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겹살 굽는 고소한 냄새가 가득하다. 주방에서 막 샤워를 한 상추가 식탁으로 분주히 옮겨지고 된장이며 마늘까지 예쁜 손들에 옮겨져 자리 잡는다.

    “그 배우 정말 노래 잘 하더라.” “얼굴도 예쁘던데?” 방금 보고 온 뮤지컬 ‘잭&팟’ 얘기는 분주한 손놀림 속에서 수다거리가 된다. 그리고 식당 가운데 자리한 작은 케익과 주전부리 과자들.  케익에 꼽은 빨간 초엔 환한 불빛이 아이들 마음을 비춰주고 있다.

    서울 서초구 방배동 DIS 두리하나 국제학교(Durihana International School)의 성탄절 전야 모습이다. 지난 10월 11일 문을 연 두리하나 국제학교는 국내 최초의 탈북 청소년들을 위해 국제 기독교 대안학교다. 

  • ▲ 김은경(왼쪽) 은심 자매 ⓒ 뉴데일리
    ▲ 김은경(왼쪽) 은심 자매 ⓒ 뉴데일리

    김주 교장과 교사, 학생들이 모두 둘러앉았다.
    학생들은 모두 탈북동포들이다. “북한에서 이렇게 상 차리고 먹는 것은 1년에 한번 될까 말까 한데 너무 좋아요.”

    아주 키가 작은 여학생이 마냥 신기한 눈초리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88년생이다. 우리나이 스물 둘, 만으론 스물 한 살이다. 이름은 김은심. 지난 5월 북한을 탈출해 중국을 거쳐 한국에 왔다. 은심이에게 오늘은 스물한 살에 맞는 생애 첫 크리스마스다.

    북한엔 물론 교회가 없다. 있는 거라곤 평양 어딘가에 꾸며놓았다는 가짜교회 뿐이다. 교회는 못가도 하늘을 우러러 항상 기도하며 살았다.

    “아직 하나님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열심히 기도하고 하나님 뜻대로 살 거예요.” 수줍은 은심이는 말도 소근거린다. 그래도 할 말은 한다. “하나님 은혜로 한국에 올 수 있었어요. 감사드립니다.” 조금 더 이야기를 하게 하면 울 것 같다. 하지만 수사만 번드레한 어느 기도보다 ‘은심이의 하느님에 대한 감사’는 듣는 이의 마음을 움직인다. 두 눈에 진정한 감사의 마음이 넘치기 때문이다.

    은심이의 북한 집은 양강도 혜산시 연풍동이다. 초등학교밖에 못나왔다. 공부가 싫어서? 아니다. 4살이던 1992년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셨다. 임업자재 판매지도원이던 어머니가 2녀1남을 부양했다. 네 살 위인 오빠는 중국을 드나들었다는 불법월경 죄로 북한 감옥에서 지내다 병사했다. 여섯 살 위인 언니는 2006년 ‘한국으로 간다’며 집을 나갔다. 그리고 유일한 의지인 어머니고 2007년 병으로 돌아가셨다.

    “먹고 사는 게 큰일인데 공부를 어떻게 하겠어요? 저만 아니라 다른 북한 아이들도 마찬가지예요” 빌어먹듯 힘겹게 혼자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고아’가 된 은심이를 돌볼 이웃도 없었다. 모두들 내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처지에 누구에게 돌봐달라고 말하고 돕는단 말인가.

    그러던 올해 5월 낯선 사람이 찾아왔다. '언니가 김은경이 맞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자 언니가 남한에 정착해서 너를 데리고 가려고 하니 준비를 하라고 했다. 반가왔다.  ‘언니! 언니가 살아있었구나.’ ‘이 세상에서 나 혼자가 아니구나.’  

