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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실용주의다. '이념의 시대는 지났다' '이념논쟁은 낡은 것이다' '이념을 뛰어넘어 실용의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 이것이 실용주의를 강조하는 이명박 정부의 선언이다. 실용주의를 통해서 한국경제의 “선진화”를 달성하겠다고 한다. 실용주의는 이명박 정부에게 국정철학이자 사회발전 원리이다.
이념을 뛰어 넘어 실용의 시대로 가야한다는 새 정부의 주장에서 분명히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재산권, 책임, 법치 그리고 개방 등, 자유주의 원칙에 대하여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실용주의는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는 한국사회에서 실현해야 할 절대적 가치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실용주의는 자유시장경제의 창달이라는 목표와 어떤 관련성이 있는가의 문제, 이것이 우리는 주목하고자 하는 것이다.
실용주의는 이념투쟁에서 무장을 해제하라는 것
첫째로 실용주의는 친 시장 개혁의 필연성과 배치된다. 한국사회는 지난 20년간 기업부문, 노동부문, 복지부분, 교육 부분, 그리고 정부부문 등, 각 부문에 사회주의가 화석처럼 법적으로 제도적으로 굳어져 있다. 이런 제도 때문에 한국경제가 대단히 어려운 지경에 놓여 있다. 그리고 이런 제도는 한국경제의 발전에 결정적인 장해물이 되고 있다. 이것이 김대중-노무현 사회주의 정부가 남겨놓은 법적 제도들을 개혁할 필연성이다.
그런데 이런 개혁에는 강력한 반대가 따르기 마련이다. 친시장적 개혁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것이 이런 개혁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치열한 이념적 투쟁이다. 아마도 총선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이념투쟁이 시작될 것이다. 좌파 지식인 단체들, 노조들은 지금 이런 이념투쟁을 철저히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투쟁에서 성공하기 위한 필수 조건은 자유주의와 시장경제체제에 대한 확신이다.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친 시장 개혁에 대한 반대자들과 이념투쟁에서 승리할 수가 없다. 확신이 없기 때문에 기회가 있어도 친 시장적으로 개혁에 실패한 나라는 대단히 많다. 1980년대 후반 스웨덴 우파, 1980년대 이후 독일 우파정부가 그랬다.
두 번째 문제는 반 기업, 반 시장 정서와 관련된 것이다. 우리나라는 그 어떤 나라보다 반 기업정서, 반 시장정서가 강력한 나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런 정서를 강화시켰던 것도 특히 김대중-노무현 좌파정부였다. 이런 정서는 한국경제의 발전에 중요한 장애물이다.
그러나 문제는 실용주의는 이런 정서를 제거하거나 약화시키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이 정서를 정당화하여 강화시킨다는 것이다. 왜냐 하면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확신을 못하는 것이 실용주의이기 때문이다. 체제를 확신하지 못하는 정부가 체제에 대한 반감을 가진 사람들을 설득시켜 친 제제로 전환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자기모순이 아닐 수 없다. 이념의 시대는 지났다고 말하는 것, 이념투쟁을 낡은 것이라는 이명박 정부의 말은 이념투쟁에서 무장을 해제하라는 것과 동일하다. 시민, 학생, 군인에 대해 자유주의의 우월성을 홍보하는 자유주의 이념 교육, 시장경제의 우월성을 교육하는 시장경제 교육도 의미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실용주의 정책은 반 시장주의 정책
셋째로 실용주의는 필요하면 언제든 시장경제 원칙을 버리겠다는 태도이다. 시장경제 원칙 대신에 실용정책을 택하겠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실용정책이 어떤 특성을 가진 정책인가의 문제이다. 이 정부가 지금까지 제시한 정책들을 보면 그 특성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두 가지 형태를 띠고 있다. 하나는 분배 중심적 실용정책이고 다른 하는 성장 중심적 실용정책이다. 전자의 대표적인 예는 신용불량자 대사면, 서민들을 위한 가격규제, 소유는 정부에게 경영은 민간에게 맡기는 반신불수 민영화이다.
