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30일자 오피니언면 '동서남북'에 이 신문 강경희 파리특파원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프랑스 와서 불편을 느꼈던 것 중의 하나가 사전에 약속하고 예약해야 하는, 한국과의 문화적 차이였다. 몸이 아파 당장 진찰 받아야 하는데도 먼저 전화로 약속을 잡지 않으면 의사가 문도 안 열어준다. 미리 허락 받은 면담을 제외하고는, 사정이 있어도 학부모가 아이들 다니는 학교 안에 발을 못 들인다.

    정부부처 역시 출입 제약이 많다. 상당히 친하지 않고서는 공무원의 휴대전화 번호를 알기도 힘들다. 그러나 밀폐된 환경을 가졌다고 프랑스에 언론 자유가 없는 게 아니다. 개인주의가 뿌리내린 이 나라에서 누군가의 시간과 공간으로 끼어들자면 상당히 품을 들여야 하지만 ‘출입 통제’가 곧 ‘언로(言路)의 봉쇄’는 아니다.

    선진국에서는 기자들이 정부부처에 불쑥 들어가지 못하고, 브리핑제로 운영돼도 언론자유가 제약 당하는 걸로 여기지 않는다. 선진국과 비슷한 모습으로 바꾸겠다는데, 한국 기자들은 이 ‘선진 개혁’을 반대한다. 왜? 정부를 못 믿어서다.

    노무현 대통령은 “기자실 개혁 문제와 관련해 언론들이 세계각국의 객관적 실태를 보도하지 않고 진실을 숨기는 비양심적 보도 태도를 보인다”고까지 비판했다. 대통령이 알고 있는 ‘진실’이란 “OECD 27개국 중 브리핑룸 말고 기자실을 운영하는 나라는 미국, 일본, 이탈리아 3개국에 불과하다”고 국정홍보처가 낸 자료다.

    유럽 전역을 취재 다니면서 여러 종류의 언론 브리핑과 기자실을 경험했다.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유엔 유럽본부에는 하루 종일 기자들이 ‘죽치고 있는’, 한국과 같은 기자실이 버젓이 있다. 이곳에 상주하는 유엔 기자들은 1년 단위로 출입기자증을 갱신한다. 브뤼셀에 있는 EU집행위원회의 프레스센터는 수백명 기자들로 하루 종일 북새통이다.

    우리 정부가 어쨌든 “부처별 기자실은 없지 않느냐”고 주장하는 독일에서도 취재와 기사 송고에 불편을 겪은 적은 없다. 지난 3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EU 50주년 행사를 취재하러 갔을 때다. 500여명 기자들이 동시에 기사를 전송할 수 있는 대형 기자실이 오전 7시부터 밤 12시까지 문을 열었다. 기자실 뒤편에 매 끼니마다 뷔페 식사까지 차려주는 호사를 누렸다. TV 화면으로 전 일정이 완벽하게 생중계됐고, 곧이어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달려와 성실하게 기자들의 질문 공세에 임했다.

    지금 프랑스 대통령이 된 니콜라 사르코지의 기자회견에 참석했을 때다. 100분 간의 기자회견에서 사르코지가 방대한 정책 구상을 발표한 건 50분, 나머지 50분은 전 세계에서 온 기자들이 던진 수십 건의 국제정치 문제에 자세한 수치까지 들어가며 전문성과 자질을 보여줬다.

    국제투명성기구(TI)가 매년 공무원·정치인 등 공공 부문의 투명성을 평가하는 부패인식지수(CPI)에서 한국은 163개국 중 42위(2006년 기준)다. 정부는 OECD 27개국을 ‘기자실 있다, 없다’로 나눠 많은 쪽을 골랐는데, 투명성 순위로 줄세워 보면 한국보다 뒤에 있는 나라는 이탈리아, 체코, 슬로바키아, 그리스, 터키, 폴란드 6개국뿐이다. 독일, 프랑스, 미국, 일본, 영국 같은 20개국은 투명도가 세계 1~26위 안에 꼽힌다. 헝가리(41위)도 우리 앞이다.

    그러니까 정부가 기자들 취재방식을 어떻게 바꿀까부터 고민할 게 아니었다. 정부 스스로의 투명성 수준을 돌아보고, ‘투명한 다수’ 쪽에 들어가려는 노력부터 기울여야 했다. 선진국 총리나 장관, 대변인들이 언론에 대해 얼마나 똑 부러지게 브리핑하고, 충실하게 질의응답에 응해 국민들의 알 권리에 부합하는지를 먼저 고민하고 배웠어야 했다. 저런 미심쩍은 성적을 갖고 있는데 정부가 혹 국민의 눈귀를 가리지나 않을까 우려하는 게 언론의 기우(杞憂)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