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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20년 전인 1987년은 “대통령은 우리 손으로”를 실현한 해입니다 정부를 우리 손으로 택하기만 하면, 만사가 해결되리라는 희망이 부풀던 해였지요. 민주주의가 심화되기만 하면 모든 문제는 전부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지요. 1987년 개정된 헌법은 이런 믿음의 결정판이었습니다.
그런데 1987년 민주화와 관련하여 논쟁이 다양합니다. 1987년이 민주화의 원년이냐, 그 민주화를 이룩한 세력이 어떤 세력이냐, 그것은 시민들과 집권세력간의 타협의 산물이냐 집권세력의 항복의 결과냐 등이 그런 논쟁에 속합니다. 이런 논쟁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대단히 중요한 쟁점 하나를 놓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를 볼가요.
1987년 민주화와 무제한적 민주주의
정부를 우리 손으로 뽑기만 하면 만사가 해결되리라는 믿음, 이를 “민주화의 믿음”이라고 부르지요. 그런데 그 믿음을 기반으로 하여 우리는 여러 정부를 우리 손으로 선출했습니다. 노태우 정부를 비롯하여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현재의 참여정부가 모두 직선제를 통해 구성된 민주 정부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정부들이 제각기 펼친 입법정책이나 경제정책의 특징입니다. 노태우 정부는 “포퓰리즘적인 사회주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정치적 기반이 취약했기 때문이지요. 친 노동정책과 사회복지제도의 확장이 그것입니다. 김영삼 정부는 경제보다는 정치개혁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규제개혁을 소홀히 하다가 외환위기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자유주의와 시장경제로 가는데 가장 절호의 기회였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놓쳐버린 정부가 김영삼 정부라고 봅니다. 자유주의 시장경제에 대하여 어정쩡한 정부였거든요. 이념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정부였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 같군요.
김영삼 정부의 어정쩡한 이념적 틈새기에 좌파적 이념으로 채워버린 정부가 김대중 정부였습니다. 노태우 정부는 “무의도적인 사회주의”라는 점에서 김대중 정부와 다른 것 같아요. 후자는 “의도적인 사회주의”였기 때문이지요.
노무현 정부는 노태우 정부의 포퓰리즘과 그리고 김대중 정부의 의도적인 사회주의를 계승한 정부라고 봅니다. 물론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사회주의는 차이가 있습니다. 노무현 정부는 김대중 정부의 좌파정책을 계승하고 심화하고 전 사회에 확대하고 그리고 사회분위기와 개인들의 심성까지도 사회주의로 변모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보안법폐지, 과거사 캐기, 신문법, 사학법 등을 통하여 사회전반에 사회주의를 확립하기 위한 하드웨어에 치중했다는 것이죠. 노무현 정부는 “반체제 정부”와 유사하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이런 모든 정부정책들은 민주화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역대 정부들이 민주화의 이름으로 모든 정책을 정당화했다는 것이죠. 이것을 우리는 “무제한적 민주주의(unlimited democracy)”라고 부릅니다. 포퓰리즘의 민주주의, 다수의 이름으로 모든 정책이나 정부활동을 정당화하는 다수결민주주의, 참여와 평등으로 만발한 실질적 민주주의 등이 무제한적 민주주의의 결과입니다. 고삐 풀린 민주주의라고 불러도 무방합니다.
무제한적 민주주의의 최고절정은 노무현 정권이지요.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는 선출되지 않은 사법기관의 판결도 무시해야 한다는 주장이 이를 입증합니다. 선출된 정부가 모든 것에 우위에 있다는 것이죠.
무제한적 민주주의란 이토록 무서운 것입니다. 선출된 정부가 만든 것이 아니면 그것은 법도 아니도 역사도 아니기 때문에 전부 없애버리고 다시 만들자는 것이 무제한적 민주주의입니다. 이처럼 무제한적 민주주의는 노무현 정권처럼 야만적이고 개화되지 못한 야비한 정권도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이런 정부를 탄생하지 못하도록 민주주의를 제한하는 것, 이것은 “제한적 민주주의(limited democracy)”입니다. 이런 민주주의를 1974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였던 하이에크는 “디마키(demarchy)” 라고 불렀습니다.
디마키 개념은 물론이거니와 무제한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조차도 한국에 정착된 개념은 아닙니다. 이런 개념을 사람들은 잘 알지도 못합니다. 혹은 민주주의를 제한하자고 주장하면 욕먹기 딱 알맞습니다. 민주주의는 제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이런 이유는 무엇일가요?
