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정규직 근로자들의 해고 대란(大亂)을 유발한 가장 큰 책임은 정치권에 있다. 여·야는 비정규직 대량 해고가 막판 초읽기에 들어간 상황에서도 정치적 이해득실만 따지며 법 개정을 외면했다. 여기에 당사자도 아닌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을 협상에 끌어들인 게 정치적 타협을 더 어렵게 했다.

    여·야 3당이 양 노총을 끌어들여 5인 연석회의를 만든 것은 추미애 국회 환경노동위원장이 "사회적 합의가 전제돼야 한다"며 비정규직법 개정안 처리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추 위원장은 사실상 노동계 동의를 전제조건으로 내걸고서 지난 4월 1일 정부가 낸 개정안을 상정조차 하지 않았다. 한나라당이 "노동계 의견을 들어보자"고 한 것도 거부했다. 그래서 여·야 3당 간사들이 궁여지책으로 내놓은 것이 5인 연석회의다.

    5인 연석회의는 구성부터 잘못된 기구다. 고용자인 경영계 대표도, 피고용자인 비정규직 대표도 빠졌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은 비정규직을 대변하는 단체가 아니다. 양 노총 조합원 절대다수는 대기업 정규직이다. 정규직 근로자의 노조 가입률은 17.4%인 데 비해 비정규직의 노조 가입률은 3.4%밖에 안 된다. 문제의 당사자들인 비정규직 대표나 경영계 대표를 모두 빼놓아 첫 단추부터 잘못 뀄으니 협상이 제대로 될 턱이 없었다.

    두 노총은 처음부터 끝까지 "비정규직 고용기간을 늘리는 것이나 법안 시행을 늦추는 것은 절대 안 된다"고 고집을 부리며 협상 타결을 가로막았다. 그러면서 비정규직 해고사태에 대해선 "누군가 그 빈자리를 채우게 되니 마찬가지 아니냐"며 관심도 두지 않았다. 기업들이 정규직 전환 부담을 몽땅 덮어쓰건 아니면 비정규직들이 거리에 내몰리건 자신들은 아무런 부담도 피해도 없다는 속셈이었다. 정치권이 이런 노총을 붙들고 앉아 비정규직 문제를 풀겠다고 한 것 자체가 얼빠진 짓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동안에도 양 노총은 입으로만 비정규직을 위하는 척하면서 행동은 딴판으로 해왔다. 민주노총 핵심 사업장인 현대자동차노조가 그동안 세 차례나 사내 비정규직의 노조 가입 안건을 대의원대회에서 부결시킨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GM대우노조 창원지부 집행부가 비정규직을 노조원으로 받아들이려다 조합원들로부터 불신임 탄핵을 받은 일도 있다.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법에 보장된 차별 시정 조치를 받으려면 우선 정규직 노조에 가입해야 한다. 그러나 정규직 노조원들은 "일자리를 위협받게 된다"며 거부하고 있다. 기업 현장에선 비정규직들이 회사측 차별 대우보다 정규직들의 홀대에 더 울분을 터뜨리는 경우가 많다. 더욱이 비정규직 문제가 이렇게 심각해진 것도 정규직에 대한 과보호에 원인이 있다. 경영이 어려워져도 정규직은 임금을 깎기도 어렵고 해고는 더더욱 안 되니 기업들이 비정규직 채용을 늘린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을 '착취'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비정규직 문제를 풀려면 바로 이런 현실부터 제대로 봐야 한다. 그런 다음에 정규직과 비정규직 문제를 나란히 올려놓고 해법을 찾아야 한다. 정규직 노조가 임금과 근로시간, 고용 문제에서 양보를 해야만 비정규직에 대한 근원적 처방이 나올 수 있다. 비정규직 문제의 당사자를 빼놓고 사회적 합의를 구하겠다는 식의 망발은 이번 한 번으로 족하다.

    <7월3일자 사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