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9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김진 논설위원이 쓴 시론 'FTA를 사랑한 386'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마지막 산고(産苦)를 겪던 지난 1일, 외교통상부 남영숙 심의관은 협상장인 하얏트 호텔에 있었다. 그는 FTA 협상의 2개 분과장을 맡아 왔다. 졸음은 파도 같았지만 의식은 대양으로 날았다. "드디어 FTA가 되는구나. 꿈인가…." 감방에서, 친구의 주검 앞에서, 미국대학 서점에서 흘렸던 눈물이 냇물이 되어 가슴속을 흘렀다.

    1980년대 초반 정치권과 학생운동권에서는 '남재희 딸들'이 화제였다. 남씨는 언론인 출신으로 78년 유신정권의 공화당 의원으로 당선됐다. 81년엔 전두환 정권의 민정당 의원이 되었다. 남들이 뭐라든 그는 소신으로 두 차례 독재정권에 뛰어든 것이다. 민정당에선 정책위의장까지 올랐다. 딸들도 아버지처럼 고집이 셌다. 그러나 강(江)의 반대편에 섰다.

    딸들은 운동권 하늘을 날아 차례차례 독재정권에 머리를 박았다. 서울대 국사학과를 다니던 장녀 화숙은 81년 반정부 시위로 구속됐다. 2년 뒤에는 고려대 경제학과의 차녀 영숙이 뒤를 이었다. 정권 고위 간부의 딸들이 "광주사태 살인마"를 외치며 철창에 간 것이다. "죄송하다"는 남재희 의장에게 전두환 대통령은 "부모인들 자식을 어떻게 하겠소"라고 위로했다고 한다.

    영숙은 여고 3년 때부터 의식화 서적들을 읽었다. 박현채 교수의 '민족경제론'이나 조세희의 소설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같은 책이었다. 가난한 자, 가난한 나라를 소외시키는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관한 얘기가 들어 있었다. 영숙은 80년 고려대에 들어가 사회과학서클 '겨레사랑회(훗날 현대철학회)'에 들어갔다. 재야운동가 조성우 민화협 상임의장과 신계륜 전 의원 등이 이 서클을 나왔다. 영숙은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선배들과 토론했다. 이영희 선생의 '우상과 이성' '전환시대의 논리'는 기초과목이었다. 독서는 날로 깊어져 마르크스 자본론 해설서와 일본어로 된 좌파경제이론서를 파고 들었다. 책들은 자본주의를 공격하고 반미.반제를 속삭였다. 처음엔 광주사태가 밉고 전두환이 미웠는데, 독서와 토론이 거듭될수록 자본주의와 미 제국주의도 미워졌다.

    서클 남자친구 중에는 떼밀려 군대에 가는 이들이 있었다. 83년인가, 가장 친한 서클 친구가 주검으로 돌아왔다. M-16 소총으로 턱밑을 쏘았다는데 부대에선 "애인이 변심해 자살했다"고 했다. 영숙은 "그 애인을 내가 잘 아는데 변심하지 않았다"고 한다. 83년 가을 영숙은 시위 배후주동 혐의로 한 달여 철창 안에 있었다.

    영숙은 84년 졸업했고 남편을 따라 미국 유학 길에 올랐다. 인디애나 주립대 책방에 처음 갔을 때 영숙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책 한 권 읽으려면 불법이다 아니다 우리가 얼마나 숨바꼭질을 했나요. 그런 책들이 서가에 그냥 교재로 꽂혀있는 거예요. 갑자기 죽은 친구가, 서클 선후배가, 우리가 갇혔던 세월이 서러워 울었지요." 편하게 유학온 것이 미안해서, 그동안 못 읽은 게 억울해서, 죽은 친구를 대신한다며, 영숙은 공부하고 또 공부했다.

    스탠퍼드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국제노동기구(ILO)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일하면서 영숙은 점점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갔다. 세월이 흐르면서 영숙은 서클의 밤을 지폈던 좌파 경제이론들이 얼마나 편협한 것인가를 깨달았다고 한다. 영숙은 "개별 국가의 개발 프로젝트를 연구하면서 나라를 살리는 건 이념이 아니라 현실적인 정책이란 걸 알게 됐다"고 말한다.

    영숙의 사무실에서 창문을 열면 시청 앞의 함성이 들리곤 했다. 한.미 FTA를 저주하는 목소리들이었다. 개중에는 자신이 회색빛 세월을 같이 했던 386 동료들의 목소리도 있는 듯했다. 그들은 여전히 거리에서 "제2의 매국"이라 외쳤을 것이다. 높이 날았던 제비 영숙과, 이념이라는 새장에 갇힌 반FTA 386. 누가 나라의 앞날에 박씨를 물어다 줄 것인가.