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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정국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으로 시작된 반정부 촛불시위로 혼란스럽다. 그 대책의 하나로 인사쇄신이 거론되고 있다. 인사가 현안으로 떠오르자 그 동안 잠자고 있던 정치인들이 갑자기 권력투쟁에 진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권력을 향한 투쟁은 섬뜩하기 까지 하다. 마치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당파싸움을 연상케 한다. ‘만사형통’이니 권력의 사유화니 하는 용어는 그들에게는 익숙한 용어인지 몰라도 우리 같은 보통사람들에게는 생소한 말이다.
지금 이명박 정부가 곤욕을 치르고 있는 것은 단순히 어느 계파의 인물이 청와대로 진입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념에 투철한 인물을 등용하지 못한데 따른 후유증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박영준이니 정두언이니 하는 특정 정치인들은 관심도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이 과연 정권교체를 이룬 보수애국세력을 대표하느냐의 여부다.
촛불시위가 연일 계속되고 있고 6월 10일에는 세종로에 컨테이너를 사용한 바리케이드까지 치는 엄중한 사태가 발생하였지만 한나라당 의원들은 어디 숨어 있는지 코빼기도 볼 수 없었다. 그러다가 겨우 얼굴을 내민다는 것이 권력투쟁이다. 적을 앞에 두고 권력투쟁이나 벌이는 한나라당이 고울 리가 없다.
더더욱 한심한 것은 이명박 대통령이 제시하였다고 전해지는 인선기준이다. 이번에는 반’고소영’ 또는 반’강부자’ 인물을 고르느라고 고생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것도 문제의 핵심을 잘못 보고 있다. 과녁이 빗나간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고소영이거나 강부자이기에 거부감을 가진 것이 아니라 도덕성을 결여한 사람들이 포함되었기 때문에 거부감을 가진 것이다. 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이념이 모호한 소위 ‘실용주의자들’이 권력의 핵심에 포진하였기 때문이 우리 보수애국세력이 실망한 것이다.
대한민국 건국 자체가 공산주의자들과의 투쟁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고 그 후에도 공산주의자들의 집요한 반국가활동을 극복하고 대한민국을 발전시켰다. 아직도 북한이 존재하고 북한을 추종하는 반역자들이 조직적으로 별개의 지하정부를 구성하고 있어 대한민국의 운명은 여전히 위태롭다. 이러한 엄중한 시기에 실용을 내세우는 것은 항복선언이나 다름이 없다. 이명박 정부의 실용노선은 그래서 위험하며 보수애국세력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정두언 의원이 이상득 의원을 공격하는 것이나 이명박 대통령이 반고소영 반강부자 기준을 내세우는 것은 모두 과녁을 잘못 잡은 것이다. 정두언 의원이 공격이 정당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문제의 제기가 이념의 문제와 결부된 것이어야 한다. 더구나 정두언 의원의 공격이 소위 한나라당의 소장파들과 특정계파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은 보수애국세력의 우려를 더 크게 만들뿐이다. 단순히 이상득 의원을 겨냥한 것은 그래서 과녁을 벗어난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도 이런 의미에서 과녁을 잘못 잡기는 마찬가지다.
다만 정두언 의원의 발언으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한나랑 내에 권력배분에서 소외된 계파나 세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소외된 세력이 보수애국세력을 대표하지 못한다면 단순히 권력배분에서 제외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권력투쟁을 벌이는 것은 우리들의 지지를 받지 못할 것이다. 자신들의 지분을 주장하는 것이 왜 정당한지 국민을 설득하여야 한다. 그것은 그들이 보다 더 보수애국세력의 가치를 더 잘 대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보기에 이번 권력투쟁은 단순한 인물의 교체로 끝날 뿐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권력투쟁으로 영조의 아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섬뜩한 권력투쟁을 연상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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