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시아 하면 ‘시베리아’가 먼저 떠오르는건 내가 아둔해서가 아니라 학창시절 교과서에 충실했던 범생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멀고먼 나라였지만 10 여 년 전쯤에는 웬만한 유홍가 클럽에서 러시아 쇼걸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노랑머리에 전형적 유럽 스타일인 쇼걸들의 현란한 무대가 호기심을 자극했지만, 솔직히 난 한 번도 구경해본 적이 없다. 나이가 들어도 천성이 소심한 범생을 벗어나지 못하니 그냥 팔자려거니 산다.

    그시절 러시아 대통령이 아마 보리스옐친이었을 것이다. 옐친이라고 해봐야 내가 기억하는건 보드카를 병째로 즐기는 주당이라는 점과, 일자리 달라고 시위하는 군중들과 함께, 탱크 위에 올라서서 일장연설을 하던 그 유명한 해외토픽 사진 정도이다. 옐친이 대통령에 당선되고도 러시아의 경제가 파탄지경이 되고, 실업난이 회복되지 않자 러시아 쇼걸들이 일자리 찾아 대거 한국으로 진출했던 것이다.

    주정뱅이 옐친이 불명예 퇴진하며 푸틴을 지명했고 2000년 푸틴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러시아 쇼걸들도 한국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다른 이유가 있는게 아니라 그저 경제가 살아나며 일자리가 늘어난 때문이다. 덕분에 요즘은 노랑머리 러시아 쇼걸들은 구경하고 싶어도 못하게 되었다. 푸틴이 러시아를 통치한 8년 동안 그들의 국민소득은 한국을 따라잡아 버렸다.

    암튼 푸틴은 대통령으로서 승승장구했다. 강한 러시아라는 기치를 내걸고, 옐친시대 때 사기업화 되었던 기업들을 다시 국영기업으로 회수해버리고, 그 이익은 착실히 국민들 호주머니로 되돌려준 것이다. 등 따시고 배부르게 만들어 준다는데야 반대할 국민이 있을 수가 없다. 국민들은 푸틴에 열광 수준을 너머 신성시할 정도가 되었고, 자국민의 든든한 지지 백그라운드가 있으니, 외교적 행보도 거침이 없었다.

    재선에 너끈히 당선되고 한번 더하자니 ‘3선은 안돼요’라는 그 넘의 러시아 헌법이 발목을 잡았다. 헌법을 바꿀 만큼의 인기와 힘은 있었지만, 독재자 소리는 듣기 싫었던 푸틴은 변칙을 선택했다. 무명에 가까운 대학 13년 후배이자 심복이었던 ‘메드베데프‘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자신은 그 밑에 총리 자리를 꿰찬 것이다. 그리고 총리의 고유권한인 내각조각권에다 대통령의 고유권한인 외교권까지 빼앗아왔다. 누가봐도 섭정이고 상왕정치였다.

    이들의 불안정한 동거를, 토픽뉴스 매체들이 무관심할 리 없다. 1년이 조금 지난 요즘 ‘메드베네프’와 ‘푸틴’의 묘한 힘겨루기가 가시화되고 있는 모양이다. 아직은 힘의 논리상 한참 아래인 ‘메드베네프’의 반항 수준이지만, 지난 번 미국발 경제공황이 러시아에도 상륙했고 이 쓰나미가 두 사람의 위상 변화에 영향을 주고 있는 모양이다. 이 쯤에서  각설하고...

    다 아는 러시아 얘기를 중딩 수준으로 풀어 쓴 것은, 어쩐지 푸틴과 MB가 같은 배를 타고 있는것 같아서이다. 아직은 예단하기 어렵지만 4년뒤 권좌에서 내려오는 두사람의 뒷모습이  당당하고 아름다울 것 같지 않은 불길함이 들어서이다. 푸틴이 재선을 마지막으로 후계자를 지명하고 권력을 이양했으면, 영원히 존경받는 지도자로 남았을 것이다. ‘권력욕’과 ‘인기’는 잠시 동거할 수는 있어도 영원히 양립할 수는 없는 법이다. 푸틴은 ‘인기’와 ‘권력욕’을 영원히 차지할수 있다고 믿었겠지만 두 가지 다 허망한 거품이란걸 간과한 것이다.

    ‘인기’와 ‘권력’...워낙에 둘다 마성이 강한 마물이라 과하게 취하면 주화입마에 빠지는 법이다. 푸틴은 ‘권력’을 이용해 ‘인기’를 만들었고, 그 ‘인기’를 다시 ‘권력’에 재투자하면서 재미를 좀보자 막판에 몰빵을 해버린것이다. 마성에 빠져 이성이 마비된 과욕이었다.

    MB와 박근혜가 ‘좋은 동행자‘ 가 못되는 이유 중의 하나도 바로 이 두 가지를 나누어 가졌기 때문이다. 푸틴의 ‘인기’는 박근혜가 가지고 있고, 그의 ‘권력욕’은 MB가 나누어 가지고 있으니, 두 사람이 양립할 수 없는 이치인 것이다. 푸틴과 MB의 ‘권력욕‘은 포기와 양보가 없는 한, 끝이 빤히 보이는 비극이 될 수밖에 없음이다.

    그럼 박근혜의 인기도, 푸틴의 인기처럼 허무하게 스러질 것인가? ‘권력‘의 허망함을 일찍이 깨달아 지천명을 아는 박근혜가 ’인기‘의 허망함을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계영배를 보며 ’과유불급’을 경계하고 수십년 마음을 닦아온 박근혜의 정심 내공이 그 정도를 포용하지 못할까?  푸틴의 인기가 권력으로 얻은 것이라면, 박근혜의 인기는 그의 정심(正心)을 믿는 국민의  ‘신뢰’인 것이다.

    이미 권력을 잡은 푸틴과 MB가 한 시대를 풍미한 풍운아로 남을 것인지, 후세에 존경받는 지도자로 남을 것인지는, 이 마물의 유혹에서 얼마나 마음을 비우느냐에 달렸다.


    * 본 글은 인터넷논객 '풍운'님이 뉴토방에 올리신 글을 정리하여 편집한 것입니다. 외부칼럼 및 독자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으니 양해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