성장 지향적 실용정책의 대표적인 예는 영어몰입교육, 영어 능력 우수자에게 대한 병역특혜부여, 기업과 하트라인 설치 등이 그것이다. 성장과 고용을 위해서는 필요한때는 언제나 돈을 풀고 금리는 낮추어야 한다는 이명박 정부의 통화정책 태도도 이에 속한다. 이쯤에서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실용정책의 특징은 자본주의 원칙에 어긋나는 정책이라는 것, 단기적으로는 가시적 효과가 있지만 그러나 장기적으로 투입할 수 없는 정책이라는 것이다. 실용정책은 시장경제의 원칙을 확립하는 정책이 아니라 시장경제의 분배결과나 자원배분결과를 수정하기 위한 '재량적인' 정책이라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실용주의의 역사적 뿌리이다. 그것은 1930년대 뉴딜정책 이후 서구의 좌파 정권들이 채용한 반 시장적, 반자유주의 정책이다. 노동시장규제를 통한 고용의 보호, 복지정책 등과 같이 사회주의 지향적 실용정책,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토목공사와 공공사업을 통한 고용정책, 돈을 풀어 고용과 생산을 늘리려는 통화정책 등이 실용정책의 역사였다. 그러나 그런 실용정책은 단기적으로는 가시적 성과가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저성장 고실업의 주범이었다는 것은 실용정책의 역사가 또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분배 지향적 실용정책에 중심을 두었던 독일과 스웨덴 경제의 실패가 입증한다. 케인스주의의 실용정책은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과 영국의 대처 수상의 등장배경이 되었다.
그리고 죤 듀이의 실용주의 철학이라는 것도 별것이 아니다. 정부는 시장경제 원칙에 얽매이지 말고 필요하면 그때그때 시장경제에 개입해야 한다는 논리를 정당화한 것이다. 원칙을 싫어하는 것을 정당화한 것, 이것이 실용주의이다. 이 철학을 이어받은 대표적인 것이 케인스주의라는 것이다. 시장경제의 원칙 때문에 정부가 그때그때 필요한 때마다 시장에 개입하지 못하는 것은 비실용적이라는 것, 이것을 정당화한 것이 실용주의 철학이고 케인스주의이다.
이명박 정부는 성공한 나라로부터 체제에 대한 확신을 배워야
이명박 정부는 “화합적인 자유주의”를 지향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 실용주의를 택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도 문제이다. 화합적 자유주의에서 “화합적”이라는 형용사를 붙인 것은 자유주의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유주의는 이른바 “아프리카의 정글”처럼 화합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정부가 나서서 화합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좌파의 주장을 수용한 결과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자유주의에 대한 완전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흥미로운 점을 설명하는 것은 생략하기로 하자
우리가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히 이명박 정부는 자유주의 정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자유주의 체제를 어떻게 화합적으로 만들겠다는 것인가? 때로는 분배 지향적 실용정책을, 때로는 성장 지향적 실용정책을 투입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염두에 둘 것은 화합적 자유주의는 자유주의가 아니고 그리고 실용정책은 원칙의 정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유주의를 보호하고 확립하는 정책은 원칙의 정책이다. 재산권의 보호와 책임 원칙 그리고 법치가 그런 원칙이다. 이런 원칙에 따른 정책만이 당면한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장차 선진국 진입을 위한 터전이 마련될 수 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이명박 정부는 실용주의를 버리고 그 대신에 신념을 가지고 자유주의 원칙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주의 원칙이야말로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사회발전 원리라는 것이다. 번영 속에서 평화롭게 누구나 행복을 누리면서 살 수 있는 체제라는 것이다.
얼마나 시장경제원칙을 충실히 따랐느냐가 레이건 대통령과 대처 총리 또는 아일랜드와 같이 성공한 나라냐, 독일과 스웨덴 아르헨티나 같이 실패한 나라냐를 판결해 준다는 것은 역사가 입증해준다. 자유주의 원칙을 확실하게 지킨 나라는 성공했고 그렇지 않은 나라는 성공했다는 역사적 사실, 이것은 자유주의 이념에 대한 확신을 갖기에 충분하고도 필요하다.
이명박 정부는 노무현정부의 실패만이라도 제대로 배워야 할 것이다. 노무현 정부의 실패는 이념의 시대는 지나고 실용주의 시대가 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 이념의 승리를 의미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이것이 국정철학이 실용주의가 아니라 자유주의이어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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