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1일자 오피니언면 '동서남북'에 이 신문 박두식 정치부 차장대우가 쓴 '386 정치인의 업보(業報)'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올해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은 만 46세이다. 1961년 8월생으로, 우리로 치면 386 세대에 해당한다. 그는 중앙 정계에 데뷔한 지 3년을 조금 넘은 신인이다. 오바마의 경우처럼 미국은 주기적으로 젊은 지도자를 만들어내곤 했다. 변화를 이끌 새로운 리더십에 대한 갈증을 그렇게 표출했던 것이다. 1960년 대선에 나설 당시 존 F. 케네디는 43세였고, 무명의 아칸소 주지사에서 일약 대통령이 된 빌 클린턴은 1992년 46세에 대선에 도전해 승리했다.

    또 요즘 대통합민주신당이 대선 참패에 따른 위기 탈출의 모델로 삼고 있는 토니 블레어 전 총리는 41세였던 1994년 노동당 당수가 됐고, 43세에 총리에 올라 '10년 노동당 정권'을 이끌었다.

    이 같은 외국의 사례들을 새삼 떠올리게 된 것은, 10년 집권 세력이었던 대통합민주신당 등 범여권 정당들의 요즘 상황 때문이다. 이들은 현재 정치적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한 달 전 대선에서 역대 최다 표차로 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17대 대선은 지난 5년간 지속적으로 진행돼 온 현 여권 몰락 과정의 클라이맥스였을 뿐이다. 5년에 걸쳐 이뤄진 붕괴가 대선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났던 것이지, 대선 때문에 현 여권이 위기에 처한 것은 아니다. "국민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여권 내부의 자탄이 결코 과장처럼 들리지 않는다.

    위기를 맞으면 대개의 경우, 정당 내부에서 과감한 세력 교체를 통한 재기를 도모하기 마련이다. 블레어나 클린턴, 케네디, 오바마 모두 10년 가까운 야당으로서의 고민 끝에 탄생한 신예들이다. 이들의 출현에 앞서 당내에선 새로운 인물과 세력, 노선을 찾는 힘든 과정이 있곤 했다. 그러나 현재의 범여권에선 그런 징후가 보이지 않는다.

    연령이나 세대로 볼 때 범여권의 386 정치인들이 이런 역할을 맡을 차례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들은 '노무현 실정(失政)의 주범'이란 평가에 잔뜩 움츠러든 상태다. 실제 노무현 정권은 '386 정권'으로도 불려 왔기 때문에 이런 평가가 가혹하다고 하기도 어렵다. 반면 신당 내부에서 운동권 출신 386들의 존재감은 크다. 한 의원은 "지난 5년을 거치면서 386 세력은 현 여권의 변수가 아니라 상수(常數)로 자리 잡았다"고 했다. 좌로 가든, 우로 가든 386의 동의와 지지 없이 당을 움직이기 어렵게 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내에서 힘이 커진 것과 비례해 이들을 보는 국민들의 시선 또한 차가워졌다. 일부 친노 386 때문에 전체가 매도당하고 있다는 게 이들의 항변이다.

    그러나 386 세력은 현 여권의 변화와 미래를 담당하겠다는 말을 꺼내기 힘든 상황이다. 이들이 직접 무대로 나설 수 없게 되자 또 다른 대안으로 찾은 게 손학규 당 대표 체제이다. 이들은 5년 전에도 노 대통령에게 "우리의 도구로 변함없이 나가 달라"고 했었다. 물론 손 대표는 손 대표이고, 노 대통령은 노 대통령이지 386의 대리인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을 떠받치는 주요 축이 386인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런 386의 모습은 기형적이다. 당내에서 막강 파워 그룹이 됐지만 정작 자신의 가치와 노선을 드러낼 수 없다면 '왜 정치를 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이런 상태로 가면, 머지않아 386들은 거리의 투사 출신다운 배짱과 기개도 잃고, 바뀐 세상과 시대에도 적응하지 못해 실패한 세대라는 평가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