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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주연 한국문학번역원 원장. ⓒ 뉴데일리
죽음이 또 도마 위에 올랐다. 산 사람들을 위해서도 그렇고 어차피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을 위해서도 그렇고, 무엇보다 죽음 그 자체의 위엄을 위해서도 인공호흡기 따위에 의존하는 구차한 생존은 의미 없다는 생각이 일정한 사회적 공론을 거치면서 마침내 법적인 승인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엉뚱한 방향을 열어 놓았다. 엉뚱하다고 했으나 그것은 사람들의 생각일 뿐, 생명은 역시 사람의 계산과 지혜를 넘어서는 엄숙한 것, 하늘에 속한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사건이 일어났다. '존엄사'라는 이름 아래 인공호흡기를 제거했음에도 죽음이 예정된 환자는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다. '김 할머니'의 예후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어쨌든 그는 사람들의 지식을 벗어나 있다. 생명의 신비, 그 장엄함이라니!
그럼에도 이 신비와 장엄에 대한 격한 도전을 보는 마음은 서글프다. 1996년 한 젊은 소설가가 자살을 도와주는 자살 도우미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집을 발간하면서 문단이 잠시 작은 충격을 받았었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제목의 책으로, 작가는 신인 김영하였다. 그는 갖가지 자살방법을 소개하더니 몇 년 뒤 무능한 아버지를 폭행하는 아들을 그린 작품도 발표했다. 놀라운 일은 이후 소설가는 우리 소설계에 신풍을 일으키고 마침내 중요 문학상들을 모두 거머쥐고 제도권 문단의 새로운 중심으로 떠올랐다는 사실이다. 이제는 젊은 작가들이 앞다투어 시체가 횡행하는 호러 미스터리를 양산하다시피 한다.
날로 증가하는 자살과 살인 등을 바라보면서, 이런 문학 작품들이 마치 악몽처럼 내 머리에 떠오른 까닭은 무엇일까. 자살이라는 소재나 주제에 무심했던 나의 비평적 태만에 자의식이 생긴 것인가. 많은 사람으로부터 자살사이트가 애용될 정도로 급증하는 현실에 문득 두려움이 생긴 것인가. 어린 10대들의 자살에 개탄하던 성인들 앞에 급기야 전직 대통령의 자살까지 발생하고 말았으니…. 우리나라의 자살 숫자는 해마다 늘어나서 작년에는 연간 1만3000여명, 이는 하루에 30명을 훨씬 넘어서는 숫자라고 한다. OECD 회원국 가운데 1위라고 하는데 잘못 들은 통계이기를 바랄 뿐이다.
정말이지 자살은 무섭다. 그것은 생명에 대한 정면 거부이며, 완강한 자아보수(自我保守)다. 죽으면 죽었지 달리 생각하거나 달리 살기는 싫다는 결단 속에는 저 유다의 비장한 자아보수의 아집이 들어 있다. 두 사람 똑같이 예수를 배반했으나 회개하여 예수 제자의 반열에 든 베드로와 달리, 죽음으로 자기의 길을 간 유다를 배신자로 기록하는 것은 그가 자기 자신 이외에는 다른 모든 이들과 세상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자살이 두려운 것은 이처럼 무서운 독존(獨尊) 때문이다. 그리하여 자살하는 사람들과는 좀처럼 통화가 되지 않는다.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는 것보다, 자신의 '참'만을 배타적으로 외치면서 그것만이 진리라고 믿고 또 주장한다. 자살이 많은 까닭은 이처럼 자기의(自己義) 실현의 미수(未遂)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이렇듯 남아 있는 자들과 세상을 향해 치고 있는 두꺼운 자존의 벽인 자살은 생명의 영을 빼앗는 악령이다.
죽음은 죄의 대가로 초래된 악령이다. 자살은 말할 것도 없고 별의별 죽음들이, 마치 시인 파울 첼란이 "상갓집 걸인처럼 찾아온다"고 했듯이 우리 주위를 떠돌고 있다. 한두 명의 살인은 뉴스거리도 못 된다는 듯 10명, 20명씩을 죽이는 살인광이 심심찮게 등장하고, 대형화된 사건 사고 역시 우리를 죽음 불감증으로 몰고 간다. 습성화된 작은 에고이즘이 어린이들까지 무참히 죽여 버리는 세상 앞에서 말세를 되뇔 수밖에 없는 입술은 가련하다.
인터넷을 도배질하고 있는 죽음에의 선동 같은 과격한 댓글들을 보면 살기에 가득 찬 이 사회의 악령이 눈에 잡힌다. 문학예술분야에서도 "순수한 아름다움"은 백안시되고 엽기적 표현만이 포스트모던한 진실처럼 호도되는 현실 앞에서 겸손과 소박을 말한다면 시대착오가 될까. 기도하는 심정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삶은 죽음으로 완성된다"고 했다. 이 의미는 삶을 자연의 질서에 따라 순종하고 그 전 과정을 완주했을 때 맞이하게 되는 죽음은 그것을 통해 삶의 또 다른 차원을 열어가게 된다는 뜻이다. 한편에서 존엄사가 이야기되고 '죽음학'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현실과 더불어, 삶과 죽음에 대한 경건한 자세의 회복을 기대하고 싶다. <조선일보 6월30일자 아침논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