무제한적 민주주의의 두 가지 치명적 오류
그 이유는 민주화의 믿음의 바탕이 되고 있는 두 가지 전제 때문입니다. 그 하나는 민주적으로 선출한 정부사람들은 사리사욕을 버리고 오로지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위해 헌신하는 지극히 이타적인 인간이라는 전제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정부사람들은 다수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그 원하는 목적을 위해 사회를 조직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가진 인간이라는 전제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민주화가 이루어지면, 도덕적으로 훌륭하고 지적으로 현명한 사람들로 구성된 정부를 선출하여 이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면 만사형통이라고 믿었던 것이죠. 1986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뷰캐넌(J.M. Buchanan)의 개념을 사용한다면 1987년 민주화는 “낭만적인 국가관”을 전제한 것입니다.
이런 전제를 바탕으로 하는 ‘민주화’의 개념은 정치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요? 그것은 누가 지배할 것인가의 문제로 보고 있는 것이지요. 이에 대한 해답으로 유명한 인물은 죤 스튜어트 밀(J.S.Mill)이지요. 도덕적으로 훌륭하고 지적으로 현명한 사람이 지배자가 되어야 한다는 엘리트주의가 그의 유명한 답이었습니다.
정부가 훌륭하고 현명한 인물로 채워지면 그들의 정책을 제한할 아무런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면 될 것입니다.
‘1987년 민주화’ 이념에서 도덕적이고 지적인 사람들을 선출하는 것이 민주선거의 역할로 여겼습니다. 이상적인 민주주의란 “참된 공익”에 헌신하는 사람들을 선출하는 방법, 국가권력과 자원의 배분방법, 집단적 의사결정방법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런 방법은 조직을 구성하는 “조직규칙(organizational rule)”으로 표현됩니다. 정부를 조직하기 위한 규칙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민주화의 두 가지 전제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첫째로 정부사람들이라고 해서 국리민복에 헌신하는 이타적인 사람이라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나라님’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들도 보통사람처럼 인센티브에 따라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민주정치의 구성 원리를 볼가요? 그것은 다수의 지지입니다. 이런 지지가 없으면 정치적 생존이 불가능합니다. 경제논리로 봐서 아무리 훌륭한 정책이라고 해도 다수의 지지가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이것이 정치논리이지요. ‘어떻게 하든, 다수의 지지 만들기’, 이것이 민주정치의 구성원리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무제한적 민주주의라는 것이 이것입니다.
1987년 민주화 이래 우리의 정치는 이런 무제한적 민주정치였습니다. 지지표를 셈하는 민주정치의 구성원리 속에서는 이타심이란 자리를 잡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정부사람이 이타적이라고 한다면, 특히 좌파정권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도덕적 자만”인데, 위선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노무현 정권과 그 지지파에서 역겨울 정도로 그 도덕적 위선을 보아 왔습니다. 이것은 무제한적 민주정치의 첫 번째 치명적 오류이지요.
정부 사람들이 전적으로 사심을 버리고 국리민복을 위해서 헌신한다고 합시다. 그런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타심이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국리민복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국리민복을 달성할 수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지적인 전능(全能)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런 전제가 타당한가요? 사회주의 계획경제와 서유럽의 복지국가가 실패한 이유를 이런 각도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하이에크는 “지식의 문제(knowledge-problem)”라는 개념으로 그 실패의 원인을 찾습니다. 정부사람들이나 그 어떤 지식인들도 경제와 사회를 계획하고 규제하는데 필요한 ‘현장지식’-삶의 현장에서 일하는 개인들만이 가진 지식-을 알기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죠.
그럼에도 전능하다고 전제한다면 그것은 지적 자만인데 지적 허세와도 같습니다. 우리는 역대 정부, 특히 김대중-노무현 정권과 그 지지층에서 역겨울 정도로 그런 허세를 보아 왔습니다. 이것이 무제한적 민주정치의 두 번째 치명적 오류이지요.
도덕적 자만(위선)과 지적 자만(허세), 이 두 가지가, 하이에크의 표현을 빌리자면, “치명적 자만(fatal conceit)”이고 그래서 무제한적 민주주의는 치명적 오류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1987년 민주화의 치명적 오류이지요.
제한적 민주주의로서 디마키
우리는 1987년 이래 무제한적 민주주의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내손으로, 그래서 민주적으로 정부만 선출하면 만사가 해결된다는 낭만적인 국가관과 민주정치관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치명적 결과가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작은 시장과 큰 정부가 그것입니다. 경제적 성과가 최악의 정부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죠. 더욱 더 심각한 것은 다수의 지지라는 이름으로 자유주의자가 보기에는 “반 체제”까지도 도모하는 정부를 선출한 것이 1987년 민주화라는 것이죠.
