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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화두는 단연 프랑스의 선거 결과다. 유권자들이 “자유의 길(the Road to Freedom)”을 선택했다. 복지와 분배 대신에 성장과 일자리를 선택한 것이다. 이런 선택이 돋보이는 이유는 프랑스가 반 기업정서 반 시장정서가 유럽에서 가장 극심한 나라가 자유의 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최근까지만 해도 자유경제를 찬성하는 비율이 겨우 36%이었다. 독일만 해도 65%나 된다. 영국(66%) 미국(71%) 그리고 심지어 중국(74%)과 비교할 때 한심한 수치이다. 그런 프랑스 유권자들이 노동시장의 유연화, 근로시간 연장, 감세추진을 핵심으로 하는 우파정부를 선택한 것이다.
프랑스 유권자들에게 기업은 사용자와 노동자간의 끊임없는 갈등의 장소, 노동자를 착취하는 장소로, 자유시장은 악의 소굴로 보였다. 기업의 활동을 억제하고 노동자를 보호하는 일, 그리고 정부의 지출로 경제성장을 이룩하는 일, 이런 일이 국가의 공권력의 역할이라고 믿었던 것이 프랑스 유권자들이었다. 그런 유권자들이 자유경제와 자유기업을 택했다. 그들은 “카우보이 자본주의”라고 욕하던 미국식 자유시장을, 심지어 미국과의 우호관계를 복원하겠다는 우파정부를 선택했다.
프랑스 경제의 실패와 복지국가
프랑스의 유권자들이 당면했던 것은 프랑스 경제의 실패였다. 10% 이상의 고실업과 청년실업이 24%를 기록하고 있다. 모두 유럽국가의 평균 실업보다 높은 수치이다. 유럽 평균 성장률도 못 미치는 1% 내외의 저성장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것도 프랑스다.
프랑스의 선거결과와 관련하여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저성장과 고실업의 원인이다. 시혜적 성격을 지닌 최소임금제도는 노동의 수요를 억제하는 주범이었다. 해고도 쉽지 않다. 해고의 정당성 문제는 항상 소송의 대상인데다가 해고 수당은 해고비용을 가중시키고 있다. 노동시간(주당 36시간)이 짧기로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 일자리 나누기 정책의 수단으로 도입한 노동시간 단축도 노동비용 인상과 생산성의 하락 그리고 이로 인한 기업의 부담만을 증대시켰다. 이 모든 제도의 치명적 결과는 실업의 증가뿐이었다.
더구나 시혜적인 실업급여제도는 도덕적 해이를 야기하여 실업도 “괜찮은 직업”으로 만들었다. 그 뿐인가? 실업자의 생계를, 질병과 건강을 그리고 노년의 생계를 책임지겠다는 국가의 장밋빛 약속은 정부지출 증대만을 초래했다.
GDP(국내총생산액)의 56%를 정부가 사용한다. 유럽에서 스웨덴(64%)에 뒤이어 두 번째로 높은 수치다. 매년 예산적자가 GDP의 3% 이상이나 된다. 정부부채로 채우고 있다. 누적된 정부부채는 현재 64%이다. 프랑스는 독일(60%)과 함께 유럽에서 국가재정이 가장 나쁜 나라에 속한다.
프랑스 경제의 심각성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사적 영역은 국내총생산액(GDP)의 절반도 못되고 과반 이상을 비능률과 낭비의 온상인 공공부문이 차지하고 있다. 과도한 조세를 통한 재산의 강제수용은 자유와 성장에 치명적인 결과를 야기했다. 48%의 소득세율과 그리고 소비세율을 합치면 프랑스 월급쟁이는 68%의 세금을 지불한다. 기업의 부담도 만만치 않다. 법인세(34%)가 높기로는 독일(39%)이 그 다음이다. 아일랜드(12%)나 폴란드(19%)에 비하면, 프랑스의 기업의 입지조건은 유럽의 최악에 속한다.
