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인은 책을 내면 보통 출판기념회를 연다. 책 출간도 정치적 목적에 의해서고 출판기념회는 이를 충족시켜주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각종 선거 전 정치인들이 경쟁하듯 자서전을 출간하고 출판기념회를 여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한 정치인이 자신의 65년 인생을 담은 회고록을 출간했다. 다섯차례 투옥과 10년 옥살이, 순탄치 않았던 12년간의 의정활동, 낙선 뒤 정치적 미국 유배생활, 자신이 그리는 국가 백년대계 까지 담았다. 책 홍보에 욕심이 날 만하다. 근사한 호텔을 빌려 출판기념회를 열고 정치적 입지를 다지고 싶을 법 하다.

  • ▲ 이재오 전 한나라당 최고위원이 29일 서울 한 서점에서 열린 자신의 책 '함박웃음' 출간기념 사인회에서 한 시민에게 직접 사인한 책을 건네주고 있다. ⓒ연합뉴스 
    ▲ 이재오 전 한나라당 최고위원이 29일 서울 한 서점에서 열린 자신의 책 '함박웃음' 출간기념 사인회에서 한 시민에게 직접 사인한 책을 건네주고 있다. ⓒ연합뉴스 

    정치인에게, 특히 정치복귀를 준비 중인 정치인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일텐데 그는 이를 하지 않았다. 주인공은 이재오 전 한나라당 최고위원. 그의 작은 행보마저 큰 주목을 받고 여러 정치적 해석을 낳는다. 더구나 그의 '정치 복귀'문제는 여권의 정치지형 변화와 맞물려 더 뜨거운 감자가 됐다.

    행동과 말 하나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책을 냈다. 1년간 미국 유학시절 동안 정리하고 써온 터라 출간을 미룰 수 없었다. 대신 최고의 홍보 기회인 '출판기념회'를 포기하고 '사인회'를 선택했다. 이 전 최고위원은 29일 오후 서울 강남 교보문고에서 자신의 회고록 '함박웃음' 사인회를 열었다.

    '출판기념회가 아닌 사인회를 연 이유'를 묻자 그는 살짝 웃었다. "그냥 조촐하게 하고 싶었다"면서 고개를 숙였다. 계획했던 2시간을 훌쩍 넘겨 200여분간 1500여명의 지지자 및 일반인에게 사인을 한 뒤라 힘들 법 했지만 그의 얼굴에선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정치인은 부르지 않았고 자신의 팬클럽에 알리기 위해 홈페이지에만 공지했는데 예상보다 많은 인파가 몰렸기 때문이다. 

    정치인은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와 측근인 진수희 여의도연구소장, 장광근 사무총장, 심재철 제2사무부총장, 정종복 전 의원만이 보였고 나머지는 지지자와 일반 시민이었다. 사인을 받아 가는 시민에게 "팬클럽 회원이냐"고 묻자 다수가 손사래를 치며 "좋아하고 보고싶어 왔다"고 말했다. 한 40대 여성은 "좋아하는 지인에게 선물하고 싶어 책을 샀고 사인을 받으러 왔다"고 했다.

    사인을 받는 시민들은 "보고싶었습니다" "화이팅 하세요" "힘들어도 힘내세요" 등의 응원 메시지를 보냈고 이 전 최고위원은 사인 내내 웃고 고개를 숙이고 감사를 표했다. 주변에선 "책 쓰는 것 보다 사인하는 게 더 힘들겠다"고 걱정했지만 정작 이 전 최고위원 본인은 활짝 웃으며 괜찮다는 제스처를 했다.. 한 지지자가 막바지에 여러권의 책을 한꺼번에 내놓고 사인을 요구하자 측근들이 "나중에 또 해드리겠다"고 말렸다. 그러자 이 전 최고위원은 "괜찮아. 사인만 하면 되는데"라며 일일이 다 사인했다.

    사인을 받으려면 2시간 가량 기다려야 할 만큼 많은 인파가 몰렸지만 이 전 최고위원은 200여분간의 사인회가 끝난 뒤 주변 지지자 및 시민과 기념사진까지 찍고, 일일이 악수를 나눴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란 말을 연신 내뱉었다. 3시간 동안 현장에서 팔린 책만 3960권. 1000권 이상 사인을 하느라 이 전 최고위원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혔지만 그는 기분 좋은 듯 웃었다. 그는 30일 오후 장소를 서울 삼성동 반디앤루니스로 옮겨 한 번 더 사인회를 연다. 이 전 최고위원은 물론 측근들도 정치적 부담이 커 "조촐하게 하고 싶었다"고 했지만 사인회는 출판기념회 못지 않은 행사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