물론 민주주의는 훌륭한 가치입니다. 그 가치를 위해서 우리의 젊은이들이 피도 많이 흘렸습니다. 그 가치를 보호해야 합니다. 그러나 집권 또는 재집권에 필요한 다수의 지지확보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제한적 민주주의는 민주주의 가치 그 자체도 허물어뜨립니다. 민주주의가 제한될 때, 그 진가가 발휘됩니다. 개인적 자유, 경제적 번영 그리고 심지어 시민적 자유까지도 가능합니다. 문명화가 가능하다는 것이죠. 무제한적 민주주의는 야만적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한국에서 무엇이 무제한적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했는가의 문제입니다. 한 사회의 상부구조는 불문헌법이든 성문헌법이든, 헌법인 것 같습니다. 민주정부든 권위주의 정부든, 정부의 입법정책과 경제정책을 제한하는 역할, 이것이 헌법의 역할이라고 봅니다. 물론 헌법은 정부를 조직하는 역할도 합니다. 그래서 헌법은 위에서 이미 언급한 조직규칙과 그리고 “제한규칙(limiting rule)”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후자가 각별히 중요합니다. 정부의 자의적인 공권력 행사로부터 개인의 재산과 자유,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정부활동을 제한하는 규칙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제한적 민주주의, 즉 디마키를 위한 제도적 조건입니다.
도덕적 위선이나 지적 허세를 부리는 야만적인 지식인들의 정치적 영향력과 그런 정치가들의 행동을 철저히 막아야 합니다. 이런 역할을 하는 것이 헌법조항으로서 제한규칙입니다.
그런데 자유주의 입장에서 볼 때, 한국헌법은 조직규칙에 너무 많이 치중하고 그 대신에 제한규칙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부의 도덕적 위선과 지적 자만을 효과적으로 막지 못했다고 봅니다. 1987년 이래 정부의 규모가 커져왔고 그리고 그 정부활동의 질도 더욱 열악해졌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한국헌법이 1987년 민주화에 영향을 받은 것이 역역합니다. 1987년 당시 민주화라는 강력한 화두 때문에 민주정부라고 해도 이를 제한해야 한다는, 민주적으로 선출한 정부라고 해도 개인의 재산과 자유를 침해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미국의 프리덤 하우스가 발표한 정치적 자유 지수가 보여주고 있듯이 그동안 정치적 권리의 보장은 크게 발전되었습니다. 민주화가 발전되어 왔다는 뜻이죠. 지난 20년 동안 민주화의 덕택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헤리티지 재단의 경제자유 지수를 보면 경제자유는 위축되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여러 통계가 보여주고 있듯이 1987년 이래 경제성장도 일관되게 나빠지고 또한 설비투자의 증가도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더구나 언론의 자유와 같은 시민적 자유까지도 위태로워지고 있습니다. 학문의 영역까지도 정부가 침투하고 있습니다. 종교의 자유와 교육의 자유까지도 침탈하고 있습니다. 무제한적 민주정부의 그 역겨운 도덕적 위선과 지적 허세 탓입니다.
1987년 민주화가 자유주의자에게 던져준 과제
이제 이 글을 끝맺음할 때가 되었군요. 1987년 민주화가 우리에게 중요한 과제를 던져주었습니다. 민주주의를 제한해야 할 과제입니다. 그래야 포퓰리즘 민주주의도, 다수결 민주주의도 그리고 분배와 참여로 만발한 위선적인 민주주의도 막을 수 있습니다. 이런 무제한적 민주주의는 야비하고 야만적인 정부를 탄생시키거든요.
헌법조항으로서 제한규칙을 강화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헌법조항을 자유경제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엄격하게 해석해야할 과제도 남겨놓았습니다. 무제한적, 그래서 야비하고 야만적인 민주정부가 등장하는 것을 막고 한국사회가 “자유의 길(Road to Freedom)”로 전진할 수 있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도덕적 호소입니다. 효과가 있다면 비공식적으로 도덕적 호소도 좋습니다. 그렇다면 제도화할 필요가 없지요. 그러나 도덕적 호소는 별로 효과가 없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로서 헌법적 제도화가 필요합니다. 어렵기는 하지만 대단히 효과적입니다.
민주화의 공고화, 이것이 한국 자유주의자들의 과제가 아닙니다. 제한적 민주주의의 공고화, 다시 말하면 디마키(demarchy)의 헌법적 제도화, 이것이 한국의 자유주의자들의 중요한 과제라고 봅니다.
디마키에서만이 문명된 정부를 가질 수 있습니다. 도덕적 겸손과 지적인 겸손을 구현하는 것도 디마키입니다. 이런 디마키에서 자유와 민주주의는 최상의 조합이 가능합니다.
<객원칼럼니스트의 칼럼내용은 뉴데일리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