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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괜찮은 사람'
얼마 전, 정운찬 총리가 국회에서 답변하는 가운데 731 부대를 항일 독립군 부대라고 말했다가 곤욕을 치른 뒤, 최근에 민족문제연구소에 대한 질문을 받고 총리에게 장학 퀴즈 하듯 질문하지 말라는 뜻으로 국회의원에게 대응하는 발언을 들으면서 저는 웃음이 나왔습니다.
저는 정운찬 총리를 개인적으로 모르는 사람이지만 총리가 되기 전, 평소에 그가 쓴 글이나 발언한 내용을 먼발치로 접하면서, 그리고 정 총리를 아는 지인들을 통해 들은 이야기를 종합하면서, 괜찮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가 '정운찬'을 괜찮은 사람이라고 평가한 가장 중요한 잣대는 지금 한국 사회에서 가장 부족한 것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악을 쓰고, 극단적으로 이념적이고, 감정적이고, 말초적인 한국 감정 문화와 의식 문화에서 정운찬은 상당히 합리적이고 포용적이면서도 자기 소신과 철학을 지키는 것 같은 '화이부동'의 인간상을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유치한 정치인들제가 정운찬 교수가 총리가 된 것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괜찮다고 판단되었던 지식인이 현실 정치에 뛰어들어 어떻게 능력을 발휘하고, 정치적 장애물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것을 보고 싶어서 였습니다. 총리가 되기 전, 청문회 과정에서 세금 신고 누락 문제, 군대 문제, 고문직 문제, 거짓말 문제가 불거져 나오는 것을 보면서 착잡한 마음을 느꼈습니다. 이 착잡한 마음은 정운찬에 대한 실망인 동시에 정운찬에게 흠집을 내려는 사람들에 대한 실망이기도 했습니다. 군대 문제 같은 것은 별로 문제거리도 안 되는데 억지로 흠집을 내기 위한 정치적 공격으로 보였으나, 원고료를 소득 신고하지 않은 것이나, 고문직을 밝히지 않은 것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정운찬의 실수나 흠집이 실망스럽기는 하지만, 분노가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을 확대시켜서 정운찬을 망가트리려는 정치인들의 행동이 더욱 실망스럽고 유치해 보였습니다. 더욱 치졸스러워 보이는 것은 그동안 정운찬을 자기네 편으로 생각하고 추켜세웠던 사람이나 언론이 하루아침에 정운찬을 거짓말쟁이, 탈세자라고 낙인찍으면서 정운찬을 인격적으로 비하시키고 질타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비분강개하면서 정운찬을 공격하는 것이 지나치게 감정적이었고, 털어서 먼지를 내려는 행동처럼 보였습니다.
더 구린 자들
정운찬이 잘못하기는 했지만 그 정도의 도덕성이면 한국에서 괜찮다는 생각이 듭니다. 구석구석마다 곪고 썪어들어가는 한국 사회에서 정운찬 정도의 잘못은 괜찮은 수준입니다. 공직자에 엄격한 미국 기준으로 봐도 그렇게 흥분할 정도의 큰 흠집이 아닙니다. 원고료를 세금 신고에서 누락시켰거나 고문직의 겸임은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시정할 수 있는 정도의 흠결입니다. 어떻게 들으면 냉소적으로 들릴 수 있는 이런 말을 하는 것은 한국의 도덕성과 윤리성이 땅에 떨어진 마당에 정운찬에게 독야청청하라고 강요하는 것 같은 안쓰러움 때문이고, 정운찬을 매타작하듯 비판한 사람들 대부분이 정운찬 보다 더 구리고 썩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국 땅에 능력 있는 인재로 정운찬 정도의 흠이나 먼지가 없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정운찬을 변호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은 정운찬에게 적용하는 잣대가 이중적이고, 동기가 순수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가장 바람직한 잣대는 남에게 적용하는 잣대를 자기에게도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럴 자신이 없으면 입을 다물든지 비판을 해도 분수에 맞게 해야 합니다. 자신의 속은 더 썩은 구정물이 하수구처럼 흘러내리는데 다른 사람에게는 맑은 물의 잣대를 적용하는 것은 위선을 뛰어 넘는 인간성과 양심의 상실입니다. 완벽할 수는 없지만 비슷하게 흉내라도 내는 공정성과 순수성이 있어야 정치의 품격이 올라갑니다.
인재가 자라지 않는 땅
정운찬을 변호하는 것은 정운찬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정운찬 같은 지식인이나 정치 지망생을 죽이려는 한국 사회의 의식과 감정에 대한 도전입니다. 인재나 인물은 혼자 자라지 않습니다. 인간과 사회가 물을 주고 격려하고 지원하지 않으면 인재가 자라지 않습니다. 지금 한국 사회는 인재가 죽어가고 인물이 말라가고 있습니다. 양식과 도덕의 환경오염이 극심해지기 때문에 아무도 거기서 자유스러울 수 없는데다가, 인재의 역량이 있고 인물이 될 만한 사람이 공인으로 나서면 지나칠 정도로 짓이겨서 밟아 버리는 잔인성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열등의식과 질시감이 커질수록 인재 가학증세가 깊어집니다.
