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바마의 북(北) 압박·봉쇄는 전략적 차원의 결정
    북한은 시범케이스에 걸려들었다
    한국이 출구(出口)전략 없이 달려들기엔 엄중한 상황"

    이명박 대통령은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서 갑자기 대북제재를 접고 대화로 방향을 틀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아두려 했다. 이 대통령은 북한의 2차 핵실험 다음 날 오바마와의 전화 통화에서 "북한은 (2006년 10월) 1차 핵실험 때 (곧바로 미국과) 대화가 재개되는 보상을 받았다"며 "비슷한 패턴이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 전화 통화로부터 20일 뒤,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한미 두 대통령의 공동 기자회견이 열렸다. 오바마의 입에서 "북한의 호전적 행동과 도발에 대해 보상하는 과거의 잘못된 패턴을 깨야 한다"는 말이 나왔다. 이 대통령으로선 자신의 설득이 주효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한미 관계자들에 따르면 그전에 이미 오바마를 중심으로 한 워싱턴의 기류는 충분히 강경해져 있었다고 한다.

    사실 오바마는 대북 대화론자였다. 대선 후보 때 "임기 첫해에 김정일 등과 조건 없이 만날 용의가 있다"고 했고, 대통령 당선자로서 미·북 직접 대화를 제안했다. 이런 오바마가 집권하자 한국 야당과 좌파단체들은 한껏 기대감을 표시했다. 이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이명박 정부가 당장 햇볕정책을 되살리지 않으면 북한이 미국만 상대하는 통미봉남(通美封南)의 위기를 맞을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야당 대표는 "이 대통령은 오바마에게서 많이 배우고 오라"고도 했다. 그만큼 한국 내 분위기는 미국 쪽에서 최근 두 달여간 대북 강경 발언이 쏟아져도 잠시 저러다가 북한과 곧 대화에 나설 것이란 전망이 우세했다.

    그러나 정부 고위관계자는 "현장에서 맞닥뜨린 오바마측 분위기는 우리가 말려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 만큼 강하고 단호했다"고 전했다. 오바마는 왜 취임 5개월여 만에 대북 대화론자에서 강경론자로 바뀌었을까. 가장 직접적인 답은 북한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북한이 도발을 통해 이득을 취해 온 과거 16년의 환상에 빠져 미국의 대화 제의에 핵과 미사일로 응수한 이상, 오바마도 강경책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해석이다.

    하지만 오바마의 대북 강경책에는 보다 깊은 전략적 고려가 담겨 있다. 북한과 이란은 미국의 침공으로 정권이 무너진 이라크와 더불어 '악의 축(axis of evil)'으로 불렸던 나라들이다. 오바마는 '악의 축' 국가 중 남은 두 나라를 상대로 북한엔 압박과 봉쇄, 이란엔 대화라는 상반된 정책을 꺼내 들었다. 뉴욕타임스 데이비드 생거 기자는 "오바마 팀은 북한은 유일한 관심사가 체제와 정권의 생존이고, 무기를 팔아 돈을 버는 것이라 협상의 여지가 없어진 반면, 중동의 강자(强者)로 부상하려는 이란은 외교가 통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했다. '트위터(twitter)'라는 신종 인터넷 서비스까지 이용하는 시위대가 거리에 등장한 이란은 외교 할 맛이 나는 나라인 반면, 핵무기가 정권의 생존을 보장해 줄 것이라 믿고 잔뜩 웅크린 북한에 대해선 압박과 봉쇄가 더 효과적이라는 판단을 내렸다는 것이다.

    오바마 정부는 '북한의 도발'을 세계 전략의 '시범 케이스'로 다루기로 작심한 듯하다. 이란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에 '미국의 의지'를 오판하지 말라는 경고 메시지를 대북 강경책을 통해 보내고 있는 것이다. 1990년대 클린턴 정부에서 북한 문제를 직접 다뤘던 인물들이 대거 오바마 정부의 중간 정책결정자로 포진해 있으면서 이런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여기에 워싱턴 조야(朝野)까지 가세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이런 오바마 정부를 향해 '단호한 대응'을 주문했다. 오바마 입장에선 마다할 이유가 없다. 정부 관계자는 "미국은 이제 한국이 어디까지 공동보조를 취할지 주목하고 있다"고 전했다. 1993년 1차 북핵 위기 때 미국은 김영삼 정부가 '단호하지만 너무 단호하지 않게(firm, not too firm)'라는 헷갈리는 주장을 한다고 비난했었다. 대북 압박과 봉쇄로 틀이 짜인 지금 상황이 계속되면 태평스럽기만 한 한국에서 예상도 못했던 심각한 안보 위기를 맞을 수 있다. 문제는 우리의 출구(出口)전략이다. 이명박 정부는 이에 대한 구상과 로드맵을 갖고 있는 것일까. 한미 간에 대북 대화의 복안은 있는 것인가.

    미국이란 세계 제국의 방향을 틀려면 상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1994년 4~5월 미국의 북폭(北爆)이 눈앞의 현실로 닥치자 결국 한국이 미국의 발목을 잡았다. 그리고 그해 가을 한국은 미·북 제네바 협상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면서 그 합의에 따른 수십억달러의 경수로 건설 비용을 떠안았다. 이번 '북한 드라마'는 어떤 모습으로 막을 내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