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신효섭 조선일보 정치부 차장 ⓒ 뉴데일리
    ▲ 신효섭 조선일보 정치부 차장 ⓒ 뉴데일리

    1982년 일본 자민당 총재 선거를 앞두고 최대 파벌인 다나카파의 의원 총회가 열렸다. 당시 다나카는 계보 의원 다수가 내켜하지 않는 나카소네를 총재로 점찍었다. 2인자인 가네마루 신이 보스의 결정을 공식 통보했다. "나도 나카소네가 싫지만 오야붕이 오른쪽이라면 오른쪽, 왼쪽이라면 왼쪽인 것이다. 그러기 싫으면 파벌을 떠나라." 일본의 뿌리깊은 '오야붕(親分·보스)·꼬붕(子分·계보원) 정치'의 대표적 사건이다.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면서 원조인 일본 정계에서도 사실상 존재감이 없어진 '오야붕·꼬붕 정치'가 지금 대한민국 집권당 안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미디어법 처리를 둘러싼 친박계의 행태가 그것이다.

    이미 보도됐다시피 박근혜 전 대표는 19일 "(미디어법이 직권상정된 본회의에) 참석한다면 반대표를 행사하기 위해서일 것"이라는 말 한마디로 미디어법 정국을 흔들어 놓았다. 이 발언이 알려진 직후 한나라당 의원들의 반응엔 이런 얘기들이 들어 있었다. "박 전 대표가 그렇게 얘기했다고 해도 많은 의원들은 별로 동요하지 않을 것이다. 나도 그런 박 전 대표 생각에는 동의할 수 없다." "박 전 대표가 너무 나간 것 아닌가 싶다." "마지막 협상 단계인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낭패다." "박 전 대표가 신문만 봐서 당의 양보안을 모르고 한 말 아니냐."

    내용만 봐선 친이(親李) 주류측에서 나온 것 같지만 모두 '친박(親朴)' 의원들이 한 말들이다. 이들도 박 전 대표의 돌출발언에 부정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루 뒤인 20일 친박계는 하나같이 "박 전 대표의 말이 맞다"고 입을 맞췄다. 보스의 뜻을 거스르는 발언은 더 이상 나오질 않는다. '꼬붕'들이 무언가에 '제압'당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보스의 뜻을 계보원들에게 전달해 행동을 통일할 수 있는 내부 연락시스템이 있다더니 이번에 그것이 효험을 본 모양이다.

    미디어법안의 내용이나 직권상정 필요성 등에 대해선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다. 박 전 대표도 국회의원으로서 얼마든지 자신의 생각을 밝힐 권리가 있다. 문제는 그의 말 한마디가 50~60명 계파 의원들의 입을 막고 다리를 묶는 현실이다. 지금 친박의 움직임이 "오야붕이 오른쪽이라면 오른쪽, 왼쪽이라면 왼쪽인 것"이라는 가네마루의 말과 뭐가 다른가. "박 전 대표는 의정활동에서 의원 개개인의 판단이 중요하다고 강조해왔다"던 친박의 이전 주장은 딴 나라 사람들 얘기였던가.

    우리 정치에서도 '오야붕·꼬붕'의 수직관계는 있었다. 김영삼·김대중·김종필 3김씨가 정치자금과 공천권, 그중에서도 '꼬붕'의 정치생명과 직결되는 공천권으로 의원들을 장악하던 시절 얘기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2003년 한 인터뷰에서 1988년 통일민주당 때의 공천 상황을 설명하면서 "당시 야당 총재로서 내 맘대로 공천할 때 아니오. 부산에서는 내가 공천하면 다 되게 돼 있었어요"라며 공천권으로 '꼬붕'을 장악했던 3김 정치의 실상을 밝혔었다.

    정치자금 관행이야 없어졌다 해도 지금 친박 의원들도 공천 문제에 관한 한 '오야붕'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게 현실이다. 특히 박 전 대표가 절대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영남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한나라당에 있을 때는 친박이 아니었지만 공천 탈락 후 친박 명패를 걸고 무소속으로 나갔던 사람들까지 당선됐던 지난 총선 결과가 이를 입증해 줬다.

    그동안 정치인 박근혜의 대표상품으로 '당내 민주화 의지'를 내세워 온 건 바로 친박 인사들이다. 요 며칠 미디어법을 둘러싼 자신들의 행태가 과연 그것에 걸맞은 것인지도 심각하게 자문(自問)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