교육제도는 어떤가? 평등주의의 온상이다. 누구나 대학에 갈수 있게 만들었다. 학교와 교육훈련제도에서 경쟁도 없다. 그러니까 교육의 성과나 훈련의 성과도 열악하다. 이런 열악함은 프랑스 기업들의 국제경쟁력 상실을 초래한 장본인이다. 그 결과는 저성장과 고실업이다.
복지국가와 유럽문명의 거대한 실패
프랑스 경제는 완벽하게 실패했다. 그 원인도 분명하다. 정부의 과도한 규제와 그리고 과도한 조세 때문이다. 분배와 성장을, 그리고 결과평등과 자유를 결합하려는 무모한 실험의 치명적 결과, 다시 말하면 복지국가의 실험의 치명적 결과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이런 프랑스경제의 실패가 유럽문명에게 주는 의미이다.
유럽문명의 전통은 자유와 결과평등, 성장과 분배를 조합하여 이들의 가치를 동시에 달성하겠다는 야심이다. 이런 야심이 유럽 국가들의 헌법과 입법정책의 핵심을 이룬다. 그러나 이런 야심은 실현가능한가? 그 대답은 불가능이다. 그 이유는 1974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였던 하이에크가 분명하게 입증했듯이 “지식의 문제” 때문이다.
자유와 결과평등을 적절히 조합하여 법과 제도를 디자인하는 데에는 수많은 지식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그런 지식을 갖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법과 재도를 설계하여 실현하는 것은 토목공사나 건축공사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일이다. 사람들은 제각기 생각이 다르다. 추구하는 목적도 다르고 개인적인 상황도 제각기 다르다. 이런 것들은 시시각각으로 변동한다. 이와 같이 상이한 인간들을 포괄하는 법과 제도를 디자인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지식의 문제 때문에 독일경제도 실패했다. 스웨덴 경제도 그래서 실패했다. 이런 나라의 실패는 유럽의 문명의 실패를 의미한다. 프랑스 경제의 실패는 유럽문명의 실패를 입증하는 또 하나의 뚜렷한 증거다. 그 실패의 근원적인 이유는 지식의 문제 때문이다. 사회주의 계획경제가 망한 것이 지식의 문제인 것처럼 말이다.
유럽 국가들의 경제실패는 문명사적으로 볼 때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실패에 뒤이어 발생한 두 번째 “거대한 실패(the Great Failure)”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번영의 구조는 자유의 길
유럽문명의 실패는 복지와 분배는 성장과 그리고 결과평등은 자유와도 쉽게 융합할 수 없다는 것, 이런 융합의 결과는 자유도 없고 성장도 없고 오로지 실업만 존재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중도 우파든, 중도 좌파든, 중도로 향하는 모든 이념들은 사회주의 계획경제와 똑같이 실패하고야 만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가 갈 길은 “자유의 길” 뿐이다. 이런 길을 제시한 것이 미국의 전통이다. 이것은 분배적 평등은 자유와 성장과는 쉽게 융합할 수 없고 동시에 실현할 수 없다는 믿음의 전통이다. 미국의 문화권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다. 인격과 재산을 보호하고 자유로이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보호하는 것, 이것이 국가의 과제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전통의 경제적 성과이다. 흥미롭게도 미국의 고용과 성장이 유럽보다 더 크다. 유럽의 경직된 사회보다 유연성이 크기 때문에 삶의 기회가 훨씬 더 많이 생겨난다. 프랑스 사람들이 “카우보이 자본주의”라고 욕하는 미국이 지난 20년간 3100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했다. 프랑스는 같은 기간 겨우 3백만 개의 일자리 밖에 창출하지 못했다.
흥미로운 것은 유럽의 복지모델에 대한 블레어 영국 수상의 강력한 비판이다. 생산성과 연구 개발도 미국에 비하여 뒤처지게 하는, 더구나 현재 2000만 명의 실업자를 야기한 유럽의 “사회적 모델(social model)”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고 묻고 있다. 가난한 자를 빈곤에서 탈출하는 것을 막는 유럽의 복지 모델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2006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방글라데시의 유누스 박사의 표현은 더욱 더 매력적이다.
