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이란 무엇인가? 진부한 질문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그래도 한번 따져봐야 할 것 같다. 가격규제와 수량규제, 소득재분배와 자원배분을 위한 정부규제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사람들은 법이라고 부른다. 현 정권의 핵심 인사가 헌법으로도 바꿀 수 없는 부동산법을 만들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던 일을 우리 모두는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도 법이라고 부르고 있다. 더욱 더 호기심을 끄는 것은 어제 통과시키고 오늘 다시 고치는 법도 법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정말로 그런 것들도 법이라고 불러도 무방한가? 특정한 산업을 경쟁으로부터 보호하는 법도 법인요? 강남지역의 부동산구입만을 억제하기 위한 대출규제도 법이라고 부를 수 있나? 

    입법부에서 매일같이 법이라는 이름을 달고 입법자나 전문가도 알 수 없을 만큼 수없이 많은 것들이 생산되어 나온다. 문제는 입법부가 정한 것이면, 그것이 무엇이든 법이라고 말하는데 숨어 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고 보면 이 말만큼 웃기는 말도 없는 것 같다. 왜냐 하면 입법부와 법의 관계가 동의어 반복이고 따라서 그런 법 개념은 무법적으로 공권력의 행사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 것이나 다 법이라고 부르는 것을 우리의 도덕적 직관 또는 우리의 법 감정이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래서 이 글에서 주목하는 것은 세 가지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법이 심각하게 타락되었다는 사실이 그 하나이다. 

    왜 이렇게 타락했는가의 문제가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두 번째이다. 세 번째는 가장 기본적인 문제인데, 그것은 법이 “법다우려면” 그것이 갖추어야 할 조건이 무엇인가이다. 세 번째 문제부터 생각해보자.

    1. 법이란 무엇인가? 

    그 조건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이 글에서 일일이 제시할 수 없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서 두 가지만을 설명하자.

    (1)법은 국가는 물론 모든 사람들에게 예외 없이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일반적이다. 개인들의 특정한 사정이나 특수한 장 소와 시점을 고려하지 않고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행동규칙이다(보편성 원칙). 

    (2)법은 특정한 목적이나 동기를 내포하고 있지 않은, 그래서 탈 목적적인 행동 규칙이다. 특정한 행동을 당연 금지하는 내용을 가진 행동규칙이다. 이런 의미 에서 추상적이다(추상성 원칙).

    보편성-추상성 조건은 “네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라는 공자(孔子)의 말과 같다. 칸트의 “정언명령”도 같은 내용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도덕철학적 용어를 사용해도 좋다면 그것은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흄의 “정의의 규칙(rules of justice)”의 요건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조건을 갖춘 법은 정의의 규칙에 속한다. 이런 법이 실질적 법이다. 그러나 이런 조건에 관하여 좀 더 설명이 필요하다. 

    법의 보편성 조건은 법 규칙은 모든 개인들에게 예외 없이 똑같이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차별금지 원칙과 동일하게 보아도 무방하다. 법이 개인들의 특수한 사정을 고려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보편성을 충족하는 법은 특정한 행동 동기나 목적을 무시해버리고 특정한 행동을 예외 없이 금지하는 추상적인 행동규칙일 수밖에 없다. 금지하지 않은 행동방식은 개인들의 자유로운 선택에 맡긴다. 

    중요한 것은 어떤 행동을 금지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금지할 행동은 개인의 재산과 자유 그리고 인격을 침해하는 행동입니다. 침해하는 행동이 어떤 행동인가는 단번에 말할 수 없다. 진화과정 속에서 다양한 행동이 개발되고 침해하는 행동이 어떤 것인가도 진화과정 속에서 발견되고 확인된다. 이런 발견과 확인과정 속에서 정의의 규칙도 자생적으로 형성된다. 

