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데일리에 '동북아 인사이드'를 연재하는 중국연구가 함명식씨가 보내 온 글입니다. 네티즌의 일독을 권합니다.

    일본은 한 세기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두 차례에 걸쳐 세계의 강대국으로 등장했다. 서구에 속하지 않은 국가 중 근대 이후 국제정치의 메이저 국가로 반복해서 등장한 나라는 일본 밖에 없다. 메이지 유신과 함께 서구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일본은 독일, 이태리와 함께 2차 세계대전의 동맹국으로 참전했으나 미국으로부터 원자폭탄 세례를 받은 이후 회복이 불가능한 몰락의 길을 걷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1947년 이후 시작된 냉전의 결과 다시 한 번 세계 강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견주게 되는 행운을 맞이한다. 그렇다고 전후 경제대국 일본의 부상을 단지 냉전이라는 구조적인 틀에 의해 발생한 부대적인 산물로만 해석할 수는 없다. 패전 이후 정치지도자들이 발휘한 뛰어난 리더십이 없었다면 일본의 모습은 오늘 날과 많이 달랐을 수도 있다.

    전후 일본의 재건을 성공적으로 이끈 지도자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을 회상한다면 단연 요시다 시게루를 떠올릴 수 있다. 요시다는 일본이 아시아 태평양 전쟁에서 패배한 직후 두 차례에 걸쳐 일본의 총리를 지낸 인물이다. 패전 이후 일본은 극심한 정치적 혼란에 빠져 있었다. 냉전 구도에서 구소련에 맞서기 위한 방편으로 미국은 일본과 굳건한 안보동맹을 체결함과 동시에 일본의 재무장을 요구하고 나섰다. 반면 독자적인 힘으로 일본의 부활을 염원하는 보수 민족주의 세력은 재무장을 추구하면서도 미국과의 동맹을 거부하는 중립적인 노선을 촉구하였다. 이와 달리 평화주의를 지향하는 급진주의와 좌파세력은 비무장과 함께 미국과의 동맹을 거부하는 중립노선을 지향하며 정치지도자들을 압박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일본의 총리로 재임중인 요시다는 동맹을 통해 미국에 국가안보를 위탁하는 한편 일본은 독자적인 재무장을 포기하며 경제발전에만 총력을 기울인다는 원칙을 제시한다. 오늘날 일본 “평화헌법”을 기반으로 한 요시다 독트린의 등장은 바로 이런 전후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즉, 요시다는 미국과 급진적인 정치 세력 및 보수적인 민족주의자들의 압력 하에서 절묘한 타협을 이끌어내며 일본의 경제성장과 국가안보라는 두 가지 업적을 동시에 일구어내는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한 정치지도였다고 할 수 있다.

    요시다에 비견될만한 중국의 지도자로 등소평을 들 수 있다. 등소평은 중국 공산주의 혁명의 지도자로 모택동, 유소기, 주은래 등과 함께 대장정에 참여해 생존한 얼마 안 되는 인물 중 한 사람이다. 등소평이 관심을 끄는 이유는 그가 무려 세 번에 걸쳐 숙청을 당하는 정치적 위기 상황에서도 매번 오뚝이처럼 다시 부활하는 강인함과 끈질김을 보였기 때문이다.

    정치지도자로서 그의 첫 번째 시련은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해방전쟁을 수행하던 와중에 찾아왔다. 당시 군사작전을 둘러싼 전술적 논란에서 모택동의 “인민전쟁” 개념을 지지한 등소평은 이 논쟁에서 패배한 이후 백의종군하는 운명에 처해졌다. 그러나 보다 큰 정치적 시련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 이후 혁명동지였던 모택동에게로부터 찾아왔다. 당시 권력 서열 2위인 유소기와 함께 주자파(走資派)로 분류된 등소평은 모택동의 정풍운동과 반우파투쟁 캠페인으로 인해 치명적 상처를 입으며 좌천된 이후 중국을 재앙으로 이끈 문화혁명 과정에서 다시 한번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는 정치적 수모와 역경을 경험했다.

    그러나 문화혁명이 종결된 이후 화려하게 재기한 등소평은 이후 중국 개혁경제의 설계자로서 경제발전의 초석을 다지는 정치지도력을 선보인다. 그의 출중한 리더십은 특히 1989년 천안문 사건 이후 발생한 정치적 사상적 혼돈에 종지부를 찍은 남순강화(南巡講話)를 통해 더욱 빛을 발휘한다.

    등소평은 1992년 초 중국 남부 경제특구 지역을 순회하며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노선이 나아갈 길을 정립하며 일관된 경제개혁의 추진을 대내외에 선언한다. 이는 천안문 사건 이후 입지가 크게 약화된 개혁파의 전면적인 복귀를 부르는 신호탄으로 작용하며 오랜 기간 지속된 개혁심화와 계획으로의 복귀 논쟁에 마침표를 찍는 역사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등소평의 리더십을 통해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던 중국은 다시 한 번 화려한 “제국의 부활”을 이룩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요시다가 전후 패전의 아픔과 정치적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한 일본 국민들로 하여금 경제발전에만 전념할 수 있는 제도적 초안을 성공적으로 마련해 주었다면 등소평은 극단적인 이데올로기 투쟁으로 황폐화된 중국의 경제발전을 이끈 지도자이자 설계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현실의 위기상황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며 과감하게 목표를 추진해 나갔던 요시다와 등소평의 리더십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제공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