프랑스의 개혁가능성
프랑스가 처한 상황은 60~70년대 영국이 당했던 병(病)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독일병과 스웨덴 병도 마찬가지이다. 복지제도와 노동조합이 영국경제를 붕괴시켰다. 이 경제를 회복한 것이 마가렛 대처 수상이었다. 철의 여인이라고 부를 만큼 강력하게 개혁을 밀어 붙쳤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프랑스 유권자들이 “대처 스타일”의 경제개혁 필요성까지도 수락하는가의 문제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프랑스 유권자들은 그런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독일, 이탈리아 그리고 스웨덴의 유권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그들의 개혁의 한계이자 유럽문명의 한계이다.
더구나 대처 스타일의 개혁을 하기에는 걸림돌도 너무나 많다. 현재의 제도를 통하여 이득을 보는 그룹이나 계층의 저항이 중요한 장애물이다. 그리고 특히 주목하는 것은 프랑스의 반 시장정서, 반 기업정서, 반 부자 정서는 그 어떤 유럽국가보다도 강력하다. 프랑스 유권자들은 시스몽디나 콩트 등, 쟁쟁한 마르크스 이전의 사회주의자들의 전통과 루이14세의 콜베르 재상과 같은 간섭주의 전통에서 살아왔다. 반시장적이고 반기업적인 유산이 너무도 많은 것이 프랑스의 현실이다.
이런 모든 정황을 고려한다면 프랑스의 새 정부가 노조의 저항과 복지수혜자들의 저항에 굴복해서 포퓰리즘이나 보호주의에 빠질 우려도 배제할 수 없다. 우파정부가 집권했지만 여러 번 저항에 굴복했던 경험이 있다. 바로 그런 경험 가운데 하나가 지난해의 노동법 개혁의 중단이다. 26세 미만의 신규 채용된 노동자는 2년 동안 사용자가 자유로이 해고할 수 있게 하는 법이 프랑스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노동조합과 학생들의 저항에 못 이겨 집행하지도 못하고 며칠이 지나서 그 법을 다시 개정하여 원상회복시켰다. 이것은 입법과정과 법에 대한 존중을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더구나 빈번한 법 개정은 법의 예측 가능성까지도 손상시킨다. 흥미롭게도 이런 식의 입법은 프랑스에서 아주 흔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평화로운 사회의 번영을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법의 지배의 치명적인 위반이다. 시장의 불안정이 증대하고 따라서 기업들이 장기적인 계획을 세울 수 없다. 장차 법이 어떻게 변동할 것인지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럽문명과 노무현 좌파정권
그러나 우리가 우려하는 것은 프랑스가 아니라 한국경제이다. 분배적 평등은 자유 그리고 성장과 쉽게 융합하여 동시에 성취할 수 있다고 믿는 좌익의 노(盧) 정권 때문이다. 이런 믿음에서 복지모델을 점차 유럽식 복지모델에 접근시키고 있다.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확립하기 보다는 더욱 경직적으로 만들고 있다. 사회복지분야도 확충하고 있다.
그러나 노 정권이 인정해야 할 점은 지식의 문제 때문에 유럽의 사회적 모델의 실현은 불가능하다는 것, 그럼에도 실현하려는 노력의 결과는 고실업과 저성장 그리고 빈곤층의 확대라는 것이다.
최고의 복지정책은 일자리 창출과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시장의 유연성과 그리고 규제를 없애는 일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재분배를 통한 사회통합은 소규모의 사회, 아는 사람들끼리 사는 사회에서나 가능하다는 것, 그러나 오늘날과 같이 거대한 열린사회에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열린사회의 사회통합은 고용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그리고 의료보험과 연금보험도 민영화하는 일이다. 지식의 문제 때문에 국가독점의 보험제도는 도덕적 해이를 조장할 뿐이다.
유럽문명은 우리에게 반면교사(反面敎師)일 뿐이지 배울 것이 없다. 우리가 배울 곳은 영․미의 문화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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