자유선진당의 박선영 의원 질문에 마루타는 전쟁 포로이고 731 부대는 항일 독립군인 것 같다고 대답한 것을 놓고 반대자들은 총리가 이렇게 무식하고 역사도 모르느냐고 흥분했습니다. 사실 저도 731 부대가 뭔지 몰랐습니다. 마루타 부대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나 731 부대는 생소했습니다. 국사 공부도 안 했느냐고 공격하겠지만, 제가 학교 다닐 때는 국사에 그런 내용이 없었습니다. 정운찬 총리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그리고 정총리는 미국서 유학을 했기 때문에 어느 한 기간 동안 한국에서 일어난 일이나, 재발견된 역사를 세세히 알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731부대를 모르는 것이 자랑거리는 아니지만 수치스러운 것도 아닙니다.
731부대 몰라도 좋다
한국 사회는 지엽적인 것으로 전체를 재단하는 표피적 단순성이 많습니다. 항일 역사의 한 부분을 모른다고 해서 역사의식이나 민족의식이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역사적 사실을 암기하고 그것을 줄줄 꿰듯이 이야기해도 역사에 흐르는 정신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역사 정신을 이해해도 그것을 담을 만한 인격이 부족하면 그 지식은 죽은 지식입니다. 한국 사회에는 역사 점수는 좋은데 역사 정신이 부족하고, 역사 정신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역사 드라마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주인공에 환호하면서도 그 눈물과 감동이 텔레비전 앞에서 끝나고 맙니다. 그런 사람들은 드라마 내용은 훤하게 알지만 드라마 정신과 교훈은 외면합니다. 미국서 태어난 2세들이 한국엘 가면 많은 한국인들은 "왜 한국인이면서 한국말도 못하냐?"고 핀잔을 주면서 그들이 한국을 이해하거나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비판합니다. 이들 2세들은 조국을 사랑하러 갔다가 상처받고 돌아 와 조국을 싫어합니다. 2세가 한국말을 할 줄 알고, 한국을 사랑하면 금상첨화이겠지만, 한국말을 잘하면서 한국을 미워하는 2세보다, 한국어를 몰라도 한국을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더욱 소중합니다. 731 부대가 뭔지를 몰라도 진정한 역사의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초보적 지식인
국회의원들이 총리에게 질문하는 태도와 방법 틀렸습니다. 자유선진당의 박선영 의원이 정총리에게 마루타와 731 부대를 아느냐고 물은 것은 품위 있고 선진적인 질문 태도가 아닙니다. 현학적인 지식인들이나 초보적인 지식인들의 대표적 대화 방법이 "이거 아세요?" "무슨 무슨 책 읽어 보셨어요?" 하고 묻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는 자기 과시욕도 있고 상대를 테스트 하거나, 눌러 보려는 심리가 있습니다. 일국의 정사를 논하는 국회의원이 정책의 본질과는 상관없는 731 부대를 아느냐? 고 묻는 것은 빗나간 질문입니다. 민주당의 송두영 대변인이 정총리가 731을 잘못 답변한 것을 두고 "너무 황당해 말문이 막히고 국제 망신거리라 외신에 보도될까 염려스럽다."고 말했다는데, 역시 얄팍한 말장난입니다. 정총리 답변이 국제 망신거리도 아니고, 외신은 그런 걸 보도할 만큼 판별력이 없질 않습니다.
반격하는 뱃심
제가 정운찬 총리의 국회 답변에서 웃음이 나왔던 것은 마르타와 731 부대 질문 덫에 걸려 쩔쩔 매던 정총리가 민족연구소 질문에 반격을 가한 뱃심 때문입니다. 731 부대에 실수를 하자 정총리와 같은 당인 한나라당의 한선교 의원이 덩달아 정총리를 수험생으로 다루었습니다. 공교롭게도 한선교 의원은 정 총리와 정치적 라이벌처럼 거론되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대변인을 지냈던 사람입니다. 정총리가 민족문제연구소의 성격을 규정해 달라고 요구한 한선교 의원에게 "의원님이 가르쳐 주시죠" 라고 답변한 것은 순발력 있는 역공이었습니다. 정총리의 반격은 잘못된 질문에 대한 일격이었습니다. 총리가 그 정도의 뱃심과 당당함이 없이는 한국처럼 사공이 많은 정치판에서 정책을 밀고 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동안 정총리가 국회의원들에게 너무 쩔쩔매는 모습이 못마땅했는데 이번에 제대로 된 답변을 한 것 같습니다. 총리나 장관이 국회의원들 눈치를 보면서는 국민의 공복이 될 수 없습니다. 국회의원들에게 비위를 맞추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비굴한 것이고, 질문을 제대로 못하는 국회의원들에게 당당히 맞서서 소신을 밝히는 것은 교만이 아니라 국가로부터 위임받은 공복의 자신감입니다.국회의원 재교육 시급
한국 국회의원들에게 자질 재교육이 시급합니다. 망치로 국회 문을 부수는 행위는 폭력범이라는 것에
서부터 대통령이나 총리, 국회의원에게 함부로 말을 하는 것은 자질과 품위가 떨어지는 행동이라는 것까지 아주 구체적인 재교육이 필요합니다. 가장 첫 번째로 가르쳐야 할 것은 질문하는 방법입니다. 총리나 장관에게 호통 치면서 학생 다루듯이 하는 말버릇부터 고쳐야 합니다. 선진 정치에서는 그렇게 하질 않습니다. 총리나 장관에게 야단치듯 질문을 하거나, 장학 퀴즈 하듯 질문을 하는 국회의원에게는 점잖으면서도 촌철살인의 답변으로 가르쳐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도 나라의 정치 풍토를 바꾸는 것으로 국가와 국민에게 봉사하는 방법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