 사회에 대한 탐구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그의 생각은 ‘산업인의 미래’를 통해서 ‘완전한 사회 대신 적당히 견딜만한, 그러나 자유로운 사회’를 받아들이는 관점, 즉 보수주의적 관점이 더욱 확고해졌다. 그런 사회란 폴라니의 이상주의적인 사회와는 달리 시장의 혼란과 불화라는 대가를 치르면서 개인의 자유를 지키게 되는, 갈등과 위험을 감수하는 선택과 불일치라는 대가를 치를 것이고, 커다란 선(善)에는 관심을 덜 갖는 대신, 적은 악(惡)에는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는 사회로 묘사할 수 있다.
     
    우리 주위에는 실제로 존재할 수 없는, 혹은 원시 공통체 사회로 복귀해야만 가능한 이상향을 꿈꾸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칼 폴라니와 같이 자신의 급여를 온통 어려운 사람을 위해 쓸 수 있는 정신의 소유자들만으로 이 사회가 이루어질 수 있다면 모를까 그런 공동체적 이상향은 오늘날의 거대한 경제 체제에서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다. 드러커는 그 점을 깨닫고 보수주의적 관점에서 ‘기능하는 사회’를 정의하였다. 이는 큰 틀의 시장 자본주의의 틀 속에서 자유롭게 경쟁하는 기업과 개인들, 그러나 각각의 커뮤니티는 인간적인 공동체를 추구하는 조화를 모색한다. 반면에 폴라니의 이상주의는 사회 전체를 원시 부족사회에서나 볼 수 있는 공동체로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적으로 구현되려면 개인의 자유보다는 전체 공동체를 주관하는 절대 권력이 필요할 것이다. 요컨대 자본주의 사회가 경제 지상주의로 치닫는 것을 잠시나마 되돌아 보도록 하는 데는 폴라니와 같은 몽상가들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이 마치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인 양 사람들이 현혹된다면 이는 몽상가들이 주는 폐해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