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년 여름에 작고한 외우(畏友) 이청준은 그의 평생 작업을 한(恨)의 문제에 매달렸던 소설가였다. 그는 글쓰기 43년의 세월을 25권에 달하는 전집으로 묶어 죽기 직전에 펴내었는데, 등단작 '퇴원'을 비롯해서 출세작이 된 '병신과 머저리', '당신들의 천국', 중기의 '잃어버린 말을 찾아서', '비화밀교' 그리고 후기에 이르러 대표작이 되다시피 한 '눈길', '서편제', '벌레이야기', '축제' 등이 모두 이 문제와 힘든 싸움을 벌인 피눈물 어린 기록들이다.

    "피눈물"이라는 표현을 나는 썼는데, 대학 동기동창이기도 한 우리는 그가 죽기 전까지 한 동네에 살면서 적잖은 대화를 나누었고 이를 통해서도 나는 그 "피눈물"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실로 환도뼈를 내려치는 야곱의 씨름 그 이상이었다.

    이청준의 씨름은 세상살이에서 만나는 모든 억압,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심리적 억압, 조직이나 집단으로부터 당하는 물리적 억압, 정치권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전면적인 억압 등이 모두 그의 주제가 되었다. 그는 형제, 부자, 고부 등의 가족관계, 군대조직, 독재체제 등의 억압과 이에 맞서 살아나가는 개개인의 반응을 근원적으로 섬세하게 파고들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관계는 '억압/항거', 혹은 '억압/체념'의 형태로 나타나기 마련인데, 그 어떤 경우라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한이라는 독특한 정서가 유물로 전해져 왔다. 그 가장 비근한 예가 고부관계로 시어머니에게 당한 며느리는 다시 자신의 며느리를 향해 소위 한풀이를 해오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형태는 한풀이라는 이름의 해원(解寃) 행위로서 본질적으로 복수(復讐)의 다른 이름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한풀이라는 말의 "풀이"가 어쩐지 비문화적으로 들리는 이유다.

    이청준 문학의 포인트는 여기에 있다. 정치적 억압의 재생산과 비문화적 한풀이로 연결되지 않는 어떤 "승화"가 없을까. 광주가 낳은 수재로서 광주민주화운동과 이를 둘러싼 숱한 논의를 지켜보아온 작가로서 그가 내놓은 해답은 "예술"과 "문학"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말하기 좋은 예술지상주의가 아닌, "피눈물 나는 예술"이다. 가령 그가 소설 '서편제'를 통해 "소리"라는 예술을 한의 승화에 대한 답으로 내어놓았을 때, 그것은 눈까지 멀어가면서 행하는 절체절명의 "피눈물"인 것이다. 참된 예술은 억압과의 싸움에서 얻어지는, 생명을 건 양식(樣式)임을 그의 문학은 말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모든 억압은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치열한 정신의 생산을 가능케 한다. 16세기 스페인 풍자소설 '돈키호테'가 합스부르크 절대 군주정치의 억압을 과장된 광기를 통해 고발하고 자유와 인간을 창조해 냈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18세기 초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역시 난쟁이 나라와 거인나라의 설정을 통해 억압적 봉건체제를 신랄하게 비판한 명작으로 시공을 넘어 애독되고 있지 않은가. 억압은 나쁜 것이지만, 동시에 가열한 정신적 산물을 낳는다.

    문화의 양식은 권력의 비호 아래 생산된 것보다 이처럼 억압과의 싸움에서 획득된 것이 보다 큰 감동을 빚어낸다. 억압이 한으로 쌓이고 그것을 한풀이라는 형식으로만 해소한다면 참으로 아까운 에너지의 낭비가 아닐까. 이청준의 "피눈물"처럼 이제는 한을 넘어서는 품위 있는 문화의 양식이 추구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한의 정서를 한국인 특유의 "둥근(원형·圓形)" 의식형태로 해석하는 긍정적인 수용 방식도 있을 수 있다. 가령 모든 대립을 이기고 지는 것으로 간주하여 승자에게는 모든 것이 가고 패자에게는 아무 것도 가지 않는, 그리고 그 결과에 조금도 이의를 달지 않는 냉정한 수용방식보다 사뭇 "인간적"으로 보일지 모른다. 예컨대 후자의 전통을 "깨끗한(앗쌀한)" 것으로 여기는 일본인의 의식과 비교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문화예술에서는 잔인한 비극보다 익살맞은 해학의 마당극이 어울려 왔다. 치열하다는 표현보다는 흥겹다는 말이 한국인의 정서에 정겹게 붙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칩칩하다"거나 "구질구질하다"는 표현 또한 우리의 의식을 드러내주는 다른 말들이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고, 인생의 무수한 싸움에서 이기고 또 진다. 여기에서 예외인 인간은 없다. 한 민족의 문화유형을 알아보려면, 사랑과 이별, 패배와 죽음에 대한 반응을 들여다보고 그것들이 어떻게 문화적으로 양식화되었는가 하는 것을 꺼내보면 된다. 혹시라도 이별, 패배, 죽음이 한의 형태로만 질퍽질퍽 남아 있다면 그것은 초월성을 지닌 문화로서 미래를 기약하지 못한다. 피눈물을 아름답게 승화시키는 품위 있는 양식을 통해 보다 나은 전망이 열릴 것이다.
    <조선일보 5월28일자 아침논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