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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 12시 정각, 빨간 넥타이를 맨 30대 회사원이 부리나케 PC방에 뛰어들어와 단골 좌석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는 한 손으로 넥타이 매듭에 손가락을 넣어 느슨하게 풀면서 다른 손으로 인터넷에 접속했다. 양복 호주머니에서 USB를 꺼내 컴퓨터에 꽂고 기대감에 부풀어 모니터를 응시했다.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에이, 오를 줄 알았더니만…."
지난 20일 서울 명동에 있는 한 PC방 모습이다. 인근 A백화점에서 근무하는 이모(35) 과장은 거의 매일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이곳에 온다. 직장과 PC방 사이의 거리는 450여m. 그는 점심시간이 시작되기 직전 사무실을 떠나 뛰다시피 달려와서 4000원짜리 자장면을 시켜먹으며 40~50분 동안 상사 눈치 볼 필요 없이 주식투자에 몰두한다.
75석 규모의 이 PC방에는 이 과장 말고도 자투리 시간을 내서 주식을 사고팔러 온 회사원이 수두룩하다. 이들은 스크린을 메운 숫자의 등락을 따라가느라 '주식 삼매경' 상태다.
이 과장은 "회사 컴퓨터는 주식투자 프로그램을 까는 게 차단돼 있어서 주식 프로그램과 공인인증서가 담긴 USB를 항상 휴대하고 다닌다"며 "윗사람 눈치 볼 것 없이 조용히 주식에 '올인'하는 스릴은 맛본 사람만 안다"고 했다. 그는 모니터에 주식 커뮤니티와 은행 사이트를 동시에 띄워놓고 바쁘게 마우스를 클릭하면서 "2007년 겨울에 대운하 관련 주를 샀다가 2000만원을 까먹은 뒤로 한동안 외식도 못하고 살았다"며 "지난 3월부터 주가가 뛰기 시작해서 다시 투자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 20일 오후 서울 도심의 한 PC방에서 회사원들이 라면으로 점심을 때우면서 주식차트를 보고 있다. 회사 사규나 상사 눈치 때문에 점심 시간을 이용해 PC방에서 주식투자를 하는 회사원이 늘고 있다./정경열 기자 krchung@chosun.com
PC방 사장 최세억(55)씨는 "하루에 몇 명이라고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점심시간이 시작되자마자 왔다가 12시 50분쯤 황급히 돌아가는 단골 회사원들이 꽤 많다"고 했다. PC방 이용료는 시간당 1500원이다. 이 PC방 반경 300m 안에는 모 시중은행 본점을 포함해 대기업 10여개와 백화점이 밀집해 있다.
이런 풍경은 명동에서만 벌어지는 게 아니다. 기업 사무실이 밀집한 서울 광화문과 역삼동 일대의 PC방 20여곳을 취재한 결과, 어느 곳이나 상사의 눈을 피해 쏜살같이 달려와서 주식을 사고판 뒤 재빨리 귀사(歸社)하는 회사원이 많았다. PC방 주인들은 "2~3개월 전부터 적게는 4~5명에서 많게는 10명씩 평일 점심때 주식을 하러 오는 손님들이 두드러지게 늘어난 것 같다"고 했다.
증권가 전문가들은 "작년 11월 1000선 밑으로 무너졌던 코스피지수가 지난 3월부터 반등세로 돌아서더니 최근 1400대까지 급등한 데 따른 현상으로 보인다"고 했다. 주가가 떨어질 때 손해를 본 '넥타이 개미'들이 회사에서는 근무 중에 주식을 못해 가슴 졸이다가, 점심시간이 시작되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온다는 것이다.
한국증권거래소에 따르면, 점심시간(낮 12시~오후 1시) 동안의 하루 평균 유가증권 거래량은 지난 2월 4806만주에서 지난달 6629만주로 늘었고, 이달 들어 20일까지만 6514만주를 넘어섰다.
국내 증권사 가운데 개인투자자 비중이 가장 높은 키움증권 리테일영업팀(개인투자자 관리 전담부서)의 박영민(29) 대리는 "개인 고객 계좌 숫자가 지난 4월 기준으로 작년 9월에 비해 44% 늘어났다"며 "고객들 개인정보를 분석한 결과, 열 명 중 아홉 명이 회사원"이라고 했다.
이날 서울 강남역 인근의 또 다른 PC방도 낮 12시가 넘자마자 회사원 10여명이 몰려들었다. 이곳은 반경 200m 안에 대형 생명보험사와 공기업, 대기업 7~8곳이 들어선 곳이다.
정보통신 관련 대기업 계열사에 근무하는 김모(39) 부장은 "아랫사람들이 쑥덕거리는 게 신경 쓰여서 혼자 종종 빠져나온다"며 "다들 자리를 비운 점심시간에 회사에서 할까도 생각했지만, 에너지 절약을 위해 소등(消燈)을 하니 앉아 있기 갑갑했다"고 했다.
휴대폰이나 PDA 등으로 주식을 사고팔 수 있는데 굳이 PC방에 오는 이유에 대한 '회사원 개미'들의 대답은 다양했다. 대기업 직원 서모(34) 대리는 "손에 단말기가 들려 있으면 계속 지켜보느라 중독돼서 일을 못한다"고 했다. 백화점 이모(35) 과장은 "작은 단말기 화면으로는 주식차트의 흐름을 못 따라간다"고 했다. 또 다른 대기업 김모(39) 부장은 "다른 개미들도 모두 주식시장에 복귀하는데 나만 빠질 수 없다. 그래도 '중독되지 말자. 투자해서 10%만 벌어도 대박이다' 생각한다"고 했다.
PC방에 몰린 회사원 개미들에게선 '생활의 애환'이 짙게 묻어났다. 명동 근처 알짜 중소기업에 다니는 이모(36) 과장은 "작년 겨울 대기업 주식을 1300만원어치 샀다가 금융위기로 일주일 만에 300만원이 빠졌다"며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잔하고 집에 갔더니 마누라가 반찬값 1000원을 아끼려고 집에서 멀리 떨어진 할인마트에 간다고 해 눈물이 핑 돌았다"고 했다.
PC방에 몰리는 회사원 개미 중엔 외근 직원들이 특히 많다. 역삼동의 한 여행사에 근무하는 김모(29)씨는 "내근하는 사람들은 회사에서 상사 눈치 보며 주식을 하거나, 점심시간을 노려서 PC방에 왔다가 후닥닥 들어간다는데 나는 속 편하게 짬짬이 들를 수 있다"고 했다.
기업 인사 담당자들을 PC방 주식투자 유행에 대해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 기업 관계자는 "우리 직원들은 그럴 리 없다"며 "점심시간이 1시간밖에 안 되는데…"라고 했다.
회사원 개미들은 '만회'를 꿈꾸며 PC방을 찾지만, 이를 우려하는 사람들도 많다. 자본시장연구원 이인형(46) 연구위원은 "시간에 쪼들리며 짬짬이 하는 주식투자는 오판(誤判)의 여지가 있을 수밖에 없다"며 "정확한 판단을 하려면 많은 정보와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연세대 사회학과 박찬웅(44) 교수는 "불황으로 위기감을 느끼는 월급쟁이들이 일종의 '투잡(two jobs)' 개념으로 뛰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