    무서웠다. ‘강을 건너다 경비대가 총을 쏘면 어떻게 하지?’ ‘탈북했다 잡히면 사형을 시킨다는데 잡히진 않을까?’ 며칠 밤을 울었다. 기뻐서 울고 무서워서 울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사람이 다시 찾아왔다. ‘며칠 날 강에 가서 빨래를 하는 척 하다가 강을 건너라’고 했다. 이번엔 눈물이 아니라 가슴이 떨려왔다. 스물한 살, 겨우 140㎝의 작은 여자가 감당하기엔 너무 큰 두려움이었다. 잠 못 자고 기다리던 그 날이 왔다. 빨래거리를 들고 강에 나갔다. 오후 7시쯤. 아직 어둠이 내려앉지 않은 강에는 곳곳에 총을 경비병들이 보였다. 평소보다 더 많은 것 같았다.

    강 건너까지 50여 m. 강 저편에 언니가 와 있다고 했다. 꿈에 그리던 언니가. 하지만, 아아! 이 강을 내가 건널 수 있을까? 빨래하는 시늉을 하고 있는데 경비병이 다가왔다. 금방이라도 잡아갈 것 같았다. 콩닥거리는 가슴을 애써 참고 있는데 경비병이 말을 건넸다. “곧 밤인데 무슨 빨래야? 빨리 올라가라.”  경비병은 다시 발길을 돌려 강둑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이때였다. 눈을 질끈 감았다. ‘가자!’ 무턱대고 강으로 뛰어들었다. “어어? 저 에미나이가?” 경비병의 놀란 고함을 들었는지 획실하지 않다. 그저 죽을 둥 살 둥 헤엄을 쳤다. 빠른 물살에 떠내려가며 조금씩 전진하기를 10여 분. 발에 땅이 밟혔다. 북한 아닌 중국 땅이었다.

    “수영을 잘 하냐”고 물었다. “아니요. 강변 마을에 살았어도 한 번도 수영을 해보지 않았어요.” 살면서 기가 막히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그런데 하나님이 대신 수영을 해주었다는 얘기는 처음이다. 하긴,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니까. 그래도 압록강의 5월은 추운데 하나님 감기 안 걸리셨는지 모르겠다.

  • ▲ 두리하나 국제학교의 성탄절 전야 ⓒ 뉴데일리
    ▲ 두리하나 국제학교의 성탄절 전야 ⓒ 뉴데일리

    은심이를 탈북 시킨 언니가 은경이다. 만 스물 일곱. 2006년 탈북, 지난해 한국에 왔다. 내년에 총신대 2학년이 된다.

    이 어린 대학생이 무슨 힘이 있어서 동생을 구출했을까. 은경씨는 교회 도움이 컸다고 말한다. 두리하나선교회(천기원 목사)가 성금을 모아주고 무엇보다 간절한 기도로 힘을 줬단다. “동생 데리러 중국에 일주일 머물렀어요. 그런데 동생의 탈북 날이 가까워지자 북한 쪽 사람들이며 중국 쪽 사람들이 모두 ‘못 하겠다’는 거예요. 경비가 심해져서 자신들까지 위험하다며 발을 빼더라고요.”

    아무리 설득해도 안되자 은경씨는 결단을 내렸다. ‘죽든 살든 내가 하겠다’고. ‘안내인 없이 혼자 강을 건너라’는 위험천만한 탈북 사인을 동생에게 전한 언니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자칫 동생을 죽이는 결정이 될 수도 있었다. “(강 건너는 것을)차마 못 보고 강둑에 앉아 기도만 했어요. 그때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밖에 없었어요. 부를 이름도 하나님밖에 없었고요.”

    하나님은 바쁘셨을 것 같다. 은경 씨 기도 들으랴, 은심이 대신 수영하랴. 아니 어쩌면 은경 씨 기도를 들으며 하나님도 더 힘을 내셨을 지도 모른다. ‘영차 영차’하시며.      

    식사를 마친 은경-은심 자매는 광화문광장에 스케이트를 타러 간다고 했다. 스물한 살의 첫 크리스마스. 게다가 처음 타보는 스케이트. “스케이트 처음 타면 많이 넘어질 텐데?” 일 없단다. 잘 탈 수 있을 거란다.

    오! 하나님. 이번엔 스케이트랍니다. 엉덩방아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