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나라당이 작년 12월 미디어 관련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면서 내건 목표는 경쟁을 통한 글로벌 미디어산업 육성과 방송 서비스산업 품질 향상이었다. 방송 진입 장벽을 해소해 일부 지상파 방송이 장악하고 있는 독과점 구조를 해체함으로써 여론시장의 다양성을 확보하고 소비자에게 질 좋은 방송을 제공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후 8개월 가까이 갖은 파행을 거친 끝에 미디어법 협상이 막바지에 이른 지금, '지상파 독점 해소'라는 본질은 간곳없고 여·야 할 것 없이 어떻게 하면 신문의 참여를 금지할 수 있는가에 매달려 있다. 여당 역시 기존 지상파의 독과점 체제를 그대로 유지해주는 방안을 내놓기에 이르렀다.

    언론재단이 작년 9월 발표한 '2008 언론수용자 인식조사'에서 KBS·MBC·SBS 지상파 3사의 영향력은 신문·방송·인터넷을 포함한 전체 여론시장에서 57%를 차지했다. 이어 인터넷 포털이 21.4%, 3대 신문이 8.2%였다. 윤석민 서울대 교수가 지난 2월 내놓은 매체별 '여론 지배력'에서도 지상파 3사의 지배력이 42.5∼68.8%에 달해 포털 16.2∼30.4%, 3대 신문의 4.2∼22.1%보다 몇 배에서 몇십 배 높았다. 방송 3사의 매출기준 시장 점유율은 2007년 기준 44개 지상파 사업자 중 81.1%나 된다. 윤 교수는 "여론 독과점 문제는 신문이 아니라 지상파의 문제"라고 했다.

    그런데도 야당과 방송사 노조, 좌파단체들은 미디어법이 통과되면 정부가 MBC와 KBS2 같은 지상파 채널을 빼앗아 조선·동아·중앙 등 신문사와 대기업에 넘겨줄 것이기 때문에 일부 신문에 의한 여론 독과점이 심화한다는 날조된 사실과 논리를 내세워 반대해왔다. 그러다 한나라당측 미디어발전국민위가 방송의 디지털 전환이 이뤄져 추가 지상파 채널이 생기는 2012년에야 신문의 지상파 진출을 허용하는 방안을 내놓자 말이 바뀌었다.

    MBC 사장 출신으로, 미디어법 저지에 앞장서 온 최문순 민주당 의원은 "어차피 미디어법이 개정된다 해도 신문과 대기업이 MBC 등 지상파를 소유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에 보도채널과 종합편성채널을 내주려는 우회전술"이라고 공격했다. "MBC를 신문에 넘겨주려 한다"는 지금까지 자신의 주장이 거짓이었다는 것을 자인한 셈이다. 그는 2005년 2월 MBC 사장에 내정됐을 때는 "뉴미디어 시대의 생존을 위해 신문·방송 겸영 금지를 풀고 언론사들이 주체적으로 영역을 선택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던 사람이다.

    여당은 야당의 이런 미디어법 반대 논리의 허구를 파헤쳐 한국에서 균형 있는 여론 형성에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은 지상파의 독과점과 기득권이라는 진실을 국민에게 제대로 알리기는커녕 야당과 방송이 거짓으로 내세운 '신문의 여론 독과점' 논리에 휘말려 허우적거리기만 했다. 박근혜 전 대표는 지난 15일 "한 회사의 시장점유율을 매체 합산 30% 이내로 제한하면 (신문에 의한) 독과점 우려가 사라질 것"이라고 말해 당 안팎에 파문을 일으켰다. 2007년 6월 신문방송편집인협회 세미나에서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방송을 국민 품으로 돌려주고 방송산업의 미래 경쟁력을 강화할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했던 말이 이렇게 바뀐 것이다. 광우병 소동, 탄핵 방송에서 보듯 한국 국민의 의식을 가장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는 매체가 지상파이고, 방송 3사의 지상파 독과점이 여론을 왜곡하는 근본 요인이라는 현실에 완전히 눈을 감은 것이다. 박 전 대표의 발언이 사실 오인(誤認)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의 정치적 손익을 계산한 결과인지 모를 일이다.

    19일엔 김형오 국회의장이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미디어법은 조선·중앙·동아를 어떻게 참여시키느냐 하는 게 관건"이라고 했다. 상대 신문에 확인 한번 안 해보고 야당의 선동에 맞장구를 친 꼴이다. 미디어법이 정말 그런 것이라면 당장 때려치워야 마땅하다.

    지금 이 나라에선 1980년 신군부가 언론 통폐합과 신문·방송 겸영 금지 조치를 통해 정착시킨 현재의 지상파 독과점을 유지시키려고 야당과 여당과 방송이 손을 맞잡는 해괴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