    이 맥락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법이 보편성과 추상성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는 원칙, 정부는 이런 조건을 갖춘 법을 집행할 경우에만 공권력이 도덕적 정당성이 있다는 원칙, 이것이 유명한 “법의 지배(the Rule of Law)”라는 것이다. 이것은 법다운 법을 가려내는 도덕적 잣대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보편성-추상성을 갖춘 법의 전형적인 예는 소유권법, 계약법 또는 불법행위법과 형법으로 구성된 사법(私法)이다. 이런 법규범들은 개인들이나 인간 그룹들이 자신들이 정한 목적이나 좋은 삶을 자유로이 추구할 수 있는 틀을 마련해준다. 이런 법이 법다운 이유는 자유를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법은 자유의 법이다. 

    그리고 이런 실질적인 법을 집행하는 경우에만 공권력을 행사할 것을 허용해야 한다는 원칙이 법의 지배이고 이런 원칙을 준수하는 국가를 법치국가(Rechtsstaat)라고도 부른다. 법의 지배는 정부의 권력을 제한하여 개인들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라고 말할 수 있다. 정부의 자의적인 권력의 행사로부터 개인들을 보호하자는 것이다. 법의 지배는 정부의 행동을 제한하는데 뜻을 둔 문명의 유서 깊은 상징이다. 

    이상과 같은 의미로 법과 법의 지배를 해석한 인물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하이에크(F. A. Hayek; 1899~1992)와 하버드 대학의 유명한 법 철학자였던 풀러(L. Fuller; 1902~1978)인데 그들의 버전(version)이 20세기 이후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그리고 가장 명료하고 현실 적합한 버전이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2. 왜 법이 타락했는가? 

    그러나 시장경제의 분배결과나 자원배분결과를 수정하려는 모든 정책, 토지거래를 억제하거나 복지정책의 바탕이 되는 법은 법이라고 부를 수 없다. 기껏해야 “형식적 법”일 뿐이다. 특정의 산업이나 특정의 직업집단, 특정의 지역을 보호하기 하기 법들은 법의 지배와 정면 대립되는 타락한 법이다. 정의의 규칙으로서의 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법으로서 갖추어야 할 최소한도의 조건도 충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원래 법이란 인간과 인간의 관계(주체와 주체의 관계)와 관련된 것이다. 인간들이 타인들에 대하여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가, 해서는 안 될 행동이 무엇인가와 관련된 것이 정의의 규칙으로서의 법이다. 그런데 복지정책, 분배정책, 자원배분정책, 산업정책을 위한 법은 이런 정책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개인들이 수행해야 할 행동과 과제를 할당해주는 명령 또는 지시와 동일하다. 

    따라서 이런 타락된 형식적 법은 개인과 개인의 관계가 아니라 개인과 정책목표의 관계(주체와 객체의 관계)를 규정한다. 이런 형식적 법은 자유를 억압하고 재산권을 침해하고 개인들을 국가의 집단적 목표를 위한 수단으로 만드는 법이다. 그리고 그것은 보편적이지도 못하고 차별적이다. 정의의 규칙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으로서 일반성과 추상성 조건도 갖출 수 없는 것들이다. 

    실질적 법과 형식적 법을 구분하지 못하고 형식적 법도 똑같이 법이라고 부르게 된 이유, 법이 이토록 타락한 이유가 참으로 흥미롭다. 다섯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설계주의 또는 계획사상의 등장이다. 합리적인 법이란 특정한 구체적인 집단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고 이런 수단으로서의 법은 인위적으로 설계해야 한다는 사상이다. 이렇게 타락된 형식적 법 개념에서 법의 정당성은 그 법을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에서 찾는다. “목표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표현은 이런 타락한 법에 적합한 말이다. 

    법을 타락시킨 두 번째 원인은 민주정치 사상의 등장이다. 그것은 법의 내용은 묻지 않는다. 법의 원천만 묻는다. 다수의 의지가 그 정당성을 부여하는 원천이라고 여기는 사상이다. 다수의 의지에 의해 정해진 것이면 이를 모두 법이라고 이해하는 사상이다. 주권재민 사상은 민주정치사상의 핵심이다. 그러나 그것이 법의 타락을 가져온 장본인이라는 사실 앞에서는 아연실색이다. 

    정말로 민주정치가 탈이다. 법의 타락을 가져온 복지국가의 등장도 민주정치의 탓이기 때문이다. 법을 제정하는데 어떤 구속도 없는 집단적인 의사결정 과정에서는 개인의 자유와 신체와 재산을 보호하는 자유의 법이 아니라 오히려 지배자들의 특수한 목적에 봉사하는 법, 이렇게 타락된 형식적 법이 형성된다. 이것은 민주정치의 역사가 입증하고 있는 분명한 사실이다. 민주정치는 효과적으로 제한하지 않으면 법을 철저히 타락시킨다는 점을 우리는 항상 유념해야 한다. 

    설계주의나 민주사상은 법실증주의의 오류에 빠져있다. 법(law)과 입법(legislation)도 구분하지 못하고 오히려 입법만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정부이전에 법이 있었다는 인류학적 사실도 무시한다. 자생적으로 형성된 법의 존재도 알지 못하거나 무시한다. 

    법의 전통적 개념을 흐리게 만든 세 번째 장본인은 공법학자들이다. 그들 대부분은 법체계의 자생적 성장에 관하여 관심도 없고 또한 이에 관한 경험도 없고 오로지 입법에 관한 지식만을 가지고 있다. 법은 자원배분 또는 소득분배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라고 믿고 있다. 공법사상은 사법을 철저히 유린해 왔다. 그것은 법을 완벽하게 타락시킨 장본인이다. 

    공법학자들에 의한 법의 타락을 뒷받침하고 촉진시킨 것은 흥미롭게도 경제학이다. 케인지언 경제학, 신고전파 미시경제학 그리고 이런 주류경제학의 후생경제학이 그렇다. 오늘날 한국의 경제학계를 지배하고 있는 경제학 교과서로서 맨큐의 경제학도 그런 경제학과 한통속이다. 

    네 번째로 좌파적 가치의 덫에 걸려 있기 때문에 법이 타락의 길을 걷고 있다. “사회입법(social legislation)”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복지국가, 재분배, 평등실현 등, 이런 가치는 법을 타락시키는 장본인이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법의 타락이 더욱 심화되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다. 

    법을 타락시키는 요인들이 우리 사회의 도처에 있습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로 우려스러운 것이 있다. 법의 타락을 막아야 할 우리의 헌법이 법의 타락을 조장하는 중요한 요인이라는 것이다. 경제와 관련된 헌법, 다시 말해서 사회의 상부구조로서 헌법이 그렇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3. 법의 타락을 막기 위해서는? 

    법의 지배와 자유의 법은 동양사회와 그리고 한국사회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주장을 자주 듣는다. 법치 대신에 덕치를 중시해야 한다고 말하는 소리도 자주 듣는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서구사회는 이미 덕치의 실패 경험에서 법치의 지혜를 얻었다는 사실이다. 덕치가 법을 타락시켰고 분배정의 또는 복지와 같은 사회윤리가 법을 타락시켰다는 사실을 인식한 것이다. 서구사회의 이런 값진 경험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법의 지배와 자유의 법, 이것은 서구사회가 동양사회에 준 값진 선물이라고 본다. 

    법의 타락은 사법(私法)의 유린을, 그리고 자유 시장경제의 박해를 의미한다. 그 결과는 개인의 자유와 재산의 불안정, 번영의 후퇴, 그리고 빈곤과 실업이라는 것은 이미 서구사회가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우리 한국사회가 어려움에 처한 이유도 이런 법 개념의 타락과 법의 지배 원칙의 위반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유의 법과 법의 지배야 말로 작은 정부 큰 시장을 위한 제도적 기반이다. 그리고 자유의 법과 법의 지배야 말로 문명된 사회로 가는 길이다. 타락한 법, 그리고 법의 지배의 이탈은 야만의 길이다. 야만의 길에서 문명의 길로 가기 위해서는 법의 타락을 막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지금 법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의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해야 할 때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가 처한 저성장, 고실업 그리고 빈곤층의 확대의 심각한 문제도 해결하기 어렵고 우리의 미래도 기약할 수 없다.

    <객원 칼럼니스트의 칼럼은 뉴데일리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